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풍에 ‘노’ 할 줄 아는 ‘검찰의 수호자’
▲ 지난 17일 임채진 검찰총장 내정자가 서울고검으로 첫 출근하고 있다. 이곳에서 임 내정자는 검찰총장 임명에 대한 청문회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연합뉴스 | ||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0월 15일 “검찰총장 임명은 차기 정권으로 넘기라”는 일부 정치권의 반발을 뒤로하고 사시 19기인 임채진 법무연수원 원장을 오는 11월 23일로 임기가 만료되는 정상명 검찰총장의 후임으로 내정했다.
한 정권의 끝자락과 또 다른 정권의 앞자락을 모두 쥐고 갈 수밖에 없는 총장 후보이기 때문일까. 대선을 두 달밖에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총장에 내정된 임 내정자를 두고 일각에서는 ‘반쪽 자리 검찰총장’이라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검찰 안팎에서는 임 내정자가 업무 능력이 뛰어나고 소신이 뚜렷하다는 점을 들어 대선이라는 변수가 있지만 2년 임기를 무난하게 채우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과연 임 내정자가 오는 12월 치러지는 대선에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지켜내면서 총장으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마련할 수 있을까. 아마도 임 내정자의 성향과 언행을 살펴보면 대답의 단초 정도는 찾아낼 수 있을 듯하다.
임 내정자는 지난해 일심회 간첩단 사건 수사 당시 청와대와 갈등을 빚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신과 원칙주의자로 알려져왔다. 정치적으로는 무색무취에 가깝다는 평가도 들린다. 참여정부 기간 동안 법무부 검찰국장과 서울지검장 등 요직을 거치면서 나타난 그의 ‘색깔’은 과연 어떠했는지 한번 들여다보자.
#소신 굽히지 않는 강골
‘우직하다’, ‘강골이다’, ‘정의감이 남다르다’, ‘원칙론자다’, ‘검사답다’…. 이러한 말로 압축되는 임 내정자에 대한 평은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다.
검찰 독립과 수사를 최우선으로 하되 검찰권 남용을 경계하고, 정치성이 없다는 임 내정자의 이미지는 평검사 시절부터 쌓여온 것이라는 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다. 특히 검사로서 검찰 조직에 맞는 소신과 원칙을 중요시하는 임 내정자의 모습은 참여정부 들어 더욱 견고해졌다는 평가다.
법무부 검찰국 검사와 검찰 1·2과장 등을 지내 행정과 기획 전문가로도 꼽히는 임 내정자는 지난 2004년 5월 법무부 검찰국장에 임명된 이후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로 대변되는 형사소송법 개정 문제와 중수부 폐지, 검찰·사법 개혁 논란 등에서 ‘외풍’에 맞서는 입장에 섰다. 이 때문에 검찰 내에서만큼은 명실상부한 ‘검찰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러한 그의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2년여 전의 한 사건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가 한창 이슈로 부각되던 지난 2005년 6월 그가 검찰국장 자격으로 국회 법사위 소속 의원들에게 ‘일제시대 경찰은 식민지 수탈의 도구였다’는 내용이 담긴 자료를 보냈던 것.
