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
▲ 지난 96년 전국지구당위원장회의에서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대철 고문. | ||
96년 15대 총선 때 낙마해 원외로 밀려나는 설움을 겪기도 했지만 2000년 4·13 총선에서 승리해 재기에 성공했다. 또 DJ 정권 때는 비주류로 전전하다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 선대위원장을 맡아 대선승리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현 정부 실세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하지만 정 고문은 권력의 단맛을 채 맛보기도 전에 2004년 이른바 ‘굿모닝 게이트’ 사건에 연루된 혐으로 구속됨으로써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안희정 씨와 함께 대표적인 ‘참여정부 비운의 공신’으로 분류되고 있다.
서울이 고향인 정 고문은 경기고-서울대 법대·동 대학원을 졸업하는 등 성장 과정에서부터 줄곧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특히 정 고문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영향을 많아 받고 자랐다. 그의 부친은 잘 알려진 대로 외무장관과 8선 의원을 지낸 고 정일형 박사이고, 모친은 국내 첫 여성 변호사로 오랫동안 여성운동을 펼쳐온 고 이태영 변호사다.
정 박사 내외는 DJ와 특별한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 박사는 71년 대선후보로 출마한 DJ의 선대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이 변호사는 DJ 선거운동을 위해 이화여대 법정대학장직을 사직할 정도로 각별한 친분을 유지해 왔다.
정 고문이 자신의 정치역정 과정에서 DJ에게 적잖게 반기를 들었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DJ와 그의 부모와의 특별한 인연이 작용했을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정 고문은 일제강점 말기였던 1944년에 태어났다. 당시 그의 부친인 정 박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마지막 강연을 주선하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평양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어려운 가정살림과 옥바라지는 고스란히 모친인 이 변호사 몫으로 남겨졌다.
이 변호사는 삯바느질은 물론 옷감 장사를 하면서 밤에는 선교사댁 지하 시멘트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지내야 했다. 정 고문은 암울했던 시절에 산파도 없이 처음 세상구경을 해야 했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온 정 고문은 서울 청운초등학교를 갓 들어간 해(50년)에 한국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정 고문의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그는 초등학교 5학년까지 이곳 부산에서 지냈다.
이후 다시 서울로 올라온 정 고문은 당시 최고의 수재들이 몰려 있는 경기중·고를 다녔다. 중·고시절 그는 깡마르고 열심히 공부하는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에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집안사정으로 잘 먹지 못하고 고시공부를 하다가 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결핵을 앓고 병원에 누워있으면서도 시위 주모자로 몰려 4번씩이나 정학을 당하면서도 민주화운동은 포기하지 않았다.
정 고문은 특히 이 시절을 부모님의 명성 때문에 최소한 부모의 명성에 부응하는 자식이 되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극도로 짓누르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대학교수를 희망한 부모의 뜻에 따라 미국 유학길에 올라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으나 76년 3·1 구국선언 사건이 터지면서 그의 인생도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부모가 모두 실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령의 8선 의원이었던 정 박사는 국회의원직을, 이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을 각각 박탈당했다.
결국 정 고문은 부모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보궐선거에 출마했고 선친의 후광을 등에 업고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이후 정 고문은 제10·13·14·16대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중진급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