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베컴’과 겨루고 싶다
▲ 토고전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넣은 이천수가 경기 후 환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
영리한 박지성이 토고 수비수의 거친 파울로 프리킥을 얻어내는 순간 그는 계시를 받은 듯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볼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경기장 천장 너머로 프랑크푸르트의 하늘을 올려다봤다.
전반 한 번의 프리킥 찬스를 무산시켜 기회는 왼발의 ‘스페셜리스트’ 이을용에게 넘어간 상태. 공이 놓인 곳도 이른바 ‘이을용 존’. 이을용이 상대의 ‘스크럼’과 골키퍼의 위치를 확인하며 킥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하늘 같은 선배에게 다가갔다. 꼭 자신이 프리킥을 차야 한다며 그라운드에 놓인 볼을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정말 한 번은 더 차야 했다.
이천수에게만큼은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국내 축구팬들에게 뭔가 보여줘야 했고 무조건 ‘일’을 내야 했다. 자신만만해 했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오히려 망신만 당하고 보따리를 싸야 했던 아픈 기억, 몸이 불편한 아버지와 함께 공항까지 나와 손을 잡아주던 어머니의 얼굴도 마치 흑백영화 필름 돌아가 듯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천수의 자존심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이을용은 그의 결의에 찬 표정을 읽고 순순히 물러났다.
볼이 놓인 지점의 잔디를 평탄하게 밟아주며 마음을 다스린 이천수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면서 골키퍼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프리킥 지점으로 달려들면서 볼 밑으로 정확하게 오른발 안쪽을 집어넣고 발목으로 볼에 강한 회전을 걸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산뜻한 느낌. 볼과 발등이 부딪히는 마찰감이 전혀 없다는 느낌, 뭔가 ‘착’하고 발목에 감기는 느낌,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극적인 동점골. ‘혹시나’하면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축구팬들은 하늘을 향해 골세리머니를 펼치는 이천수의 이름을 일제히 연호했다. 그리고 그 여운은 시간이 지나도 가시지 않고 있다.
이천수에게 이 골은 의미가 남다르다. 무엇보다 유럽 적응 실패 이후 실력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평가 절하된 자신이 재평가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골이었기 때문이다.
이천수의 발끝을 떠난 볼이 골네트를 가른 후반 8분. 그야말로 지난 2002년 월드컵 이후 ‘조연’으로 밀려난 ‘당돌한 아역스타’가 다시 ‘주연’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천수가 일찌감치 한국 축구의 차세대 주역으로 주목받아온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실제 이천수 이름 앞에는 중·고교 때부터 ‘축구 천재’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다녔다. 유명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당시 대학 선수들까지 부평고에 다니던 이천수와 연습 경기를 해보는 게 소원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였다.
탁월한 재능과 센스, 특유의 자신감으로 키가 작고 왜소한 신체적 단점을 극복한 그는 늘 각급 대표팀에서 중심 역할을 했다. 청소년 대표 시절은 차치하더라도 약관의 나이에 출전한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서너 살 많은 선배들을 제치고 주전 공격수로 맹활약했다.
당시 모로코와의 예선전에서 대선배 김도훈(은퇴)이 차려는 페널티킥을 빼앗아 자신이 성공시켰어도 누구한테 싫은 소리 듣지 않았던 당당한 이천수였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도 비록 교체 멤버로 출전했지만 고비 때마다 알토란 같은 플레이를 펼치며 4강 신화를 이루는 데 한몫 단단히 거들었다.
늘 대표팀에 이름을 올린 이천수지만 혹시라도 자신과 같은 포지션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은 선수가 있으면 그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청소년대표팀 시절 부평고 동기인 최태욱이 지도자들로부터 “이천수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자 연습에 매달려 기어코 평가를 뒤집어 놓았다.
지난 2001년 고려대 재학 시절 히딩크 감독이 자신의 플레이에 대해 혹평하자 새벽까지 눈물을 흘리며 드리블과 슈팅 연습에 전념, 좀처럼 첫 인상에 대한 평가를 바꾸지 않는다는 히딩크 감독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그러나 그는 월드컵 후 야심차게 진출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두 시즌 동안 한 골도 성공시키지 못하고 팀을 전전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막판에는 부상과 자신감 상실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고 더구나 사생활 및 에이전트 문제와 관련한 각종 루머에 시달리면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2월 전 소속팀인 울산에 복귀했지만 4주간의 군사 훈련 및 팀 적응 문제로 4개월여간 경기에 뛰지 못하면서 심지어는 ‘은퇴했느냐’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 고개 숙인 이천수.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한 장면이다. | ||
자연히 대표팀도 박지성과 이영표에게로 팀 전술의 무게 중심이 맞춰졌다. 어느덧 ‘박지성 시프트’, ‘이영표 시프트’라는 말이 축구팬들에게 낯설지 않은 용어가 되어 버렸다.
