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자는 없어요 모두가 선생님이죠”
▲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보고 또 봐도 ‘이쁘다’란 생각이 절로 드는 ‘피겨 요정’이다. 손바닥으로 가려질 정도의 작은 얼굴에 가늘고 긴 체형, 그리고 샴푸 광고 모델을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은 긴 생머리 스타일이 ‘김연아 신드롬’의 하드웨어라면, 부상 투혼, 오기와 끈기, 강한 경쟁 심리, 극기와 인내 등으로 대변되는 그의 피겨스케이팅 스토리는 ‘김연아 신드롬’의 소프트웨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피겨 역사상 110년 만에 처음으로 세계 피겨 시니어 무대에서 정상을 차지했다는 다소 부담스런 타이틀을 안고 있는 김연아는 이번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2006년 한국 스포츠계 최고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지난 11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시니어 그랑프리 4차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후 <일요신문>과 인터뷰를 가졌던 김연아는 호텔 앞에서 기자를 보자마자 그때 신문의 표지에 난 자신의 기사 제목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어휴, 기자님! 제가 무슨 ‘쌩얼(화장 안 한 얼굴)’이 더 예쁘다는 거예요? 제목보고 넘 민망했어요.”
<일요신문> 759호에 김연아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그때 표지의 제목이 이랬다. ‘난 쌩얼이 더 예뻐요’^^. 물론 김연아와 인터뷰를 하면서 나온 멘트를 표지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좀 낯부끄러운 제목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사진보다는 실물이, 화장한 얼굴보다는 ‘쌩얼’이 더 예쁜 걸 어떡하랴.
귀국할 때마다 겪는 과정들이지만 이번에는 연말까지 겹쳐 여러 곳에서 주겠다는 상들도 많고 도움과 지원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김연아로선 ‘행복한 비명’을 지를 만큼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혜택과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지만 16세 소녀의 마음 속에서는 이러한 스포트라이트가 여전히 ‘부담’이란 단어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12월 22일은 생애 처음으로 CF 촬영 일정이 잡혀 있다. 광고 촬영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힘들 것 같아요. 물론 링크장에서 점프하고 도는 것만 하면 되지만 CF 촬영이 금세 끝나는 게 아니라면서요?”라며 잔뜩 걱정 어린 표정을 담아낸다.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김연아가 잠시 발레 포즈를 취했다. 그래서 발레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있냐고 물었다. “발레요? 몇 번 해보긴 했는데 넘 재미없어서 안 해요. 사람들은 피겨를 하려면 발레도 기본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구요. 발레와 피겨는 전혀 달라요. 동작 자체가 다른 걸요?”
▲ 지난 21일 금메달을 걸고 입국하는 김연아. 가운데는 박미희 씨, 왼쪽은 박분선 코치. | ||
그래서 좀 색다르게 질문한다는 게 이런 내용이었다. “연아 양, 아사다 마오랑 연아 중에서 누가 더 예쁜 것 같아요?” 질문을 듣자마자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기던 김연아는 “어휴 그런 질문이 어디있어요? 본인한테 너랑 다른 사람 중에서 누가 더 예쁘다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을 하겠어요. 그런 질문은 별로예요”라며 바로 화제를 돌려 버린다. 기자가 보기 좋게 한방 먹었다.
“저한테 경쟁자는 없어요. 모두가 배울 게 많은 훌륭한 선수들이고 대회가 열릴 때마다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사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배들과 어깨를 겨루며 대회에 참가할 때는 같이 뛰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시니어 그랑프리에서 우승까지 차지했지만 김연아는 여전히 자신보다 한 수, 또는 두 수 정도 높은 선배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실력이 그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배울 게 더 많다는 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많은 분들이 아사다 마오와 자주 비교하고 거론하시는데 마오는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트리플악셀(공중에서 세 바퀴 반 돌기)을 하고 전 트리플악셀을 배우기보단 자신있는 트리플 점프를 하고 있는 게 가장 큰 차이일 거예요. 언젠가는 저도 트리플악셀을 배우겠지만 지금은 못하는 것보다 잘하는 걸 더욱 업그레이드시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자신감을 잃으면 안 되잖아요.”
러시아 그랑프리 대회에 가기 전 일본의 스케이트화 장인을 찾아가 자신의 고질적인 문제를 상담하고 새롭게 부츠를 맞추고 돌아온 김연아가 ‘세상에서 하나뿐인’ 그 부츠를 언제쯤 신어볼 수 있을까.
“이번 시즌까지는 기존의 부츠를 신을 예정이에요. 새 부츠를 신으면 또 다시 적응하고 길들여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오는 3월 세계선수권대회 때까진 그냥 이전 부츠를 신을 겁니다.”
김연아는 이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잘 맞지 않아 통증을 가중시키는 스케이트화 때문에 연습을 꾸준히 할 수 없었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수많은 스케이트화를 신었지만 자신의 발에 딱 맞는 부츠를 찾지를 못했다고도 말했다. 부츠가 잘 맞을 때는 연습도 잘 되고 대회 때 훨씬 좋은 프로그램을 선사하지만 부츠가 말썽을 부릴 때는 모든 게 엉망이 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김연아와 얘기하고 있는데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던 어머니 박미희 씨가 통화를 끝내고 다가왔다. 이번 대회 우승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 그 의미와 소감을 물었더니 이렇게 마음을 열어 보인다.
