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급’ 때보다 ‘평범’한 지금이 더 좋아요
▲ 지난 14일 ‘해외입양인 고국 방문을 위한 사랑의 바자’ 행사를 가진 박찬호를 만났다. 결혼 후 한결 여유로운 모습의 박찬호는 평범한 지금 상황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올 시즌을 끝으로 메이저리그 두 번째 FA(자유계약선수)가 된 박찬호는 지난 10월 29일 입국한 인천공항에서 스스로를 ‘평범한 선수’라고 평가했다. 5년 전 LA 다저스에서 텍사스 레인저스로 팀을 옮기며 총 연봉 6500만 달러의 초특급 메이저리거로 대우 받던 시절의 자신과 5년이 지난 지금의 모습은 분명 많은 차이가 있다는 걸 인정한 셈이다.
기자들 사이에서 참으로 다가가기 어려운 선수로 인식됐던(박찬호도 언론에 대해선 할 말이 많은 선수다) 박찬호와 지난 14일 숙소인 롯데호텔에서 만나 13년간의 메이저리그 생활을 짧고 깊게 정리해봤다. 한마디로 ‘선수 박찬호’보다는 ‘자연인 박찬호’를 만난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자꾸 ‘박찬호가 달라졌다’는 말을 하는데 뭐가 가장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나.
▲이번에 한국 들어와서 그런 말을 참 많이 들었다. 나는 비슷한 것 같은데 모두들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달라지긴 달라졌나 보다. 좋은 변화로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 앞으로 더 달라지려고 한다(웃음).
―야구 꿈나무들을 위한 장학금 전달이나 박찬호 어린이야구대회, 해외 입양아 돕기 자선 바자회 등 유독 어린이와 관련된 행사를 많이 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
▲내가 야구를 시작할 때는 선동열, 이만수, 박철순 선배들을 보면서 야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어린 야구선수들에게 나를 통해 꿈을 키우게 하기보단 그들이 마음 놓고 뛸 수 있는 쾌적한 야구장이나 야구대회 등을 유치해서 직접 뛰고 체험하면서 꿈을 갖게 해주고 싶다(지금 프로야구에서 활동 중인 선수들 가운데도 ‘박찬호 장학금’의 혜택을 받은 이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메이저리그의 김병현과 삼성 라이온즈의 배영수가 박찬호로부터 직접 장학금을 전달받았던 꿈나무들이었다).
입양아 문제도 그렇다. LA 다저스 시절 만났던 입양아들에 대한 기억과 아픔들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쪽에 더 큰 관심을 갖게 했다. 내가 처음 다저스에 입단했을 때만 해도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나라인지조차 모르는 미국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출신의 야구선수가 다저스에서 뛰고 있으니까 해외 입양아들, 그리고 그들의 양부모들은 내가 얼마나 신기하고 대견했겠나. 나를 통해서 입양아들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한국말을 배우게 됐다는 편지들을 많이 받았다. 그들이 나에게 메시지를 준 것이다. 해외 입양아들을 위해 뭔가를 해달라는 메시지를.
―결혼을 한 데다 딸이 생겼다. ‘아이 아빠 박찬호’는 쉽게 상상이 안 가는데.
▲나도 가끔씩 딸을 보면서 내 모습이 어색할 때가 있다. 본능적인 사랑이란 말이 이해되는지? 날 닮은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묘한 기분을 준다. 결혼 전에는 혼자다보니 친구들을 만나고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많았는데 결혼 후에는 자연스럽게 (야구와 가정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결혼 전의 박찬호 하면 ‘참으로 결혼하기 힘든 남자’였다. 너무나 대단한 스타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쉽게 다가서기도, 또 여자를 쉽게 만나기도 어려웠을 것 같다. 배우자를 선택하고 결혼을 결정하기까지 어떤 과정들이 있었나.
▲항상 궁금했다. 내 배우자가 누가 될지, 그리고 어떻게 생겼을지…. 그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다. 어쩜 오랫동안 결혼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내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다저스에서 한창 잘나가다가 텍사스로 옮긴 후 마음의 갈등과 괴로움, 부상 등으로 시달리면서 성숙해졌고 그런 상황에서 박찬호란 남자를 바라보게 됐다. 어떤 사람을 선택하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게 됐던 거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보이더라. 그래서 기회가 될 때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심지어 내 이상형이 아닌데도 고마운 마음으로 만났고 상대방이 나에 대해 날카로운 시선을 가져도 그 또한 감사했다.
그 전에는 너무나 잘나가고 인기가 많으니까 자꾸 날 감추려 했다. 내가 아닌 것들에 의해 포장되는 바람에 상대방도 나에 대해 오해가 생겼고 정확한 시선으로 나를 볼 수 없었을 거다. 한마디로 자연스런 교류가 힘들었던 거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착한 사람을 보는 눈이 생겼다. 이전에는 처음엔 괜찮았다가 다음 날 실망하는 일들이 반복됐다. 그런데 아내를 만나면서부턴 실망이란 걸 몰랐다. 오히려 하루하루 점점 더 좋아졌다.
