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후보와 어떤 관계?” “사회적 관계다”
▲ 1994년 이동연 회장 자택 앞에서 포즈를 취한 에리카 김(왼쪽에서 두 번째)과 이명박 후보 부부. | ||
한나라당은 에리카 김의 주장에 대해 ‘근거 없는 비방’이라고 한마디로 평가절하하고 있지만 항간의 소문들은 에리카 김과 이 후보의 관계에 대해서까지 의혹을 던지고 있다. BBK 사건이 김경준 씨의 단독범행이며 이 후보는 단지 사기를 당한 것뿐인지, 아니면 이 후보가 공범자인지의 여부는 검찰 조사로 밝혀지겠지만 김경준 씨의 가족들은 모두 나서 이면계약서를 들고 이 후보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에리카 김의 이름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거론된 것은 BBK 사건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면서부터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명박 후보와 함께 종종 언론에 오르내렸다. 국내에는 ‘미국 한인사회에서 성공한 미모의 여변호사’로 알려져 왔고 이 후보와의 인연뿐 아니라 국내 정·재계 인사들 사이에서도 남다른 인맥을 과시해 왔다. 그러나 1994년 이 후보와 첫 번째 만남을 가진 뒤 13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의 인연은 ‘악연’으로 바뀐 모습이다. BBK 주가 조작 의혹의 키를 쥐고 있는 에리카 김과 이 후보의 만남과 인연, 그리고 그의 인생 편력을 들여다보았다.
에리카 김은 동생 김경준 씨가 국내로 송환된 뒤 적극적인 ‘도우미’로 나서고 있다. 미국 현지에서 국내의 기자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동생의 입국 사실 및 비행기 탑승 소식을 전하는가 하면 추가로 김경준 씨의 변호사에게 관련 자료가 들어있는 서류 상자를 소포로 보내면서 동생의 구명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동안 언론에 직접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에리카 김은 이면계약서를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자 그동안의 잠행에서 벗어나 몇몇 국내 언론사와의 인터뷰에도 응했다. 그의 주장 가운데 이 후보 측을 당황케한 첫 번째는 김경준 씨와 이 후보가 처음 만난 시기와 관련된 것이다. 당초 1999년 초 이 후보와 처음 만났다는 김경준 씨 주장에 대해 한나라당은 2000년 초라고 반박했고 이 후보 역시 지난 19일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서 “미국에서 귀국해 2000년 초에 만났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 후보 측은 이 후보가 1999년 당시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은 사퇴하고 미국 워싱턴DC의 조지워싱턴대학에서 연수 중이었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에리카 김은 이 후보와 동생이 만난 것은 ‘99년 2~3월 경 서울 프라자 호텔’이라며 시기와 장소까지 명확하게 밝히고 ‘출입국 기록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한나라당 측은 애초의 주장과는 달리 “이명박 후보가 1999년 4~5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고 진술을 바꿨다.
이 과정에서 네티즌들은 99년 6월 30일자 한 신문에 “이명박 씨가 복통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법정에 출두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긴 기사와 99년 10월 4일자 또 다른 신문의 동정란에 ‘이명박 전 국회의원은 (10월) 5일 고려대 경영대학원에서 최고경영자과정 수강생을 대상으로 특강한다’는 보도가 있었던 것을 찾아내며 이 후보의 거짓말을 지적하고 나서기도 했다.
대선 레이스가 시작된 이후 정가에서는 이명박 후보의 ‘아킬레스건’은 결국 BBK 사건이 될 것으로 전망돼 왔다. 그리고 이 후보가 김경준 씨와 만나게 된 과정에는 에리카 김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초점은 이 후보와 그의 관계로까지 이어진다.
