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내려갈 뿐 ‘퇴장’은 없다
▲ 지난 5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이재오 최고위원이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최고위원직에서도 물러났으나 박근혜 전 대표 측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 ||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선언 이후 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30%대로 지지율이 내려앉았다. 박근혜 전 대표는 이명박 후보의 러브콜에 냉담한 반응이다.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선언으로 박 전 대표는 ‘꼭 붙들어야 할 동아줄’이나 다름없는 데도 말이다. 이 전 최고위원의 사퇴로도 박 전 대표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실패하자 이명박 후보는 8일 직접 박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요청하는 다급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 중심에서 이재오 전 최고위원은 외롭다. 이 전 최고위원의 퇴진 여부가 한나라당 화합의 조건으로 거론된 것에는 한나라당 내 권력다툼의 양상이 묻어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 전 최고위원의 퇴진으로 한나라당 내분이 봉합될지 아직은 미지수다. 한나라당 내 일각에서는 이 전 최고위원이 표면적으로는 퇴진했으나 이 후보의 최측근인 만큼 ‘뒷방’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 전 최고위원의 사퇴 및 그간의 행보를 둘러싼 한나라당 내의 헤게모니 다툼을 들여다봤다.
발단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한 마디의 발언이었다.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지난달 28일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대표 측을 겨냥해 “이명박 후보를 대표선수로 인정하지 않는 당내 세력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 ‘화근’이 됐다. 이 발언 이후 한나라당 내 이 후보 측과 박 전 대표 측은 오랜 앙숙이 다시 만난 듯 ‘치고 받기’를 이어갔다. 또 강재섭 대표가 나서 이 전 최고위원에게 ‘말을 조심하라’고 조심시켰지만 이 전 최고위원은 당 지도부에 대한 불만도 드러냈다. 박 전 대표 측이 당 화합을 위해 협력하지 않는데 당 지도부는 가만히 ‘좌시’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다음날 열린 의원총회에서는 “정말로 가만 안둘 테야, 두고봐라” “이명박 (후보로) 만들었으면 이명박 당선시켜야 될 거 아냐” 등의 고성이 오가는 소동이 벌어졌다. 강재섭 대표가 의총에서 “말조심 해야 한다. 오늘 아침 이상한 기사도 났는데, 단합을 저해하는 작은 언사라도 해선 안 된다”고 말하면서 고성이 이어진 것이다.
이 전 최고위원의 발언에 박 전 대표 측도 발끈했다. 박 전 대표 측 유승민 의원은 30일 “이 전 최고위원이야말로 당 화합의 걸림돌이다”며 사퇴를 요구했고 유 의원과 최경환 이혜훈 엄호성 의원 등도 국회에서 만나 이 전 최고위원의 발언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이런 가운데 박 전 대표도 여기에 힘을 실었다. 박 전 대표는 이재오 최고위원을 향해 “오만의 극치”라고 결정적인 한마디를 날린 것이다. 위기 때마다 조용한 카리스마를 과시해오던 박 전 대표가 좀처럼 쓰지 않는 ‘격한’ 감정 표현을 드러내자 한나라당 내 이명박 vs 박근혜 대결구도는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이 전 최고위원의 발언이 점점 갈등을 증폭시키자 결국 이 전 최고위원은 지난 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사과를 했다. 이 전 최고위원은 “박 전 대표가 오만의 극치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그 말씀을 처음에는 잘 몰랐다”며 “주변에서 이야기를 듣고 후보가 저를 심하게 질책하시고 그 말씀을 가만 들어보니까 정말로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사과를 했으나 박 전 대표는 이를 ‘사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 전 대표는 기자들의 질문에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사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두 번이나 연이어 내놓으며 이 전 최고위원에 대한 거리감을 좁히지 않았다. 이 전 최고위원이 본회의장에서 박 전 대표에게 직접 다가가 악수를 청하고 허리를 숙였을 때도 박 전 대표는 이에 화답하지 않은 채 짧은 목례만을 했을 뿐이다.
사실 경선 이후 한나라당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아슬아슬했다. 이 후보의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계속했지만 오히려 이 후보의 대세가 당 화합에는 걸림돌이 된 측면도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벌써 대통령이 된 듯 오만방자하다”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였다. 박 전 대표 측 김무성 의원을 최고위원직에 임명했지만 이에 대해서 이 후보 캠프 내 일각에서도 “너무 늦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을 만큼 ‘자신만만했던’ 이 후보가 ‘박근혜 끌어안기’에는 소홀했다는 평가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선언까지 나왔다. 그리고 박 전 대표는 이 후보의 화해 제스처에 일체 반응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지난 8일 이 전 최고위원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한 지 10일 만에 2선으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 전 최고위원의 퇴진 결정을 두고 이 후보 역시 장고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후보는 앞서 지난 2일 밤에 이 전 최고위원을 직접 불러 “당이 화합을 해야 할 때인데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야 되겠느냐”고 꾸짖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이 전 최고위원의 표현대로라면 “이번 ‘오만의 극치’ 파동으로 인해 (이 후보로부터) 눈물이 쏙 나도록 야단을 맞았다”고도 소개했다.
▲ 이재오 최고위원이 사퇴한 지난 8일 이명박 후보가 안국동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위). 박근혜 전 대표는 이 전 최고위원의 발언에 대해 “오만의 극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 ||
한때 이 후보 측에서는 박 전 대표 측이 ‘너무한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더구나 이방호 사무총장의 사퇴도 요구하자 ‘이대로 가면 이 후보 주위에 아무도 안 남아날 것’이라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이런 박 전 대표 측의 강경 자세는 이 전 총재의 출마 선언과 맞물리며 결국 이 전 최고위원을 사퇴로까지 몰고 갔다.
