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은 끝났다 ‘우승 청부’ 맡아주마
▲ 메이저리그 진출 꿈을 잠시 접고 요미우리에 잔류하기로 결정한 이승엽의 내년 시즌 행보가 자못 기대된다. | ||
▶▷요미우리 잔류 결정 과정
이승엽의 진로는 지난 9월 말까지만 해도 안개에 휩싸여 있는 듯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이승엽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요미우리에 대해 변함없는 감사의 마음과 함께 깊은 애정을 드러내긴 했지만 자신의 내년 거취를 묻는 질문에는 “아직 모르겠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지난 10월 10일 도쿄 돔구장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올시즌 마지막 홈 경기에서 이승엽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왼쪽 무릎 수술 때문에 시즌 최종전인 10월 15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경기를 포기한 채 이날 시즌 마지막 경기를 치른 이승엽은 일본 언론과의 공식 인터뷰가 끝난 뒤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공식 인터뷰에서 “가급적이면 빨리 결정하고 싶다”며 느긋했던 이전과는 다소 바뀐 태도를 보인 이승엽은 결정 시기를 묻는 필자의 질문에 “빠르면 이번 주도 될 수 있다”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이승엽의 말투로 봐서는 모든 게 이미 결정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승엽은 이날 경기 직후 “내년에도 같이 뛰자”는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말에 “고맙다”는 말로 화답을 하기도 했다.
그 일이 있은 뒤 13일 만인 10월 23일. 구단 지정인 도쿄 게이오 대학 병원에서 왼쪽 무릎 수술 부위의 실밥을 제거한 날이었다. 요미우리 구단 측은 뭔가 서두르고 있다는 인상을 남기면서 “이승엽 선수의 대리인인 미토 시게유키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승엽 선수는 내년에도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기로 결정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계약 연수와 연봉 등 구체적인 조건을 모두 생략한 채 내년 재계약 원칙만 발표한 것이 조금은 이례적이었다.
당시 이승엽의 재계약 문제는 요미우리 담당 기자들의 집요한 취재로 어느 정도 일본 매스컴에서는 99% 확신 쪽으로 분위기가 굳어진 상황이었다. 한 요미우리 담당 기자는 구단의 발표가 있기 며칠 전 취재진의 공세에 말문을 열려던 하라 감독을 홍보 직원이 애써 저지하는 장면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라 감독은 “아직도 구단에서 발표를 하지 않았느냐”고 취재진에게 되물으며 의아해 했다고 한다.
이승엽은 9월 인터뷰에서 “일본에 남는다면 요미우리 이외에는 다른 팀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빌딩을 사 준다고 해도 싫다”는 말끝에 무심결에 “요미우리를 우승시키고 싶다”는 말을 흘렸다. 이승엽의 선택은 이미 9월 이전에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던 것이다.
▶▷조기 결정 배경은 무엇?
이승엽이 심한 무릎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8월부터였다. 홈런을 치고도 통증으로 전 타석에서 출전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자 도쿄 돔구장을 찾던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9월 초 이승엽이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원정 경기를 위해 나고야에 갔다가 돌연 무릎 검사를 위해 도쿄 게이오 대학 병원으로 돌아가 정밀 진단을 받은 것이 어떻게 보면 이승엽을 둘러싼 메이저리그 쪽 움직임의 큰 전환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만난 한 메이저리그 관계자는 느닷없이 “이승엽이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묻기도 했다.
이승엽은 당시 주치의로부터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사실은 곧바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검사 뒤 한 달 정도가 지난 10월 초 이승엽의 수술 소식이 일본 매스컴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됐지만 이미 그때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움직임이 수그러들 대로 수그러든 상황이었다. 일부에서는 이미 메이저리그 팀들이 스카우트 작업을 중지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일본 언론은 이승엽이 정말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의지가 강했다면 일찌감치 수술을 받았을 것이라는 분석을 하며 잔류가 결정적이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엽의 입장에서는 시즌 막판 타이론 우즈(주니치 드래곤즈)와의 홈런왕 경쟁을 하고 있는 마당에 시즌 1개월여를 앞두고 시즌을 접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이처럼 메이저리그의 움직임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간 것을 모를 리 없는 이승엽에게 최선의 선택은 ‘조기 잔류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승엽은 “재계약을 질질 끌면서 괜히 몸값을 올리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며 요미우리와 메이저리그 쪽의 경쟁을 붙이고 싶지도 않고, 그런 상황도 아니라는 것을 토로하기도 했다.