이명박 후보는 지난 1994년 LA 교회의 한 신앙 간증에 참석했다가 에리카 김과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에리카 김을 이 후보에게 소개했던 이동연 한미신용정보 회장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정황을 밝힌 바 있다. 이 회장은 “평소 교포 2세대들에게 한국의 정·재계 유명 인사들과 연결해주고자 했다”며 “(1994년 이 후보의 미국 방문 당시) 내가 우리 집으로 직접 모셔서 머물게 하는 등 정성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에리카) 김 변호사와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 후보는 에리카 김을 좋게 생각했고 이후 1995~1996년까지 이 회장과 에리카 김이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자주 만나 식사를 했으며 노래방을 찾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에리카 김이 유명세를 타게 된 계기는 1995년 11월 서울 힐튼 호텔에서 열린 출판기념회를 통해서였다. <나는 언제나 한국인>이라는 자서전을 낸 에리카 김의 출판기념회에는 당시 서영훈 적십자가 총재, 강영훈 전 총리, 홍인길 의원, 강삼재 의원, 김원기 의원 등 유명인사 100여명이 참석했고 이 후보 역시 이 자리에 참석해 에리카 김과 함께 축하 케이크를 잘랐다. 서른 살이던 에리카 김으로서는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으며 이 장면은 KBS에 방영되기도 했다. 당시 이 후보의 주변에서는 에리카 김과 가깝게 지내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동연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이 후보 측에서도 두 사람의 접촉이 좀 지나치지 않나 싶다는 걱정을 했고 누군가 ‘문제가 될 것 같다’라는 얘기를 한 것도 들었다”고 밝혔다. 당시 에리카 김은 결혼한 상태였으며 현재는 이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995년 에리카 김 자서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인사들. 서영훈 당시 적십자사 총재와 강삼재 김원기 강인섭 당시 의원 등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제공=시사저널 | ||
에리카 김과 이명박 후보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국 검찰에서도 어느 정도 조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월간지에서 입수한 2006년 5월 3일 미국 법정 진술 녹취록에 따르면 당시 에리카 김은 ‘이명박 후보와는 어떤 관계였습니까’라는 질문에 ‘사회적인 관계였습니다’라고 답했고 ‘어떻게 사회적인 관계였습니까. 연인 사이 같은 것이었습니까’라고 묻자 ‘아닙니다’라고 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내용 중에는 ‘그의 부인이 없을 때 그의 회사에 간 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이명박의 회사에 있었을 당시에 당신이 그가 있는 장소에서 한 번이라도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상태로 있었던 적 있습니까’ ‘당신이 이 씨의 측근들과 애인 사이이거나 성적 관계를 맺은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에리카 김은 미국 교포 사회에서도 똑똑하고 한국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에리카 김은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성장과정과 이민 후 미국 사회에서 성공하기까지의 과정을 밝혔다.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에리카 김은 줄곧 ‘미혜’라는 한국 이름을 고집하다가 코넬대 1학년 시절 절친한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겪은 뒤 이를 이겨내기 위해 자신에게 ‘영원히 강하다’는 뜻을 가진 ‘에리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에리카 김은 “항상 나의 오빠 노릇을 하는 큰동생 경준이는 남다른 성격의 소유자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든 이루어내고야 마는 지독하리만큼 철저한 인간이다…경준이는 내가 수석으로 졸업한 Charter Oak Highschool’을 역시 수석으로 졸업하고 역시 코넬로 와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경준이가 내 뒤를 계속 쫓아온 것을 보면 내가 꽤 괜찮은 누나였던 것 같다”며 김경준 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1964년생인 그는 코넬 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UCLA대학원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가 됐으며 2003년 7월에는 제27대 로스앤젤레스 한인상공회의소 회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에리카 김은 한국말도 매우 유창하게 했기 때문에 교포 사회에서 더 신임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리카 김은 한국말을 잊지 않은 것이 아버지 덕분이라며 “나는 요즘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모르는 말이 나오면 메모를 해 놓았다가 사전을 찾아보든가 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물어 본다”고 책 속에서 밝히기도 했다.
에리카 김은 여성 변호사로서는 드물게 배짱이 두둑하고 때로는 아주 공격적으로 소송을 진행하는 사람으로 로스앤젤레스 지역 법조계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고 한다. 현지의 한 변호사는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에리카 씨는 한번 붙으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라며 “민사소송은 특성상 웬만하면 중간에서 타협을 하는 사례가 많지만 에리카 씨는 워낙 공격적으로 소송을 진행하기 때문에 소송이 장기화될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에리카 김은 2001년 자신이 운영하는 법률회사의 실소득을 부풀린 세금관련 서류를 제출한 혐의, 2002년 허위 법인세 보고 서류를 제출한 혐의, 2002년 불법으로 개설한 크레딧 라인을 통해 11만 달러 상당의 수표를 발행한 혐의 등으로 미 연방 검찰의 조사를 받고 기소된 데 이어 캘리포니아 주 변호사회의 조사가 시작되자 스스로 변호사 면허를 포기해 현재는 변호사 업무를 할 수 없는 상태다.
에리카 김은 물론 김경준 씨와도 친분이 있는 한 정치권 인사는 에리카 김과 김경준 씨에 대해 “참 똑똑하고 젠틀한 사람들이다. 에리카 김과 이명박 후보가 남녀로서 부적절한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자는 “사실 BBK나 김경준 씨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에리카 김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현재 에리카 김은 상황에 따라 직접 한국에 들어올 수도 있다는 입장을 내보이고 있다. 동생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그는 “같은 일을 했는데 한 명은 피의자고 또 한 사람은 피해자라는 것이 억울하다”는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한편 이동연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일이 이렇게 커지기 전에 (이명박 후보가) 얼마든지 김 씨 남매를 잘 타이르면서 좋은 방향으로 수습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한때 사업가로서 승승장구했던 이명박 후보가 당시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무리한’ 사업 진행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에리카 김은 21일 국내의 한 언론과의 전화 통화에서 “(검찰 수사 등)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직접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은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의 귀국이 BBK 사건과 겹쳐 대선 정국에 또 다른 뇌관이 될지 대선을 3주 정도 남겨 놓은 정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