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칼날이 다 뽑히면 반은 날아간다
▲ 박재승 통합민주당 공천심사위원장이 국회 통합민주당 대표실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
손학규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와 각 정파는 겉으로 공심위에 공천 전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내심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공심위의 서슬퍼런 개혁 공천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 안팎에선 벌써부터 호남 물갈이 등 대대적인 인적쇄신론과 맞물려 ‘박재승 괴담’이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정치권 일각에서는 박 위원장의 개혁 의지와는 달리 현실정치의 높은 벽을 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회의적인 분석도 나오고 있다. 4월 총선에서 살아남기 위한 제 정파들이 공천 기준 등을 놓고 한치의 양보 없는 치열한 기 싸움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고 탈락 세력들의 조직적인 반발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 위원장은 오로지 ‘성역 없는 공천’에 방점을 찍고 공천 혁명을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뚝심 있는 인권변호사에서 ‘공천 특검’으로 대변신을 시도하고 있는 박 위원장의 정치실험 무대 속으로 들어가 봤다.
“나 떨고 있냐”
오래전 절정의 인기를 얻었던 TV 드라마에 나온 명대사가 최근 민주당 주변에서 나돌고 있다. 박 위원장을 정점으로 한 공심위원들이 고강도 공천혁명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천 특검’이란 별명이 붙은 박 위원장이 공천심사위에 예상치 못한 외부 인사들을 참여시켜 이른바 ‘공포의 외인부대’를 구성하면서 공천 혁명은 단순히 공염불에 그치지 않고 현실화될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19일 공개된 공심위원 면면은 박 위원장의 총선 혁명 의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 정치인 몫으로 인선된 김부겸 이인영 의원(대통합민주신당)과 최인기 김충조 최고위원, 황태연 동국대 교수(구민주당) 등 5명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의 공심위원은 박 위원장이 직접 엄선해 뽑았다. 박 위원장은 공개 직전까지 외인부대 명단을 비밀에 부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6명의 외부 공심위원들은 명단 공개 직후 정치권이 이구동성으로 ‘공포의 외인부대’로 칭할 만큼 하나같이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당 쇄신위원을 지낸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를 비롯해 시골 의사(박경철), 시인(인병선), 재야 역사학자(이이화), 광복군의 아들(장병화),언론인 출신(김근) 등 다양한 이력을 소유하고 있다. 박 위원장은 이들의 인선을 개혁공천 가치를 공유하는 ‘코드인사’라고 밝히고 있을 정도다.
공심위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이 보장 된다면 내부 공심위원(5명)보다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박 위원장과 외인부대가 파괴력 있는 공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상황이다. 정치권 일각에서 ‘박재승 사단’이 대형 사고를 칠 것이라고 예단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있다.
실제로 박 위원장은 당 지도부에 총선 공천에 관한 전권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혁명 공천을 예고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당의 공천 ‘물갈이’ 폭이 50%에 달할 수도 있다고 발언해 파장을 일으킨 바 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홍업 의원과 박지원 전 비서실장 등의 공천 문제와 관련해서도 “공천의 기본 원칙과 방침에 전혀 예외가 있을 수 없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정치적 이해관계나 정파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국민의 눈으로 판단하겠다는 게 박 위원장의 방침이다.
박 위원장의 거침없는 공천 드라이브에 그를 지지하고 있는 개혁성향 의원들 사이에서도 “누가 살아남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는 분위기다. 박 위원장을 빗대 ‘저승사자’니 ‘공천 특검’이니 하는 별칭이 붙어 다니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박 위원장은 이러한 당내 분위기를 뒤로한 채 공천과 관련한 확실한 ‘전권’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공심위는 이미 지역구 공천에 대한 사실상의 전권을 위임 받은 상태지만 박 위원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비례대표 추천권도 공심위에 넘기라고 압박하고 있다. 18일 모 라디오에 출연한 박 위원장은 “비례대표 공천에 정치적 고려가 더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큰 틀에서는 국민 여망에 벗어나서는 안 된다. 이론적으로 같은 잣대를 대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 박재승 위원장의 거침없는 공천 드라이브에 그를 영입한 당 지도부마저 당황스러워 하는 분위기다(위). ‘개혁공천’ 예고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들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 ||
당 지도부가 박 위원장과 공심위의 거침없는 행보에 제동을 거는 동시에 지도부에 공천 권한 일부를 남겨두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민주당 최고위원회는 박 위원장에게 지역구 공천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부여하는 대신 안전장치로 재의 요구권을 지도부 몫으로 남겨뒀다. 또 비례대표 추천위원회는 공심위와 별도로 구성하되 박 위원장이 위원장을 겸임하고 그 구성과 운영은 손학규·박상천 공동대표와 박 위원장이 협의해 결정키로 했다. 지도부 입장에서는 공심위가 월권을 행사하거나 감당하지 못할 정치적 파장에 대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부정부패·비리 전력자 배제 여부 등 구체적인 공천 기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는 한바탕 진통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공천 심사 기준은 김 전 대통령의 측근들을 비롯해 신계륜 사무총장,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 등 중진급 실세들의 공천 신청 허용 여부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지도부는 21일 ‘비리, 부정 등 구시대적 정치행태로 국민적 지탄을 받은 인사’를 공천에서 배제키로 한 기준을 포함한 인적쇄신 관련 조항을 공천심사규정에 넣기로 했다. 신 사무총장은 “쇄신안의 인적쇄신 관련 조항을 당규에 그대로 넣기로 했다”며 “중앙위원회에서 의결을 거친 내용이라 최고위원회의에서 무리없이 통과될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공심위가 사실상 공천의 전권을 행사할 경우 ‘구시대적 정치행태 인사’가 누구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열쇠도 갖게 된다. 문제는 공심위가 별도의 객관적 내규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이 기준을 적용할 것인지 여부다. 당 내부에서는 공심위가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한다는 의견과 내규를 만들어 해당 인사들의 심사 자체를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결국 금품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의 공천 운명은 박 위원장이 쥐고 있는 셈이다. 박 위원장은 쇄신안에 따라 원칙대로 심사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으나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극심한 후유증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과연 박 위원장의 거침없는 개혁공천 실험이 성공할 수 있을지 또 그 파괴력은 어느정도 일지 그의 소신 행보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