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스타 수렁에 빠진 ‘환란 해결사’
▲ 이른바 ‘이헌재 사단’이 김재록 게이트와 각종 비리 혐의에 연루돼 조사받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이헌재 전 부총리(사진)도 계좌추적을 받고 있다. | ||
외환위기 극복을 최대 치적으로 내세우는 DJ 정부의 경제정책 대명사는 이헌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그에게 따라붙는 수사도 화려하다.
‘경기고가 낳은 3대 천재’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중도에 꺾인 3공화국 관료 시절에는 ‘차관급 과장’이었다는 얘기가, DJ 시절에는 취미가 ‘정책개발’이라는 찬사도 들었다. 하지만 반듯한 모범생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술자리에서도 좌중을 압도할 만큼 주량도 세고 카리스마도 있고 끊임없이 화제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만큼 아는 것도 많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때문에 DJ정부 이후 관계와 금융계에 ‘이헌재 사단’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고 영광은 컸다. 너무 영광이 컸던 것일까. 그가 지금 일생일대의 위기에 몰려있다.
쇼핑몰 대출 압력으로 시작된 대출 브로커 사건이 김재록 게이트로 불거지더니 현대차 비자금 사태를 거쳐 외환은행 매각 비리로 본격적으로 옮겨붙고 있다. 지방의 불법대출 알선 건이 재계-관계를 거쳐 정계까지 뒤흔드는 대형 게이트로 진화하고 있는 것. 김재록 게이트는 외환은행 매각건을 고리로 정·관계 스캔들로 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외환은행 매각 건에 대해 정치권 일각에선 그 핵심에 이헌재 사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재록 게이트는 사건이 번지면서 국내 서열 2위의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 구속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이헌재 사단의 적자로 분류되는 변양호 보고펀드 공동대표(전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구속,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계좌추적, 연원영 전 자산관리공사(캠코) 사장 구속, 김유성 전 대한생명 감사 구속 등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연 씨 등은 현대차 관련 수뢰 혐의로 구속됐지만 시중의 관심은 이들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됐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외환은행 매각관련 비리가 김대중 정부의 환란위기 극복 치적과 DJ정부와 현 정부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수사 결과에 따라 금융계나 관계는 물론 정치 판도까지 뒤흔들어놓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헌재 전 부총리는 애초 DJ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이력을 보면 호남에 살았던 기록은 있지만 그의 부친이 호남 출신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부인이 전두환 정권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호남인맥인 진의종 씨의 딸이다. 게다가 그는 97년 대선 때 이회창 캠프에 줄을 섰다.
그럼에도 DJ는 환란 직후 그를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으로 발탁했다. 그를 고등학교 동창인 정대철 씨가 추천했다는 얘기도 있고 집권 공동파트너인 자민련 쪽에서 추천했다는 얘기도 있는 걸 보면 여러 군데서 그의 재주를 인정한 것은 분명하다.
▲ 지난 14일 밤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구속수감되었다. 연합뉴스 | ||
특히 외환은행 매각 주역 3인방으로 거론되는 김석동 재경부 차관보(전 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1국장)과 변양호 보고펀드 공동대표, 이강원 한국투자공사 사장(전 외환은행장)이 이헌재 사단 인물로 꼽힌다. 실제로 참여정부 고위직을 지낸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은 외환은행 매각 건이 변 전 국장과 김 차관보의 작품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들의 개인적인 인맥을 보면 김 차관보와 변 전 국장은 이 전 부총리의 고교 후배다. 또 보고펀드는 이 전 부총리가 2003년 설립을 추진했던 ‘이헌재 펀드’의 후신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이들의 관계는 끈끈한 것으로 알려졌다.
3인방 중 이강원 사장은 오호수라는 DJ 시절 증권업계 거물을 통해야만 설명될 수 있는 인물이다.
오호수 인베스투스글로벌 회장(전 LG투자증권 사장)은 대우증권에서 경력을 쌓은 ‘마당발’ 증권맨이다. 관료 출신 이 전 부총리와는 색깔이 다르다. 두 사람이 어떤 인연으로 가까워졌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어느 한쪽이 상을 당했을 때 내내 밤을 지새워줄 정도로 챙기는 오랜 친구라고 한다. 또 두 사람은 80년대 중반 대우그룹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이 전 부총리가 DJ 정부에서 금융감독원장으로 롤백한 이후 두 사람이 붙어다녔다는 목격담은 무수히 많다. 그가 여의도 제2증권타운 쪽의 금융감독원에 근무할 때 한 블록 떨어진 제1증권타운의 오 회장과 하루 세끼를 같이 먹은 날도 있다고 한다.
