“지쳐 잠든 어머니 보며 울던 기억이 나를 만들었다”
▲ 지난 5일 미국 프로풋볼 슈퍼볼에서 소속팀 피츠버그 스틸러스가 우승한 뒤 MVP로 뽑힌 하인스 워드가 트로피를 치켜들고 아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어머니의 눈물.’ 오늘의 워드를 만든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날 워드는 평상시처럼 어머니가 태워주는 승용차를 타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차창 밖에서 친구들이 볼세라 여느 때처럼 의자 속에 깊숙이 파묻힌 채 어머니와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친구들이 보면 ‘피부색 다른 조그만 엄마를 가진 혼혈아’라고 놀려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 차문을 열고 내리다 흘낏 어머니를 쳐다보고는 그만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말았다.
워드는 이때를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나를 위해 희생하시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다니… 좋다, 아무리 놀려도 나는 한국인의 피가 섞인 혼혈아다. 그게 내 인생이다.’
워드의 어머니 김영희씨(59)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생활이 어려워 나이트클럽 종업원으로 일하다 주한 미군으로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흑인 병사와 결혼했다. 1976년 서울에서 워드를 낳았고 다음해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다. 더구나 영어를 못해 경제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양육권마저 박탈을 당했다. 그러나 김씨는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아는 이 하나 없는 미국에서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을 했다. 돈을 모아 아들과 함께 살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떤 때는 시간당 4달러를 받고 하루 16시간을 일했다. 접시를 닦고 호텔청소를 하고 잡화점 계산대에서 일하는 식이었다. 휴일도 없고 휴가도 없었다.
“어릴 때는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과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느닷없이 키가 작은 동양여자가 와서 자기가 어머니라더군요.”
시부모의 양해로 워드와 함께 살게 된 김씨의 고생은 더 심해졌다. 돈 버는 일이 힘들기도 했지만 아들의 외면이 더 그를 괴롭혔다.
“방과후 집에 오면 랩에 씌어진 밥이 어김없이 식탁에 놓여 있었어요. 어머니는 저녁을 차려 놓고 또 일하러 나간 거죠. 전자레인지로 데워 먹었는데 나중에는 그게 더 익숙해지더라구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하는 워드는 “피부색이 다른 어머니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친구들이 나를 혼혈아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싫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씨는 워드를 한국식으로 키웠다. 집에 들어오면 한국식으로 신발을 벗으라고 하고 식탁에는 항상 한국음식이 빠지지 않았다. 워드는 “한국, 한국 문화에 싫증이 날 정도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워드에 대해 김씨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섭섭하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죠. 그러나 언젠가는 아들이 내 사랑을 이해해 줄 것으로 믿었어요.”
반항기를 벗어난 워드도 점차 어머니를 이해하고 존경하기 시작했다.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컸지만 잘 울고 잘 웃는 아이로 커주었어요. 고마운 일이죠.” 하루는 김씨가 힘든 일과를 마치고 귀가해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고교생 워드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소리 없이 울고 말았다.
워드는 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고 고교에서도 성적이 상위 클래스일 정도로 공부도 잘했고 운동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워드와 한 살 때 헤어져 일곱 살 때 재결합했는데 어릴 때부터 농구 야구 풋볼 등 운동을 잘해 동네 경기에서 선물을 타오곤 했죠. 운동을 하고 싶어하기에 하라고 했어요.”
워드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어머니에게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희생정신, 검소,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배웠어요. 지금의 저를 만든 것은 어머니가 몸소 실천하신 그 가치예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는 무척 잘 웃는다. 수상식 때도 늘 웃었다. 웃는 것이 좋아서 미키마우스를 문신하기도 했다. 그래서 팀내의 별명도 ‘미소짓는 살인자’다.
워드의 운동신경은 타고났다. 조지아주 파크고등학교 미식 축구부에서 쿼터백으로 이름을 날린 워드는 러닝과 리시브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미국의 권위 있는 전국지
어머니 김씨는 그러나 워드를 운동선수로만 키우지는 않았다. 고교 졸업 무렵 프로 야구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계약금 2만5천달러를 제안했을 때 학업을 계속해야 한다며 대학 진학을 권했다. 워드도 어머니와 함께 지내기 위해 당시 미국대학체육협회(NCAA) 풋볼 랭킹 1, 2위를 다투던 테네시대와 플로리다대는 물론 네브라스카대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집에서 가까운 조지아대학을 택했다. 어머니가 영어를 아직 잘 못해 영문으로 된 각종 공과금 청구서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학 때 워드가 이름을 날리자 아버지가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워드는 “내게는 어머니만 있을 뿐”이라며 아버지를 돌려보냈다. 그만큼 어머니의 존재는 그에게 전부였던 것.
“언젠가 자기 이름을 한글로 써달라고 하더군요. 써주었더니 그것을 팔에 문신했더라구요.”
워드는 이제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한다. 음식도 한국 음식을 잘 먹는다. 김씨의 말로는 수제비를 제일 좋아하며 한국 식당에 콩나물 같은 것이 없으면 한국 식당이 아니라고 빈정댄단다.
98년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를 연고지로 하는 스틸러스 팀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워드는 이듬해부터 팀을 대표하는 공격수로 성장했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연속 1천야드 이상 패스를 받아냈고 미프로풋볼리그 올스타전인 프로볼에도 출전하는 간판선수로 자라났다.
지난해 9월 4년간 2천7백50만달러(약 2백67억원)라는 팀 역대 최고액을 받고 재계약했다. “어머니가 기뻐 우시면서 기도를 했어요. 어머니는 누가 우리가 이렇게 성공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느냐며 아주 자랑스럽다고 말씀하셨어요.”
워드는 어머니에게 새 집과 벤츠 자동차를 사드렸다. 그러나 어머니 김씨는 아직도 인근 고교의 카페테리아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하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워드는 고교시절부터 사귀던 여자 친구와 결혼, 22개월 둔 아들 제이든을 두고 있다.
“제 선수생활은 어머니와 비슷해요. 처음에는 맘대로 안 되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면 결국엔 다 잘 풀려요.”
흔들리던 워드를 지탱해 준 건 어머니의 일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하루 종일 일하고도 끼니 때면 집에 돌아와 밥을 차려 놓고 가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성공해야겠다’는 투지를 불사르곤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지극히 생각하는 그를 두고 AP통신은 ‘그를 울리려면 어머니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된다’고 썼다.
“MVP로 호명되는 순간 난 믿을 수 없었다.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다. 이 영광은 나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고국 한국을 위한 것이다.” 우승 소감으로 이렇게 말한 영웅이 오는 4월 귀국할 예정이다. 어머니 김씨도 흐뭇해 한다. 그의 귀환이 기다려진다.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