―‘호사다마’라고 결혼 후 안정된 시즌을 보내다가 지난 8월경 장출혈 수술을 받는 등 어려움이 있었다. 선수 생활에 대한 불안감 등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자신을 괴롭혔을 것 같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병이었다. 공을 던지다 팔이 아프거나 허리가 아픈 건 늘 있어 왔고 있을 수 있는 병이지 않나. 그런데 갑자기 출혈이 생기고 몸이 약해지고 어지러우니까 혹시 큰 병에 걸린 거 아닌가 싶다가 나중엔 죽음까지도 생각하게 되더라. 병원에선 수술을 받고 시즌을 접어야 한다고 하는데 정상적으로 회복되리란 보장이 없는 거 아닌가. 수술을 받으니까 움직임도 불편하고 근력도 없어지더라. 다시 야구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때 아내와 갓 태어난 아이 얼굴을 보면서 마음을 추슬렀다. 통증이 있어도 걷기 운동을 했고 팀에선 꼼짝도 못하게 해 숨어서 공도 던져 보고 그랬다. 다행히 시즌 끝나기 전에 등판도 되고 또 포스트시즌 무대에 올라가는 행운도 누리게 됐다. 돌이켜보면 날 다시 태어나게 했던 부상이었다.
―지난번 귀국 시 공항에서 자신의 메이저리그 상품 가치를 ‘평범함’으로 결론 내렸다. 그렇게 말한 이유가 뭔가.
▲현 메이저리그 시장에서의 내 가치를 냉정하게 평가한 것이다. 현재 최고의 상품으로 평가받는 데릭 지터나 마쓰자카 같은 선수들이 5년 전의 내 모습일 거다. 상품으로 봤을 때 박찬호는 최상품이 아닌 중간 정도의 평범한 선수라는 얘기였다. 5년 전의 박찬호와 지금의 박찬호는 분명 다른 가치를 갖는 선수다. 그렇다면 그에 맞는 계약을 해야 되는 것이고. 적절한 대우를 해주는 팀으로 간다면 부담 없이 편하게 야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5년 전 6500만 달러의 FA 계약을 맺은 후 부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국내외 언론에선 ‘먹튀’ 운운하며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6500만 달러란 몸값이 적절한 대우였다고 생각하나.
―얼마 전 아버지가 납치될 뻔했던 사건이 벌어졌다. 많이 놀라고 당황했을 텐데 당시 어떤 심정이었는지.
▲나보단 어머니가 더 놀라셨다. 아버진 마치 다시 태어나신 기분이라고 말씀하시더라. 나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게 너무나 죄송스러웠다. 물론 범행이 사전에 발각돼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론 검찰 쪽에서 나와 아버지의 실명을 공개하고 노출시킨 부분은 많이 아쉬웠다. 끝까지 신분 보호를 해줘야 하는데 확대시켜 버리니까 다른 쪽으로 피곤해지고 괴로워지더라.
―최근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야구의 마무리는 한국에서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떤 의미였나.
▲한국 프로야구는 내 꿈을 키워준 무대다. 힘닿는 데까진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마지막 1, 2년 정도는 한국에 들어와 유니폼을 입고 선수로 뛰고 싶다는 얘기였다. 마음 같아선 대표팀 유니폼을 마지막으로 입고 싶은데 그건 이미 WBC를 통해 이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 프로팀 유니폼으로 내 야구 인생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다. 팬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한국 프로야구에 보답도 하고 싶고.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일들이다.
―마지막 질문이다(박찬호가 ‘정말 마지막이 맞느냐’고 물어서 순간 폭소가 터졌다). 94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지금까지 야구 인생의 희로애락이 있었다. 13년간의 미국 생활을 ‘맑음과 흐림’으로 나눈다면 기울기가 어느 쪽으로 더 기울어지나.
▲먼저 내 말을 잘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국 생활에서 맑았던 인생은 지난 몇 년밖에 안 된다. 다저스에 있을 때는 뭣 모르고 자꾸 도전하는 정열적인 마음으로 바쁘게 보냈고 여유가 없었다.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고 부담의 연속이었다. 텍사스에선 더 많은 부담과 긴장들 속에서 부상까지 당해 도저히 컨트롤이 안 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춰줘서 오히려 고마웠다. 계속 위로만 올라갔다면 내가 감당하기 벅차했을 거다. 기자도 알다시피 난 시골 출신이지 않나(웃음). 너무 많고 화려한 건 부담스럽다. 내가 어디까지 왔고 언제 떨어질 수 있는지를 깨달은 지금이 훨씬 더 편하고 맑은 상태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