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 완벽 주의자 ‘마법’은 없다
▲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두 번의 월드컵에서 히딩크와 아드보카트 감독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감독급 수석코치로 명성을 알린 그이지만 정확히 지천명의 나이(50)가 되서야 명실공히 제대로 된 A팀을 맡게 됐다.
한국과는 참 각별한 인연이다. 한 국가의 월드컵 대표팀 코치를, 그것도 이방인이 두 차례나 맡았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궁합이 잘 맞는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경력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도 팀에서 중도 하차하는 불운이 여러 번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일이 술술 풀렸다.
히딩크 감독과 함께 월드컵 4강이라는 기적을 일궈냈고, 그 후광을 업고 이번 월드컵에서도 수석 코치로 대표팀을 이끌었다. 그리고는 결국 대표팀 감독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까지 올라섰다. 그에게 한국은 이제 제2의 고향이다.
핌 베어벡 신임 감독이 한국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지난 2001년 1월이다. 핌 베어벡 감독은 히딩크 감독이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어시스트 코치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98년부터 2000년까지 일본 J리그 오미야에서 감독과 홍콩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 있으면서 아시아 축구를 경험한 그는 한국에 부임하자마자 한국 수비를 대대적으로 수술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당시 대표팀의 수비 라인은 10년 넘게 고정된 형태였다. 홍명보를 중심으로 하는 스리백은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시작으로 94년과 98년 월드컵을 거쳐 히딩크 감독이 취임할 때까지 이어졌다.
홍명보를 리베로로 두고 투 스토퍼들이 상대의 공격수를 대인 마크하는 수비 전술은 90년대 한국 축구의 자존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이 당시 대표팀을 맡은 감독 누구도 수비 라인만큼은 전혀 손을 대지 못했다.
하지만 핌 베어벡은 거침없이 메스를 댔다. 홍명보가 중심이 아닌 네 명의 일자 수비가 혼연 일체가 돼야 하는 포백을 대표팀 수비 라인에 이식했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의 수비 형태는 일자 스리백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이미 우리 수비수들은 스리백과 포백에 적응력을 높였고, 이후 대표팀 수비 라인도 획일화된 형태에서 벗어나 다양한 조합을 시도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
핌 베어벡 감독이 대표팀 수비 라인의 개혁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압박이라는 세계적 축구 흐름을 처음으로 대표팀 시스템에 이식한 메신저이기도 하다.
지난 2001년 한국 선수들과 훈련한지 이틀째 되는 날, 핌 베어벡은 대표 선수들에게 처음 한국어로 지시를 내렸다. 핌 베어벡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정확한 한국말로 ‘압박’이었다. 당시 국내 선수들은 압박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쉽게 와 닿지도 않았다. 압박이라고 주문하니까 무조건 따라 하기에 바빴다. 5년이 지난 지금 핌 베어벡이 당시 수백 번, 수천 번 외쳤던 이 한 마디는 이제 한국 축구가 키워드가 됐다.
▲ 2002년엔 히딩크와 함께 4강 신화를 일궜고(왼쪽) 2006년엔 아드보와 함께 했다. | ||
핌 베어벡 감독은 기자 간담회에서 “한국적 축구에 강하게 압박하는 네덜란드식 축구를 접목시키겠다”고 말했다.
역시 히딩크 및 아드보카트 감독과 4년간 함께 일한 핌 베어벡 감독답다. 그가 말한 축구 철학은 두 명장의 스타일을 적절하게 절충한 형태다. 11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토털 사커를 기본으로 하는 강한 압박 축구를 선호한다는 게 두 감독과 일맥상통한 부분이다.
핌 베어벡 감독의 스타일을 굳이 따진다면 히딩크 감독의 스타일과 가깝다. 공격과 수비의 큰 맥을 잡고 정공법으로 상대하는 아드보카트 감독보다는 각종 구체적인 데이터 활용 등을 통해 90분간의 전술을 자유자재로 변화시켰던 히딩크 방식의 축구를 선호하는 편이다.
즉 정형화된 틀보다는 상대의 전술과 선수들의 구성 분포에 따라 다양한 시스템 변화를 구사한다는 얘기다. 여기에 한국 특유의 스타일을 접목시켜 독특한 퓨전 스타일을 만들고자 하는 게 핌 베어벡 감독의 속내다.
핌 베어벡 감독이 늘 얘기하는 신조가 있다. 바로 ‘당면 과제를 놓고 앞을 내다보지 말라’는 것이다. 보통 지도자들은 어떠한 과제가 주어지면 그 이후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핌 베어벡 감독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풀어 나가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조를 통해 대표팀 감독을 맡은 그의 목표를 희미하게나마 읽을 수 있다. 계약 기간 2년 안에 계획된 과제 성취를 위해 힘을 집중하면서 재계약 여부는 다음의 일로 받아들이겠다는 나름의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핌 베어벡 감독이 완벽주의자라고 불리는 것도 주어진 일에 충실하자는 그만의 신조에서 기인한 측면이 강하다. 그렇다고 여유가 없는 고집불통 완벽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짧은 시간에 최대 효과를 끌어낸다는 매우 현실적인 완벽주의자에 가깝다는 평이다.
당연히 그의 장점은 꼼꼼하고 실수 없는 일처리가 단연 돋보인다는 것. 이미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입증됐고 이번 월드컵 준비 기간에도 재차 확인됐다. 히딩크와 아드보카트 감독 모두 팀 세부적인 훈련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 전권을 부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분석력과 선수 조련에도 탁월한 재주가 있다.
그간 한국 축구 관계자들에게 각인된 인상은 감독을 보좌하는 참모로서 완벽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감독과 코치와 엄연히 다르다. 핌 베어벡이 감독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첫 감독직을 맡았다.
일단 핌 베어벡 감독의 능력은 차치하더라도 감독 앞에 놓여 있는 과제가 워낙 많아 우려스럽기는 하다.
당장 아시안컵 예선과 아시안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우선 성적을 내야 하는 부담에 직면한다. 동시에 대표팀의 체질 개선과 세대교체를 이뤄내야 한다. 숨 가쁜 행보다.
핌 베어벡 카드로는 큰 기술적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고 새로운 축구 흐름을 전수받는 외국인 감독 영입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비난도 넘어야 할 산이다. 순탄치만은 않다.
그가 한국에서의 행운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지 매우 주목된다.
프로필
생년월일 : 1956년 3월 12일생
국적 : 네덜란드
가족관계 : 부인과 자녀 3명
선수 경력 : 네덜란드 스파르타 로테르담(1974∼1980년)
지도자 경력 :
네덜란드 스파르타 로테르담 코치 및 감독 대행(1981∼1984년)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감독 대행(1989∼1991년)
FC그로닝겐 감독(1992∼1993년)
일본 J2리그 NTT 오미야 감독(1998∼2000년)
한국 대표팀 코치(2000∼2002년)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번 2군 감독(2002∼2003년)
일본 J2리그 교토 퍼플상가 감독(2003년)
네덜란드령 안틸레스 대표팀 감독(2004년)
독일 보루시아 MG 수석코치(2004년)
아랍에미리트연합(UAE)대표팀 수석코치(2005년)
한국 대표팀 수석코치(2005년 9월∼현재)
유재영 기자 elegan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