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선장 보좌할 대운하 1등 ‘항해사’
▲ 차기 정부 초대 대통령실장에 내정된 유우익 교수. 그는 이명박 당선인의 복심으로 유명하다. 연합뉴스 | ||
이렇듯 막강한 대통령실장 자리에 평생 교단에서 지리학을 가르치던 교수 출신이 임명되자 관가에서는 ‘유우익이란 사람이 누구인가’라며 쑥덕거리기도 한다. 특히 일각에서는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 과연 차기 정부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할 수 있을까”라며 회의적인 시각을 표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인은 정작 “청와대는 권부가 아니라 대통령 보좌의 실무적인 자리에 그칠 것”이라며 몸을 바짝 낮추고 있다.
유난히 인물 욕심이 많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그가 차기 정부의 ‘넘버 투’ 자리로까지 불리는 대통령실장 자리에 유우익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를 내정하자 정치권에선 인사에 지극히 ‘까탈스런’ 이 당선인이 그를 왜 전격적으로 지명했는지 궁금해 하고 있다. 사실 이 당선인은 한때 대 국회관계 등을 고려, 정치인을 기용하는 방안도 고려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대통령실을 과거처럼 힘이 집중되는 권부로 만들기보다는 기업의 회장 비서실 같은 실무체제로 만드는 쪽으로 결론이 나면서 유 내정자로 낙착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그는 대통령실장에 내정된 뒤의 첫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정무에 멍청한 실장이 왔다고 해주는 것은 고마운 말”이라며 “에러가 있어도 봐달라고 할 수 있어서…”라며 짐짓 여유를 보이면서도 “(정무를) 전혀 모른다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고 유 내정자가 정무와는 무관한 ‘반쪽짜리 대통령실장’으로 남을 것 같지는 않다. 유 내정자의 지나온 길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가 연구실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던 게 아니라 ‘발로 뛰는 현장가’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먼저 그가 걸어온 길을 간단히 짚어보자. 그의 공식 프로필은 대통령실장 직에 어울릴까 싶을 정도로 평범하다. 그는 1950년 1월 소띠 생으로 경북 상주 출신이다. 상주고를 나와 서울대 지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 1980년에 독일 키일 대학교에서 지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로 지금까지 재직해왔다. 병역은 ROTC 9기로 임관해 육사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그의 학문적 프로필은 여느 대학교수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지리학 방면에서는 일가를 이룰 정도로 우수했다고 한다. 먼저 그는 독일 키일 대학교에서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박사학위를 너무 빨리 따자 학교 측에서 “한국에 돌아가 당신의 이론을 적용한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조건으로 학위를 수여했고 이후 유 내정자는 경북 칠곡군의 사례를 적용한 보고서를 냈다는 일은 유명한 일화다. 초고속 박사학위 취득으로 그는 30세의 나이로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가 됐고 미국 버클리대와 파리 소르본대학 등에서 객원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이를 보면 그가 지리학자로서는 일찌감치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활동가적 기질은 서양인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지리학회 사무총장에 오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 지리학은 세계에서도 변방이다. 그래서 그의 사무총장 취임은 우리나라에서도 작은 ‘사건’이었다. 세계지리학연합회(IGU)는 1871년에 창설돼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고 규모가 큰 학술단체로 100여 국가의 지리학회와 600여 단체를 거느리고 있다. 그가 이 학회 사무총장으로 뽑혔을 때 학계에서는 “비유럽인 최초로 유 내정자가 사무총장으로 일하게 돼 학문적으로도 세계적인 석학 반열에 올랐지만 그것보다 영토 분쟁 조정 등에 관한 일을 한다는 점에서 정치권과의 관계 설정도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그가 이 단체에서 하는 정치적 역할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라는 반응이 많았다.
유 내정자는 영어, 독어, 프랑스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그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지리학을 국토계획, 지역개발, 문화관광 등의 분야로 확장시켜 각종 논문, 저서와 에세이를 펴냈다. 이쯤 되면 ‘전문역량’과 ‘활동가적 기질’을 동시에 선호하는 이명박 당선인의 까다로운 구미에 맞을 정도의 기본적 능력은 인정받은 셈이다. 인수위 관계자들은 “이 당선인이 ‘튀는 교수’들을 특히 좋아한다”고 귀띔한다.
