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길’ 의 끝자락 비상과 추락의 갈림길
▲ 지난 7월 1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 대표 경선 후보 연설에서 역설하는 강재섭 대표. 그는 ‘비단길’만 걸어왔다는 비판론에 맞서 2007 대선 승리를 위해 당장 내홍에 빠진 당을 수습해야 한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강 대표는 과연 한나라호를 잘 이끌어갈 수 있을까. 그를 잘 알기 위해 우선 살펴본 그의 이력서는 차고 넘친다. 학력이나 경력 모두 화려하다. 더구나 당 주요 직책을 거쳐 이제는 제 1야당의 당수에도 올라 당에서는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화려한 이력서는 안전한 운항의 보증수표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질지 못하다. 정치적 고비마다 우유부단하다는 지적도 받았다. 그의 조심스러운 항해 지시가 ‘도로 민정당’이라는 꼬리표를 떼게 할 수는 있을지, 경선을 통해 불거진 ‘친박-친이’ 대결 구도의 갈등도 제대로 씻어낼 수 있을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권에서 당권으로 돌아온 남자, 강재섭의 정치 인생 4막5장을 들여다본다.
강재섭 대표최고위원은 소탈하고 인간적인 사람이다. 어떤 격식 있는 자리에서도 부드러운 유머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이끈다. 엄청난 독서량에서 나오는 ‘고급스런’ 유머는 때로 듣는 사람들이 따라가지 못해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될 정도로 고차원적일 때가 있다. 그는 술자리에서 취기가 오르면 옆 사람 손을 꼭 잡으며 체온을 나누는 데도 익숙하다. 서울법대, 검사 출신의 엘리트가 가지는 경계심과 ‘잘난 체’ 증후군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한때는 기자들이 베스트 정치인에게 주는 백봉신사상을 수차례 받았을 정도로 반듯한 사람이다.
또한 동료 의원들과도 허물없이 지낸다. 그가 가진 특유의 친화력 때문이다. 그가 원내대표를 지냈을 때 그를 보좌했던 한 의원은 “계파-선수 구분 없이 누구를 대하더라도 사람을 편하게 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회상한다. 강 대표 본인도 원내대표 시절 “이제까지 단 한번도 전임 지도부를 공격한 적이 없고, 양보만 거듭해 온 탓에 그리 인심을 잃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가 뭘 하겠다고 하며 설혹 불만이 있는 분들이라도 ‘강재섭이가 하는 일인데 좀 봐주자’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고 자부한다”고 자신 있게 자랑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강 대표는 소위 말하는 포커페이스 스타일은 아니다. 심중의 뜻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다. 보좌진들이 듣기 싫은 직언이라도 하면 금세 얼굴이 굳어진다고 한다. 그를 보좌했던 한 인사는 “몇 번 의원님에게 직언을 했다가 면박을 당한 뒤부터 제대로 얘기를 하지 않는다. 물론 기분 나쁜 소리 하면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정치인은 열린 귀를 가져야 제대로 큰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도 ‘민감한’ 문제가 나오면 “그 문제는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며 말머리를 싹뚝 잘라버린다. 언급되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데 포커페이스 스타일의 정치인들은 기자들이 듣기 싫은 질문을 하면 ‘동문서답’으로 대충 때운다. 하지만 솔직 담백하고 또 일부에서 말하듯 ‘착한’ 강 대표는 구렁이 담 넘어가는 기술이 별로 없다. 정색을 하고 ‘민감한’ 문제는 묻지 말라고 직설적으로 요구한다. 이런 그의 성향이 때로는 ‘통 큰’ 정치인으로 인식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강 대표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민감한’ 문제는 과연 무엇일까. 대표적 사례가 바로 그의 ‘정치적 안전운행 행보’에 관한 것이다. 정치권은 강재섭 대표를 ‘주류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주류만 걸어왔던’ 정치인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비단길만 걸으려고 한 나머지 정치적 의리를 버릴 때도 있었다”는 지적도 한다.
