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규 국정원장은 참여정부와의 ‘악연’을 떨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됐다. | ||
“DJ 때도 국정원의 정치 개입 배제를 강조했지만 그래도 국정원장과의 독대 주례보고는 유지했는데 현 정부에서는 그마저도 아예 없어졌다. 국정원장이 무슨 특위 위원장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최근 기자가 직·간접적으로 접하는 국정원 관계자들의 하소연이다. 그런 국정원이 최근 현 정권 들어 가장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일심회’ 간첩사건이 정국의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고, 국정원장 인사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면서 사상 첫 내부 승진 기용을 통한 국정원장의 탄생도 바라보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국정원 내부가 잔치 분위기 일색인 것은 아니다. 김승규 국정원장의 퇴진을 못마땅해하고 김만복 국정원장 내정자의 발탁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냉소적 시선은 잠재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권력 교체기인 내년이 되면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권력의 변화에 어느 기관보다 민감한 반응을 보인 국정원이 또 한 번 요동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얽힌 실타래 못 풀고 낙마 김승규 국정원장
끝내 ‘참여’ 못한 ‘악연’
김승규 국정원장이 끝내 노무현 정권과의 악연을 뒤로하고 자리를 떠나게 됐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특별한 개인적 인연이 없었지만 참여정부 들어 법무장관과 국정원장 등 주요 요직을 섭렵했다. 하지만 후일 역사는 그를 ‘노 대통령의 사람’으로 기록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김 원장과 현 정부는 사실상 처음부터 ‘악연’으로 시작했다. 참여정부 첫 법무장관으로 강금실 변호사가 전격 임명되면서 ‘서열 파괴’ 등 검찰 개혁이 본격화되자 검찰 내부 조직이 강력히 반발하는 소위 ‘검란’(劍亂)이 휘몰아쳤다. 당시 부산고검장이던 김 원장은 이때 옷을 벗었다.
하지만 그가 2004년 7월 강 장관의 뒤를 이은 새 법무장관으로 발탁된 것은 드라마틱했다. 강성의 송광수 당시 검찰총장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였다. 서열을 중시하는 검찰 풍토에서 송 총장보다 선배 기수였고 호남 출신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무엇보다도 임명권자인 대통령에 대한 예의와 함께 조용하면서도 원칙을 중시하는 외유내강의 성향도 평가를 받았다.
실제 김 원장은 2003년 3월 사퇴 이후 ‘대통령과 검사와의 대화’ 등 검란 파동이 휘몰아칠 때에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에게 좀 더 예의를 갖추고 또박또박 할 말을 했어야 했다”고 후배 검사들의 토론 태도를 질타했고, 동기인 김각영 검찰총장의 사퇴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히 안 이상 물러나 주는 것이 임명권자에 대한 도리”라는 원칙론을 강조하기도 했다.
김 원장이 2005년 7월 국정원장에 발탁된 것도 그의 무난한 성품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러나 검찰과 국정원은 좀 달랐다. 친정이었던 검찰 조직과는 달리 국정원 조직은 내부 구조가 복잡했다. 뿌리 깊은 영남 인맥과 호남 인맥의 대립, 친여(親與) 성향과 구여(舊與) 성향의 대립, 진보 성향과 보수 성향의 대립, 내부 공채 출신과 외부 영입 인사의 갈등 등이 난마처럼 얽혀 있었다. 알려진 대로 김 원장은 호남 출신이면서도 보수 성향에 가까웠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김 원장은 호남 출신이지만 오히려 영남 출신 직원들이 더 지지한다더라”라고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김 원장을 힘들게 한 요인은 친여 진보 성향의 실세 인사들이 안팎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점이라는 게 중론이다. 특히 외교안보 분야에서 이종석 통일장관 등 진보 성향의 인사들이 독주하면서 국정원 내부 분위기도 원장의 색채가 잘 안 먹혀들었다는 얘기다. 실제 김 원장은 한 사석에서 “이종석 장관이 일은 열심히 하지만 나와 생각이 좀 달라서 어렵다”라며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국정원 김만복 1차장(원장 내정자)과 이상업 2차장이 이 장관이나 청와대와 가까운 인사여서 김 원장이 자칫 고립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서동만 전 기조실장도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실제 국정원 내부의 영남과 호남 인맥 갈등은 무척 악화된 상태다. 김 차장, 이 차장을 중심으로 하는 부산 라인과 김 원장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 라인의 갈등은 악화되고 있었다”라고 밝혔다.
김 원장과 김 내정자 간의 관계가 썩 매끄럽지 못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이번 간첩 사건 역시 김 내정자 등 친여 진보 성향의 반대를 김 원장이 정면 돌파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김 원장이 차기 원장의 내부 승진 발탁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는 것 또한 사실상 김 내정자를 반대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는 데 김 내정자가 적합지 않다는 뜻이다. 결국 김 내정자로 ‘차기’가 결정되자 김 원장은 “그는 단점이 있지만 장점이 많은 사람”이라는 덕담성 촌평으로 얼버무렸지만 굳이 단점이 있다는 것을 언급한 것을 보면 그의 발언의 방점이 장점보다는 오히려 단점에 찍혀 있는 것 같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 ‘관료형’이란 평가를 받는 김만복 국정원장 내정자는 조직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까. | ||
‘인연’ 타고 난 ‘성실맨’
김만복 국정원장 내정자가 1일 자신의 내정 사실이 알려지자 곧바로 김승규 원장실을 찾아가 “원장님이 시작하신 이번 간첩 수사는 확실히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제 명예를 걸고라도 돕겠다”고 언급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주변에서는 김 내정자의 성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내정자가 참여정부 들어 보인 성장속도는 사뭇 경이적이다. 그는 2급 단장에서 참여정부 출범 직후 1급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보관리실장에 발탁됐다. 그리고 차관급인 기조실장과 1차장을 거쳐 결국 국가정보기관의 최고 수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다. 현 정부에서 2급에서 장관급까지 이르는 데 불과 3년 8개월이 걸린 셈이다. 그의 이 같은 초고속 성장 배경은 무엇일까.