개막 초반까지만 해도 메이저리그 진출과 관련 “일단 시즌 뒤 양쪽의 카드를 보면서 시간을 갖고 결정을 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던 이승엽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메이저리그 쪽은 왼쪽 무릎에 불안감을 안고 있는 이승엽에 대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대시하려는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메이저리그 찬스 또 올까?
만 30세였던 올해 빅리그 진출 찬스를 놓친 이승엽은 “요미우리와 하라 감독에게 꼭 보답하고 싶다. 내 손으로 하라 감독을 헹가래 치고 싶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요미우리를 우승시키고 미국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그만큼 이승엽의 ‘요미우리 사랑’이 각별하다. 개막 초반부터 시즌 끝까지 그야말로 일편단심이었다.
일본 프로야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동안 이승엽의 메이저리그 성공을 점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요미우리에서 1992년부터 2005년까지 14년간 내야수로 뛰었던 모도키 다이스케(35)는 요미우리와의 재계약을 여전히 아쉽게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 요미우리 그룹 계열의 스포츠신문 <스포츠호치>의 평론가와 TBS 라디오의 야구 해설가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시즌 중 “팀에는 좀 미안한 얘기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승엽이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모습을 한번쯤은 꼭 보고 싶다”며 이런 얘기를 했다.
“이승엽은 마쓰이 히데키(뉴욕 양키스)보다 타구의 비거리에서는 뒤지지만 좌-우 가리지 않고 안타를 칠 수 있는 기술이 있다. 마쓰이는 요미우리 시절 대부분 당겨 쳐서 대형 홈런을 뽑아냈다. 마쓰이는 이런 약점을 고치기 위해 메이저리그 진출 뒤 타격 폼에 손을 댔지만 이승엽은 현재의 스윙을 그대로 가져가도 분명히 통할 수 있다. 타격 밸런스가 무너진 상태에서도 안타를 칠 수 있는 능력이 이승엽에게는 있다. 이승엽은 마쓰이보다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이승엽은 올시즌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로부터 팬들이 기대했던 것만큼의 높은 평가를 끌어내지 못했다.
시즌 중 만난 한 메이저리그 관계자는 “마쓰이는 오랫동안 일본 프로야구에서 꾸준한 성적을 낸 뒤 메이저리그에 입성했다. 이승엽이 자신의 야구를 보여준 것은 올 한 해뿐이었다”고 조심스런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승엽이 자신의 현역 야구 인생의 마지막 꿈이기도 한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한 것은 물론 아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무대를 메이저리그에서 장식하겠다는 의지는 아직도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요미우리의 이심(李心) 잡기
일본프로야구에서 최대의 재력을 뽐내는 요미우리의 ‘승짱 잡기’는 개막 초반부터 일찌감치 막을 올렸다. 하라 감독은 이승엽을 개막전부터 붙박이 4번 타자로 기용하면서, 간혹 이승엽이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변함없는 신뢰와 애정을 보였다.
기요다케 히데토시 단장과 다키하나 다쿠오 사장은 이례적으로 개막 초반부터 이승엽과의 재계약 추진 의사를 명확하게 밝혔고 일본 프로야구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야구계의 큰손’인 요미우리 그룹의 와타나베 쓰네오 회장까지 ‘승짱 재계약’ 특명을 내리기도 했다.
벤치에서의 전폭적인 신뢰와 구단의 강한 의지가 잘 어우러지면서 ‘요미우리맨 이승엽’의 이미지 굳히기 전략은 위에서부터 치밀하게 진행돼 왔던 셈이다.
이승엽은 올시즌 요미우리의 ‘선심’에 두 번 놀랐다. 요미우리 입단 직후 참가했던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선전한 공로로 일본 대표팀 마운드의 기둥 투수였던 우에하라 고지와 함께 1000만 엔의 격려금을 받았다. 이승엽은 “정말 상상 밖이었다. 대단한 팀이다”라고 입을 쩍 벌렸다.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한 번도 뛰지 않은 선수에게 팀 에이스와 동등한 대우를 해준데 대해 놀란 것이다.
또한 8월 1일 도쿄돔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즈 전에서 한-일 통산 400홈런을 친 기념으로 100만 엔의 보너스를 받았다. 요미우리는 규정상 야구단의 경비로는 격려금 지급이 힘들어 계열사인 니혼TV 협찬이라는 형식을 빌어 두 번째로 거액 당근을 안겼다.
화끈한 대우는 물론 팀 브랜드에 대해서도 강한 프라이드를 갖고 있는 이승엽은 “프로야구 선수로서의 자세 등 다른 팀에서 배울 수 없는 많은 소중한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도쿄=양정석 일본 데일리스포츠 신문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