“이번 우승으로 그동안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했어요. 이젠 뭔가 보일 것 같다는 기대와 희망도 생기구요. 그러나 너무 빠른 시일 내에 여기까지 올라와서 그런지 질투와 시기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잘 해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렵네요.”
대한빙상경기연맹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과 여러 기업체들로부터 스폰서 제의를 받는 김연아 입장에선 너무나 행복한 일들의 연속이지만 그걸 바라보는 다른 빙상인이나 일부 피겨스케이트 선수들한테는 부러움 반, 시기 반의 심정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머니 박 씨는 바로 그런 점을 염려하고 걱정했다. 김연아의 오늘을 있게 만들었고 앞으로도 김연아에게 가장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어머니이지만 박 씨는 어머니, 학부모라는 굴레 속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답답한 현실에 표현하기 어려운 힘든 부분을 살짝 내비추었다.
김연아와 어머니가 택시를 타고 떠난 후 요즘 김연아와 함께 주목받고 있는 박분선 코치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박 코치는 국가대표로 10년간 활동했던 한국의 대표적인 피겨 스케이트 선수 출신이다. 지난 5월 연맹과 어머니 박 씨로부터 코치직을 제의받고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어렵게 수락했다는 그는 김연아의 시니어 데뷔 무대부터 함께 호흡하면서 김연아의 예술적인 면을 업그레이드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 박분선 코치 . | ||
김연아의 어머니가 기술적인 면을 담당한다면 박 코치는 예술적인 면과 총체적인 관리를 맡고 있다. 박 코치는 김연아와 손을 잡기로 한 이후 김연아와 관련된 비디오를 수십 개나 모니터하면서 김연아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눈에 띈 부분은 표정 연기. 다른 연기에 비해 표정이 너무 어둡고 딱딱해서 곡의 흐름에 맞게 마치 연기자처럼 표정을 연출해낼 수 있도록 연습 또 연습을 반복했다는 것이다.
“캐나다에서 3개월간 전지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부터 저랑 연아가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갔었어요. 그런데 세 번 정도의 만남을 가진 이후 갑자기 연아 어머님께서 은퇴 얘기를 꺼내시더라구요. 현실적으로 너무 강한 압박과 어려움이 많아서 도저히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말씀이셨어요. 처음엔 많이 놀랐었는데 나중에 몇 차례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냥 운명에 맡겨야 했죠.”
이번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에서 박 코치는 출전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서 잘 하면 3위 안에 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예상했단다. 미키 안도와 아사다 마오만 뛰어 넘으면 1위도 넘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연아의 컨디션이 영 아니었어요. 컨디션도 안 좋고 허리가 아픈 데다 진통제 없인 버티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연습할 때의 미키 안도와 마오는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이더라구요. 마지막에 펼친 프리스케이팅에서 연아가 100%의 실력을 발휘한 건 아니었어요. 우승 후보자들의 실수가 연아에게 큰 도움을 준 것이죠.”
박 코치는 ‘피겨요정’에서 ‘피겨여왕’으로 초고속 엘리베이터에 올라 탄 김연아와의 인연을 내년 3월까지로 잡고 있다. 그 이후에는 각자의 길을 가는 게 김연아의 피겨 인생을 위해 훨씬 더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선수보다도 연아랑 궁합이 잘 맞았어요. 볼수록 정이 가는 제자이죠. 그러나 잘될 때 손을 놔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론 연아가 단계를 밟아가면서 올라가길 바랐어요. 이번 대회에서도 동메달 정도면 충분했거든요. 연아가 복도 많고 운이 좋은가 봐요. 솔직히 말해 저도 스케이트 선수였기 때문에 연아의 지금 모습이 너무 너무 부러워요. 피겨 스케이트로 세계에서 탑 클래스에 든다는 건 정말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거든요. ‘피겨여왕’을 가까이서 가르쳤다는 사실에만 만족할 겁니다.”
박 코치는 이번 대회에서 허리 통증으로 너무나 힘들어 하는 김연아에게 기자들, 특히 일본 기자들 앞에서는 얼굴을 찡그리거나 우는 표정을 짓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연아야! 넌 공주고 여왕이야. 기죽지 말고 턱 들고 다녀 알았지?”하면서 잔뜩 의기소침해 있는 김연아의 기를 살리기 위해 비행기를 잔뜩 띄었다 내렸다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박 코치는 김연아에게 진심어린 충고도 잊지 않았다.
“어느 선수나 다 부상의 위험과 부상에 처해 있어요. 연아 혼자서만 발목과 무릎이 아프거나 허리가 아픈 게 아니거든요. 따라서 부상 때문이라든지, 체력 부족 때문이라는 이유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아쉬울 게 없잖아요. 최고의 조건과 대우도 받고 있는데요 뭘. 연아 입에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좋은 결과를 냈다’는 얘기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