한나라당 경선 이후 이 전 최고위원의 2선 퇴진론이 불거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경선이 끝난 직후 이 전 최고위원은 “박근혜 측 사람들이 먼저 반성해야 한다”는 말을 내뱉어 박 전 대표 측이 강력하게 반발한 바 있다. 당시에도 한나라당 내에 ‘이재오 2선 퇴진론’이 대두됐으나 이 후보의 감싸기 덕분에 ‘고비’를 한 차례 넘긴 바 있다.
그럼에도 이 전 최고위원이 또다시 ‘물의’ 발언을 내놓은 이유는 무얼까. 이 전 최고위원에 대한 평가는 이 후보 캠프 내에서도 양극으로 엇갈린다. 대부분 이 전 최고위원의 능력만큼은 인정하지만 그의 저돌적인 성향과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도 많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만 보더라도 이 전 최고위원의 말 한마디가 사단을 부른 것 아니냐. 정치인이라면 언행에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데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성향은 속에 있는 말을 ‘내지르는’ 스타일이다. 대중정치인으로서 이 같은 기질이 인지도와 인기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말실수 한 번으로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며 이 전 최고위원의 섣부른 언행을 문제 삼았다.
그러나 이 전 최고위원이 이 후보의 좌장 역할을 맡아올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이와 같은 성격이 큰 몫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전 최고위원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재오 전 최고위원은 이명박 후보가 직접 나서기 껄끄러운 문제들을 대신 나서서 해결하는 역할을 종종 맡아왔다. 수많은 질타를 받아온 한반도 대운하를 알리기 위한 노력에도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사람이 바로 그다. 추석 때 지방을 돌며 대운하 자전거 탐방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아무도 시키지 않았던 험한 일을 이 전 최고위원은 자진해서 했다. 오랜 경영자 생황을 해왔던 이명박 후보의 입장에서 이재오와 같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선 이후 이 전 최고위원이 박 전 대표 측을 향해 “먼저 반성하라”고 주문했을 때에도 이 후보의 속내를 대변했다는 시각이 많았다. 이 후보는 경선 직후인 8월 28일 한 오찬자리에서 “자는 척하는 사람은 절대로 깨울 수 없다. 오히려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깨울 수 있다. 그래서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릴 것인데, 자는 척하다가 정말 잠이 들 수 있다. 그때 깨워야 되겠다”라고 언급해 박 전 대표 측의 반발을 불렀다. 당시 박근혜 캠프 측 서청원 전 상임고문은 “선거인단에서 왜 졌는가에 반성하고 자성하고 옷깃을 여미고 박 전 대표를 찾아가 ‘도와 달라. 당신이 아니면 진다’고 해도 시원찮은데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것은 잘못됐다”며 ‘승자’ 이 후보의 행동을 질책했었다.
물론 이 전 최고위원이 사퇴까지 해야 했던 배경에는 이회창 출마라는 변수가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았던 지지율이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 이후 요동치자 이 후보 캠프가 다급해지기 시작한 것. 사실상 이 후보 캠프는 ‘이회창 출마’ 가능성을 크게 점치지 않은 분위기였다. 또한 ‘이대로라면 박근혜 없이도 이긴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표를 배제한 대선승리 시나리오에 의존했던 면이 있다. 그런데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선언으로 박 전 대표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셈이 됐다. 이재오 최고위원의 사퇴가 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 전 최고위원의 사퇴로도 박 전 대표의 마음을 살 수는 없었다는 점에서 이 후보 측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이 전 최고위원의 퇴진 회견문 초안에 담긴 문구가 박 전 대표 측의 심기를 건드렸고 유승민 의원은 “이건 퇴진이 아니라 협박”이라며 사퇴의 진정성을 문제 삼았다. 이 전 최고위원인 박 전 대표를 향해 ‘선대위원장이라도 맡아 상근도 하고…’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박 전 대표 측 유승민 의원은 “최고위원을 물러나는 사람이 박 전 대표에게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으라고 말한 것은 과대망상의 극치”라며 “이런 식의 사퇴라면 차라리 최고위원직에 그냥 계시라”고 반박했다.
더구나 이 후보가 8일 박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대선에서의 협조를 요청했지만 박 전 대표가 사실상 거절하면서 상황은 더욱 꼬이고 있다. 이 후보는 박 전 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정권교체에 협력해달라. 빠른 시일 내에 만나 얘기하자”며 회동을 제안했지만 박 전 대표는 “8월 경선 이후 이미 밝힌 (백의종군) 입장에 변화가 없다. 상황변화가 없는데 굳이 만날 필요가 있겠느냐”며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이 후보와 박 전 대표의 화합시도가 불발로 끝남에 따라 당내 갈등기류는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된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자 이 후보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다급한 상황을 노출했다. 이 전 최고위원의 사퇴로는 부족하다는 박 전 대표 측 주장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 후보는 “그런 소리 하지도 말라”며 발끈했다. 근래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캠프 내에서는 “얻은 것 없이 잃기만 했다”는 자조적인 목소리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 전 최고위원이 앞으로 2선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이 전 최고위원은 ‘백의종군’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관측통들은 ‘막후 조력자’의 역할을 계속 맡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 어려운 입장인 이 후보로서는 이 전 최고위원과 같은 행동형 충성파가 절실하다. 그런 면에서 당분간은 드러나지 않게 밑바닥에서 조직을 다지고 캠프를 단속하는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황이 이 후보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면 이 전 최고위원도 가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정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