반면 그는 “13대 민정당 시절부터 지금까지 당적을 한번도 바꾼 적이 없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먼저 그는 6공 시절 ‘월계수회’와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월계수회의 제 2인자로 통했다. 월계수회는 5·6공 시절 실세로 군림했던 박철언 의원이 이끄는 사조직이었다. 그러나 그는 14대 대선이 임박했던 1992년 10월 김영삼 전 대통령에 반기를 들고 민자당을 탈당한 박 의원을 따라가지 않았다. 의리보다는 주류를 택한 것이다. 다음은 그의 반박.
“나는 민정계로서 반 YS 입장에 있었고 마음속으로 후계 구도가 YS쪽으로 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후보 경선 결과에 승복하고 싶었다. 박철언 의원을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경선 결과에 승복해 달라’는 입장에서 설득했다.”
그리고 한나라당 공천파동의 산물인 민주국민당의 창당 작업이 한창이던 지난 2000년 2월. TK 맹주로 불려온 김윤환 의원의 탈당으로 TK 의원들이 동요할 때 그의 선택은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김윤환 의원은 그의 정치적 대부로서 강 대표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때문에 김 의원이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그는 끝내 ‘대부’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보통 한국의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바람막이이자 도약대가 되어준 ‘대부’와 끝까지 정치적 항로를 같이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가 ‘매정하게’ 김윤환 의원과 인연을 끊은 것이 훗날에도 계속 부담으로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이런 그의 행보를 두고 일부에서는 “머리가 뛰어난 데서 오는 탁월한 처세술”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물”이라고 깎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의리에 연연하지 않고 정치적 명분을 지키는 정치인”이라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 대표 또한 “큰 바다는 작은 물줄기를 가려 받지 않는다(大海不擇細流)”던 할아버지의 말씀을 좌우명으로 내세우며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항변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올해 초 기자에게 “내가 동창회를 하기 위해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켜야 할 가치를 국민에게 실현하기 위해서 나왔다.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나름대로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 당을 지키는 것이 최선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정말 고뇌에 찬 결단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적도 있다.
▲ 지난 2002년 당 대표 경선에 나선 강 대표(오른쪽서 두 번째). 그는 4위에 머물렀다(위),지난 2003년 강 대표(왼쪽서 두 번째)는 대표 경선에 다시 도전하지만 실패했다. | ||
강 대표가 항상 주류에 서려 했다는 주장과 나름대로 명분을 지키려 했다는 주장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강 대표가 대권에서 당권으로 정치적 항로를 바꾼 것은 그가 험한 길보다는 비단길(주류)을 선호한다는 주장에 무게를 실어줄 수 있는 행보다. 다음은 그가 최근까지 말했던 대권 도전 발언.
“대권에 올인할 것인 만큼 좌고우면하지 말고 믿고 함께 가자. 아직 상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3룡에 들지 못했지만, 올 연말까지 지지도 10%를 확보하면 다음은 자신 있다. 대권에 매진하다 안 되면 당권으로 옮기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화합형 리더십’으로 승부를 걸겠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을 보도했던 기사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스스로 대권 꿈을 번복해버렸다. 7·11 전당대회가 열리기 약 한 달 전 강 대표는 “대통령선거에 나가려 했으나 내년 대선까지 당이 분열되지 않도록 이끌어달라는 의원들의 요청이 많아 고민 중이다. 내가 대통령병에 걸린 사람도 아니니 필요하다면 시대에 봉사할 생각”이라고 처음 당권 도전 의사를 밝힌 것이다.
강 대표의 당권 선회에 대해 일부에서는 “현실적이고 현명한 선택”이라며 그의 ‘실용주의적 노선’을 지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강 대표는 이번에 대권으로 갔어야 한다. 이번에 안 되면 차차기도 있다. 그는 손학규 경기도 전 지사보다도(1947년생) 한 살 아래다. 아직 젊고 기회도 많은데 왜 스스로 그 꿈을 접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동안의 오락가락 행보에 대한 해명에 설득력이 없다. 이런 것만 보면 그가 왜 주류만 걸으려고 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다.