이로 인해 경찰과 첨예한 갈등을 빚었음에도 임 내정자는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 검찰 안팎에서 강골 이미지를 뿌리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임 내정자는 특유의 강한 소신으로 인해 참여정부 내내 정권과의 불화설에 시달려야 했다. 중수부 폐지 논란이 불거질 때는 강금실 법무부 장관 앞에서 소신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
천정배 전 법무장관이 ‘강정구 교수 사건’과 관련해 수사지휘권(불구속 수사)을 발동시켰을 당시에는 임 내정자의 소신 발언의 수위가 얼마나 높았던지 ‘조만간 검찰국장직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관측이 여러 채널을 통해 나돌았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재와 변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검찰국장을 연임하기까지는 일선 검사들의 지지 및 출입 기자들의 높은 호감도 등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례로 지난해 1월 천정배 전 법무장관이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욕설을 섞어가며 보수 언론을 비난했을 당시 그가 천 전 장관 뒤로 물러서 눈을 감고 정치인 출신 장관의 잇따른 소신 발언과 검찰 개혁의 일성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일선 검사들과 기자들이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임 내정자는 서울지검장을 맡았던 당시에도 검찰 내부에 파장을 일으킨 평검사의 방패막이가 돼주는 모습을 보여 검찰 내부 관계자들로부터 상당한 호감을 산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금태섭 전 서울지검 검사가 <한겨레>에 ‘수사 잘 받는 법’이라는 글을 기고, 정상명 검찰총장이 대노해 사표를 받으려 하자 임 내정자가 정 총장을 설득해 사표가 아닌 총무부로 배치하는 선에서 매듭을 지어주었던 것.
여기에 더해 임 내정자는 금 전 검사에게 일거리를 주지 말라던 정 전 총장의 지시에도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후배를 끔찍하게 챙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 전 검사의 행동에 대해서는 검찰 내부의 평가가 엇갈렸지만 평검사를 대하는 임 내정자의 행동에 대해서는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이 주를 이뤘다는 후문이다.
#직접 일하는 검사장
지난해 법무부 검찰국장에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자리를 옮겼던 임 내정자는 말 그대로 ‘일하는 지검장’으로 불렸다.
서울대 황우석 교수 논문 조작 사건을 비롯해 법조브로커 윤상림·김홍수 사건, 바다이야기 게임 비리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의 처리를 위해 특별수사팀을 꾸리도록 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론 각 부마다 느닷없이 미제 사건을 줄이라는 엄포를 놓고 이를 직접 관리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늦은 정의는 소용없다”며 고소·고발된 지 3개월이 지나도록 처리되지 않은 사건들에 대한 처리를 종용, 결국 1년이 지나면서 미제사건 수가 절반 수준으로 급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소·고발인 사이에 감정적인 부분이 얽혀 있는 경우 등 이른바 시간이 충분히 필요한 사건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미제 사건을 줄이는 과정에서 검찰 수사에 ‘신속성’이라는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대신 임 내정자는 미제 사건 처리를 위해 1년 동안 고생했던 검사들에 대해서는 상을 아끼지 않았다. 임 내정자는 준 ‘당근’은 인사상의 이익. 임 내정자가 검사들이 서울중앙지검에 근무하는 동안 한 번쯤은 특수부나 공안부를 거칠 수 있게 하는 한편 특수부와 공안부에 근무한 검사들이 형사부에 배치될 수 있도록 하는 ‘검사 순환 근무제’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임 내정자는 순환 근무제를 도입하면서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에서 일해 본 검사는 6개월을 했더라도 특수부 검사라 할 수 있다”고 누누이 강조해 특수부에서 형사부로 이동한 검사들이 불만을 갖지 않게끔 세심하게 배려했다는 후문. 임 내정자가 이 제도를 도입한 이후 각 지검별로 순차적으로 순환근무제가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검사들의 직무만족도가 낮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마련된 임 내정자의 ‘고육지책’ 덕에 검찰 조직이 특수부나 공안부 등 인지 수사를 담당할 수 있는 검사의 수를 확충할 해법 중 하나를 찾게 된 셈. 또한 검사 개인으로서는 능력과 경험의 확대라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임 내정자의 ‘절충안’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두 모습의 검사