그때는 은행 증권사 보험사 신용금고 등을 포함해 100개 가까운 국내 금융사가 문을 닫았던 금융 구조조정기였다. 당연히 금융권은 ‘이헌재의 입’만 쳐다보았다. 이 전 부총리와 절친하고 호남권 금융인맥의 대부로 떠오르던 오호수 당시 LG투자증권 사장의 ‘위력’도 제1, 2금융권이라는 칸막이를 뛰어넘어 전 금융계에 퍼져나갔다. 그때 분위기에 대해 당시 LG증권 직원들은 ‘마당발 오호수 사장’을 면담하기 위해선 사내 임원도 미리 며칠 전에 면담 일정을 잡아야할 만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기억했다.
그의 경력은 이 전 부총리와 연결되면서 빛을 발했다기보다는 98년 정권 교체가 되면서 팔자가 바뀌었다. 헌정 사장 첫 호남 출신 대통령이 배출된 뒤 LG그룹에선 대우선물이라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는 오호수라는 인물을 LG증권 사장으로 영입했다. 오 회장은 97년 5월 당시 대우증권 부사장을 끝으로 대우증권의 자회사뻘 되는 회사로 나가 있었다.
하지만 정권교체가 이뤄지자 오 회장은 제2의 금융인생을 꽃피웠다. LG로 간 오 회장은 대신증권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 초기 기아포드할부금융 대표로 일하던 이강원 씨를 LG로 불러들였다. 그때 기아차 재산 보전관리인으로 있던 이가 진념 씨다. 진 씨는 DJ 시절 부총리까지 지냈다. 진 씨와 인연을 맺은 이강원 씨는 LG증권 사장 자리에 오른 오호수 사장에게 픽업돼 99년 4월 LG구조조정본부 사업조정팀 전무로 갔다. 이어 LG구조본 부사장을 거쳐 2000년 12월 LG투자증권 부사장, 2001년 3월 LG투자신탁운용 사장으로 갔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만에 외환은행장으로 깜짝 발탁됐다. 발탁배경엔 ‘외자유치’, ‘능력’, ‘구조조정’, ‘개혁성향’ 등의 수식이 달렸다.
▲ 지난 19일 감사원이 외환은행 론스타 매각 관련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종현 기자 ish@ilyo.co.kr | ||
김재록 게이트와 관련된 이헌재 사단의 면면은 아더앤더슨이라는 컨설팅 회사를 통해 또 하나의 원을 그린다.
김 씨는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캠프에 합류했다. 대선이 끝남과 동시에 아더앤더슨이라는 미국계 경영컨설팅회사 한국지사장으로 부임한 그는 아더앤더슨에서 DJ정권의 실세 관료들과 폭넓은 인맥을 구축했다. 당시 경제 실세였던 진념 전 부총리나 당시 KDI원장이던 강봉균 의원, 김진표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당시 재경부 차관), 정건용 당시 산업은행 총재 등의 자녀들이 ‘이력서’ 한칸에 아더앤더슨의 경력을 채웠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인물은 DJ의 인척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DJ의 처조카인 이형택 전 예보 전무의 동생인 이정택씨가 아더앤더슨의 고문으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당시 아더앤더슨은 자산관리공사와 예보로부터 부실자산 관리대행업무를 집중적으로 수주해 500억 원대의 수익을 본 것으로 전해진다. 김 씨의 이 같은 대규모 수주는 당시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 등 경제부처 실세와 호남 인맥을 통한 친분이 한몫했을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외환은행이 론스타에 넘어가던 시절 이 전 부총리는 김앤장법률사무소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때 론스타의 법률대리인은 김앤장. 이른바 이헌재 사단으로 불리는 이들이 외환은행 매각을 주도했고 이헌재 본인은 김앤장에서 고문료를 받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 인맥의 친목관계는 동반 해외여행으로도 증명이 됐다. 지난 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 당시 김재록 씨가 이헌재 전 부총리, 오호수 회장, 강봉균 의원 등을 부부 동반으로 초청, 함께 시드니 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이다.
김재록 씨가 구속되기 직전 인베스투스글로벌 회장에서 물러나자 오호수 씨가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이헌재-오호수-김재록으로 이어지는 고리가 상당히 끈끈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 씨를 이 전 부총리에게 소개한 인물은 오 회장으로 알려졌다. 이 전 부총리는 김재록 게이트가 터진 이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재록 씨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이 전 부총리에게 김 씨를 멀리하라는 조언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환은행 매각건은 론스타의 매입금액만 1조 4000억 원대의 초대형 거래였다. 이런 거래를 이헌재 사단이라는 테크니컬한 관료들만의 힘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그 이상의 배후가 있었는지는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야 알 수 있을 것같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