경위야 어찌됐든 강 대표는 19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등원한 뒤 18년 만에 제 1야당의 당수로 섰다. 사실 이번 당선은 그에게 큰 의미가 있다. 4전5기 끝에 이룬 작은 승리이기 때문.
먼저 그의 실패기부터 보자. 지난 1998년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에게 도전장을 던졌지만 ‘선배들의 만류’ 때문에 전당대회 출마의 꿈을 접어야 했다. 당시 그는 ‘한국의 토니 블레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며 기세 좋게 총재 경선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출마 선언 8일 만에 선배들에 의해 ‘진압’당해 버렸다. 그때 대구경북과 강 대표 주변에서는 ‘기대를 저버렸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이후 지난 2000년부터 계속된 세 번의 전당대회 성적표도 신통치 않았다. 특히 지난 2002년 치러진 전당대회에서는 서청원 강창희 김진재 의원에 이어 4위를 했고 2003년 전당대회 때는 3등을 했다. 2002년까지만 해도 이회창 전 총재의 견제로 뜻을 펴기가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지난 2003년 전당대회 때는 대구 경북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도 당권 도전에 실패해 “강재섭 시대는 끝났다”는 최후의 이야기까지 들어야 했다.
그동안 보여준 초라한 성적표는 “성격이 무르고 독한 맛이 없다”는 세간의 평가와 맞물려 그의 가슴을 더욱 쓰리게 했다. 그래서 그는 이번 경선에서 이를 악물었다. ‘사생결단’ ‘사즉생’이라는 말을 수없이 외치고 다녔다.
결국 그는 ‘친박 대리전’ 논란 끝에 승리를 낚았다. 하지만 자신의 말대로 그 승리의 충만함은 이미 ‘추억’의 장으로 넘어갔다. 이제부터 강재섭 식 정치를 확실하게 보여주어야만 할 입장이다. 먼저 이번 대표 경선에서 이재오 최고위원과의 ‘친박-친이’ 대리전 공방으로 야기된 양측간의 감정 싸움을 치유해야만 한다. 만약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세 불리를 견디지 못하고 탈당이라도 하게 되면 그는 당내로부터 대선 후보 관리 책임을 물어 2년의 대표 임기를 다 채우지도 못하고 중도하차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한나라당은 박근혜 전 대표를 제외하고 2년 임기를 채운 대표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에서 강 대표의 앞날이 순탄치 않음을 예고하고 있다.
‘도로 민정당’이라는 당내 소장파(원희룡 의원)의 공격에도 맞서야 한다. 그가 5공 출신 검사이긴 하지만 향후 그 이미지를 깰 수 있는 파격적 행보와 통합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당내의 또 다른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경선 과정에서 ‘친박’의 대표주자처럼 각인된 상황도 추슬러야 한다. 사실 그는 엄밀히 말해 ‘박근혜 돌격대장’은 아니다. 지난해 원내대표직을 수행할 때도 종종 박 전 대표의 행보를 비판하는 공격적인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가 비록 “대권 출마의 꿈은 완전히 접었다”고 하지만 공정한 대선 후보 경선 관리를 통해 ‘친박’ 이미지를 털어 낸다면 ‘뜻하지’ 않는 기회가 다시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다.
강재섭 대표는 ‘비단길을 걸어온’ 엘리트 정치인의 전형처럼 비친다. 소탈한 성격도 풍요한 성장 배경에서 나온 여유로움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 비단길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정권 재창출이라는 오지를 나침반 하나 들고 한나라당 대권 후보를 이끌어주어야 한다. 용기와 배짱이 넘치는 ‘투사’ 강재섭이 되지 않는다면 그가 전당대회에서 피 끓게 외치던 정권 재창출도 한낱 웅변에 불과할 것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