여당 정보위 소속의 한 의원은 “무엇보다 임명권자인 대통령께서 김 내정자의 업무 추진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라며 단적인 예로 지난 2003년 이라크 파병 논란 당시 김 내정자가 청와대에 올린 보고서를 들었다. 당시 이라크 파병 규모를 놓고 소위 ‘자주파’와 ‘(한미)동맹파’ 간에 대립이 격화됐고 노 대통령도 상당한 고민에 휩싸였다고 한다. 이때 김 내정자가 정부 합동조사단장으로서 이라크 현지를 점검하고 정확한 보고서를 올려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후문이다.
김 내정자가 이종석 통일장관과 가깝다는 점도 매번 거론되고 있다. 김 내정자는 2002년 세종연구소에서 최고위과정 연수를 받으면서 당시 연구위원이던 이 장관의 바로 맞은편 사무실에서 지내며 밀접한 교류를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김 내정자는 이 장관이 당시 집필 중이던 <현대북한의 이해>라는 책의 감수를 해주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현 정권 들어 김 내정자가 NSC 정보관리실장에 발탁되자 그 배경이 이종석 당시 NSC 사무차장이라는 얘기가 설득력있게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시각에 대해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일각에서 김 내정자를 ‘이종석 라인’이라고 하는데 김 내정자는 굉장히 불쾌해 한다”고 전했다.
일부에선 항상 조직의 생리에 순응하는 김 내정자 특유의 성실성을 ‘고속 성장’의 요인으로 꼽기도 한다. 김 내정자가 특히 현 정부 들어와서는 국정원의 과거사 정리와 국정원 개혁에도 적극성을 보이는 등 대통령의 통치 이념을 잘 따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김 내정자는 부산 기장 출신으로 부산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했다. 그는 당초 1974년 공채 11기로 국정원(당시 중앙정보부)에 입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국정원 출신의 한 인사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엄격히 말하면 김 내정자는 공채 11기와 같은 해에 들어온 것이지 정규과정 출신이 아닌 기본과정 출신”이라고 밝혔다.
김 내정자와 함께 일한 적도 있다고 밝힌 이 인사는 “개인적으로 김 내정자를 존경한다고 말할 순 없지만, 원만하고 합리적인 성품에 국내외와 대북 정보 및 기조실 등 국정원 내 4대 조직을 두루 섭렵한 정통 국정원맨이라는 점은 틀림없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김 내정자는 비교적 운도 따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DJ 정권 교체 때 영남 출신 인사들이 대부분 물을 먹는 가운데 김 내정자는 YS 정권 초기인 93년에 주미대사관에 정무참사관으로 파견 근무하는 등 해외 근무를 주로 한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됐다는 것. 그는 당시 4자회담(남한·북한·미국·중국)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고, 80년대부터 미국에 파견 근무를 자주 나가면서 국내 정치판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국제적 감각도 키우고 외국어도 능통하게 됐는데 이런 점이 도움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그는 DJ 정권 들어서도 부산 출신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2000년 남북장관급회담을 기획하고,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는 등 당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도 능력을 인정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예스맨’ 스타일이어서 자기 개성이 강하지 않아 오히려 국정원의 힘 키우기에는 걸림돌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또한 권력의 속성에 민감한 편으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는 스타일이어서 국정원의 올바른 개혁에는 적합지 않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김 원장이 김 내정자에 대해서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에 적합지 않다는 반대 의견을 표방한 것도 이런 성향 때문이라는 전언이다.
서동만 전 기조실장이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김 내정자는 70년대 중정 요원 시절 서울대 파견 근무 때 학생운동을 탄압한 인물”이라고 밝힌 점도 인사 청문회 때 논란의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국정원장 후보로 거론된 세 명의 인사가 모두 부산 출신 인사였다는 점에서 “코드 인사라는 여론의 소나기를 피해가기 위한 방편으로 국정원 내부 승진이라는 명분을 활용하기 위해 윤광웅 국방장관이나 이종백 서울고검장 대신 불가피하게 김 내정자를 선택한 측면이 있을 것”이라며 그의 능력을 평가 절하하는 분위기도 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김 내정자의 임명은 일단 내부에서 대체적으로 환영받는 분위기임에 틀림없으며 원내의 분위기 쇄신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전에는 인사 발표가 있으면 조직 내부가 술렁술렁했지만 지금은 무척 차분한 편”이라고 전했다.
중간 간부 시절엔 원장과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에 알아서 맞추는 관료형이었던 그가 실제 수장이 되어서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국정원을 이끌어갈지 사뭇 궁금해진다. 특히 사상 첫 내부 승진 기용이라는 점에서 그의 성공 여부가 향후 국정원장 인선의 선례를 남길 수도 있어 국정원 안팎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