서울지검장 시절 임 내정자가 사건을 다루던 방식과 행태에선 대조적인 두 가지 스타일이 묻어난다. 허허실실 전략으로 무덤덤하게 파장을 최소화하고 결론을 늦게 내는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적극적으로 수사 역량을 집중한 사건도 있었다. 몇몇 사건의 처리 과정이나 결과 등에 대해서는 검찰 안팎에서 반응이 엇갈려 이번 인사청문회에서도 집중적인 질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황우석 교수 사건과 법조브로커 윤상림 사건과 같은 대형 사건의 경우 각각 10명 이상씩 검사를 투입하는 총력전을 펼쳤다. 하지만 국민적인 관심이 집중된 민감한 사건이라는 부담 때문인지 당초 봄에 끝날 것 같던 수사는 여름을 넘겨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쯤에야 마무리됐다.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황제골프’ 사건과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의 ‘황제테니스’ 사건들 역시 임 내정자 선에서 공무원 고소·고발을 처리하는 형사 1부에 배당해 ‘무덤덤하게’ 처리됐다. 대선 후보들이 연루된 사건을 형사부에 맡긴 탓에 애초에 김이 빠져버렸고 한참 뒤 이 전 총리와 이 후보는 조용히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권력이 개입된 사건에 대해 형식적인 예우와 함께 결론 내리는 것을 뒤로 미루는 임 내정자의 태도는 에버랜드 사건 처리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서울지검장에 취임하면서부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소환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임 내정자는 결국 이 회장을 소환하지 않은 채 임기를 마쳤다. 대신 임 내정자는 법원에 항소하는 방향을 선택해 결국 허태학·박노빈 에버랜드 전·현 대표가 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간의 수사 진행 과정을 지켜보면 임 내정자는 검찰에 대한 세간의 질책이 쏟아지더라도 검찰 내부의 일에 대해서는 ‘노코멘트’하는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수사의 속도를 제어해야 하는 사건의 경우 입이 더욱 무거워진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에버랜드 사건이 쟁점이 되자 임 내정자는 “법과 원칙에 따라 진행할 것”이라는 말로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의 질의를 비껴갔다. 일심회 간첩단 사건 때도 ‘청와대 386’과 갈등설이 불거졌지만 언론에 이와 관련한 언급을 자제하는 방법으로 파장을 잠재웠다.
최연희 의원이 여기자를 성추행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을당시엔 일부러 심야조사를 벌여 언론으로부터 최 의원을 보호했다. 임 내정자는 이후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관련 얘기를 꺼내며 언론이 피의자를 촬영할 권리가 정당한지 묻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아버지가 소환되는 것을 보고 상처받은 자녀들의 이야기까지 꺼낸 것으로 전해진다.
수사에 관한 한 얼마나 입이 무거웠던지 임 내정자가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있던 시절, 검찰이 참고인 소환 일정 등을 미리 고지하지 않아 출입기자단과 마찰을 빚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정도다.
중요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의 속도를 지연시키며 수사 상황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방법으로 확대해석을 막는 임 내정자이지만 파급 효과가 큰 사건, 특히 특별검사제가 도입될 가능성이 높은 사건은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는 면모를 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바다이야기 게임비리 사건. 당시 임 내정자는 2개 부서 검사를 투입하며 사건 수사를 독려했다. 그리고는 수사팀에 연일 “특검까지 가지 않도록 샅샅이 뒤지라”는 엄명까지 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늦은 정의는 소용없다”며 미제 사건의 해결을 종용하던 그와 민감한 사건을 ‘강태공’처럼 에둘러 처리하던 그. 이 두 가지 대조적인 모습 가운데 과연 어떤 게 ‘검사 임채진’의 본색에 가까울까. 한 검찰 관계자는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여러 색으로 보이듯 임 내정자의 성향 또한 보는 각도에 따라 달리 비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법조계 일각에선 임 내정자를 두고 자칫 ‘3개월짜리 검찰총장’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여전히 나오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직후 4개월 만에 물러난 김각영 전 총장 등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사청문회를 앞둔 임 내정자의 입은 최근 다시 무거워졌다. 참여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갖가지 ‘외풍’에 저항하며 버텨온 뚝심의 임 내정자지만 그의 무거운 입 때문에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예측 또한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정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