▲ 지난 5일 열린 인수위 업무보고회의에서 유우익 내정자 등 참석자들이 이명박 당선인의 인사말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 ||
그는 지리학계에서 민족학자로도 통한다. 그는 “패배주의적인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한반도를 글로벌 허브기지로 재창조해야 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유 교수는 평소 ‘지리학을 통해서 본 한반도 재개조론’ 등에 관한 문화강좌를 많이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불리하다는 가설은 일제가 조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식민지의 패배감, 후진국의 열등감을 떨어내고 분단국의 긴장감을 활력으로 승화시켜 우리의 운명을 창의적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면서 한반도 비전 창출에 대한 시민과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촉구했다. 이러한 그의 이러한 철학적 인식은 “한반도는 21세기 문명의 주무대로 떠오르는 아시아와 태평양으로 열린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다. 세계화란 닫힌 공간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국가발전 전략 차원에서 그 특성을 살려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런 철학적 비전은 한반도 대운하 건설 구상과 한반도의 항구화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는 ‘한반도 대운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라는 비판에 대해 “정치논리에 의해 본질적 문제가 흐려졌다. ‘단순히 땅을 파서 물을 채우고 배가 다니게 하는 게 아니라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 인프라를 구축하는 프로젝트’다”라고 역설한다.
유 내정자는 특히 “세계화는 부정할 수 없는 큰 흐름이며 이 흐름을 어떻게 잘 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운하에 잘 모르시는 분이 대부분인데 선진화로 나아가려면 우리나라 전 국토에 세계의 문화와 물자, 가치 등이 들어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운하는 세계를 국토 전체에 끌어 들여 앞 바다는 태평양, 뒷마당은 유라시아 대륙으로 삼아 가능한 물적·인적 네트워크를 강화하자는 것으로 이를 통해 세계와 (한국이) 엮어지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라고 강조한다.
유 내정자를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유 교수의 평소 소신이 이명박 정부의 ‘미래지향적이고 창조적인 실용주의’와 맥이 닿는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철학적 소신이 앞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정의 바로미터가 될 것임을 두 말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그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 당선인은 유 내정자의 활동가적 기질이라는 추진력에 한반도 미래에 대한 비전이라는 콘텐츠에 매료되어 그를 새 정부 초대 대통령실장에 임명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 유 내정자의 타고난 부지런함도 한몫한 것 같다. 그는 지리학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발로 뛰는 지리학자로 더 유명하다. 그는 한창 연구활동을 활발하게 할 때 매주 금요일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국토 순례길에 나섰다. 방학 때면 방학기간 내내 국토를 횡·종단한다. 혼자 떠날 때도 있고 소설가 이문열 씨, 고려대 서지문 교수 등 평소 친한 지인들과 함께 떠날 때도 있다. 그렇게 국토를 누비길 30년 가까이 된다. 그는 이에 대해 “낯선 곳만 찾아다녀 간첩으로 오인도 많이 받았다. 갑자기 불어난 물 때문에 떠내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에서 하루 종일 남의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이런 국토사랑은 <장소의 의미> I, II라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유 내정자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말’도 잘 한다고 칭찬한다. 그의 어투는 비교적 느린 편이지만 상당한 달변이라고 한다. 뻔한 내용도 그가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하면 뭔가 내용이 있는 것처럼 빨려들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일 처리가 합리적이고 신념이 투철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동료 교수들은 한결같이 유 내정자에 대해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다”라고 말한다. 말과 행동이 진지하고 신중해 일단 믿음이 간다는 것이다.
특히 유 내정자는 이 당선인의 의중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악하는 복심으로도 유명하다. 대통령실장 내정을 앞두고 주변에서 “정치와 행정 경험이 없다”며 만류했지만 이 당선인이 “내가 일하기 가장 편한 사람”이라며 직접 참모들을 설득했을 정도로 신임이 두텁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