반면 유럽 적응에 실패한 이천수에 대한 평가는 냉정해졌다. 정경호 박주영 등 신예 공격수들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면서 더욱 그랬다. 일부에서는 선수로서는 상당히 자존심이 상할 만한 ‘국내용’ 꼬리표를 달기도 했다. 심지어 ‘이천수 무용론’도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이천수는 자신의 가치가 점점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실제 자신의 존재가 ‘이슈’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그가 모질게 마음을 다스리며 다짐한 것은 꼭 월드컵에 출전, 골을 넣자는 거였다. 그래서 무릎과 발목의 통증을 참고 대표팀 훈련 일정을 모두 소화하면서 평가전 때마다 골에 대한 무한한 욕심을 드러냈다.
토고전 직전에는 “골이라는 단어 때문에 생긴 한을 풀고 싶다”고 했다. 마침내 결연한 의지는 결실을 낳았고, 팬들에게 ‘아직 이천수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이천수의 골이 주목을 끄는 이유는 바로 세계의 축구 팬들 앞에서 큰일을 벌였다는 것이다. 특히 경기장을 찾은 유럽 축구 관계자들에게 ‘이천수’라는 이름을 다시 알리게 된 것은 본인에게는 큰 수확이다. 유럽 진출의 시동을 걸 만한 골이었다.
이천수는 유럽 진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특히 박지성과 이영표가 뛰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진출이 그의 최종 목표다. 나이는 불과 스물다섯 살. 병역 문제도 이미 해결했기 때문에 걸림돌은 전혀 없다. 남은 것은 국제적인 경기력을 입증하는 부분이다.
단순히 골을 넣었다고 해서 유럽 진출이 가시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골에 대한 부담감과 압박을 떨쳐 버린 이천수 특유의 스피디한 플레이가 한층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일단 유럽 진출에 대한 축구 관계자와 팬들의 기대 수치가 높아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번 골로 ‘베컴과 맞서고 싶다’는 이천수의 소망과 현실과의 거리가 얼마나 좁혀질지 아니면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질지 월드컵 이후가 주목된다.
또 하나. 이번 골로 ‘이천수는 말로 축구한다’는 편견이 점차 깨지고 있다. 말이 너무 앞선다는 이천수의 안티 팬도 상당수 줄었다.
토고전에서의 극적인 골로 이천수는 자신이 한 말과 약속을 지켰다. 월드컵 직전 프리킥으로 골을 넣겠다는 약속도 지켰고 이동국을 위한 세리머니를 하겠다는 말도 그대로 실천했다.
이천수는 늘 스스로를 “말을 뱉어 놓고 시작하는 스타일”이라고 표현했다. 말을 해놓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죽기 살기도 덤벼든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러나 말 때문에 그간 오해를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토고전 골로 ‘가슴 속의 목표를 말로 뱉어 놓고 그 목표를 찾아가는’ 이천수만의 이미지를 완전히 구축했다. “첼시에 가고 싶다” “친절한 천수 씨로 불리고 싶다”고 내뱉은 그의 말이 이제는 대수롭게 들리지 않는다.
이천수의 천금 같은 동점골은 그의 가족과 여자친구를 울린 골이기도 하다. 아들의 방황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던 부모, 그리고 여자친구인 탤런트 김지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멋진 한 골로 그야말로 ‘세상’을 바꾸고 축구팬들과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킨 이천수. ‘일타이득’이 아닌 ‘일타다득’에 정말 모처럼 두 다리 뻗고 잤을 것이다.
▶프로필
생년월일 1981년 7월9일
신체조건 172cm 64㎏
출신교 부평고-고려대 중퇴
현 소속팀 울산 현대
프로 경력
울산 현대(02~03. 7)
스페인 레알소시에다드(03. 7~04. 8)
스페인 누만시아(04. 8~05. 7)
울산 현대(05. 7~)
대표 경력
98~99 청소년 대표 2000·04 올림픽 대표
2000 아시안컵 대표
02 한·일월드컵 대표, 02 아시안게임 대표
06 독일월드컵 대표
수상 경력
K리그 신인왕(02)
체육훈장 맹호장(02)
아시아축구연맹 선정 올해의 신인(02)
K리그 MVP(05)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