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이 좁은 마님 ‘비자금 문턱’ 삐끗
▲ 지난 2일 삼성비자금 관련 의혹으로 소환된 홍라희 리움 관장이 특검 사무실로 들어가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홍라희 관장은 고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과 둘도 없는 파트너였던 고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의 맏딸이다. 이승만 정권 때 장관직을 두루 거친 홍 회장이 3·15 부정선거로 옥고를 치를 때 이병철 회장의 도움을 받은 것이 양가 친분의 계기가 됐다. 이후부터 두 사람이 평생 동지로 동고동락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이건희 회장과 홍 관장이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이다.
홍 관장은 대학(서울대 미대 응용미술학과) 3학년 때 국전 공예부문에 출품한 작품이 입선했을 정도로 일찍부터 미술 분야에 대한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 홍 회장이 “이병철 회장을 모시고 국전을 안내하라”고 해서 홍 관장이 이병철 회장의 안내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 만남은 이 회장이 며느릿감을 보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실제로 졸업 직후 홍 관장은 이건희 회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재원이었던 홍 관장은 이 회장과 혼담이 오갈 당시 한동안 “전문직업인의 길을 걷겠다”며 반발했을 정도로 사회활동 욕구가 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홍 관장이 원했던 대로 졸업 후 유학을 떠났더라면 지금쯤 유명 디자이너나 평론가 혹은 대학 교수의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홍 관장의 남다른 배포를 눈여겨본 것이었는지 시아버지 이병철 회장은 홍 관장에게 평범한 가정주부가 아닌 미술계 인사로의 길을 제시했다고 한다. 새댁이었던 홍 관장에게 매일같이 인사동에 가서 10만 원 내에서 마음에 드는 골동품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는 일화는 제법 유명하다.
생전에 4000여 점의 미술품을 수집했던 이 회장을 통해 안목을 전수받은 홍 관장은 호암미술관장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거치며 미술계 실력자로 등극하게 된다. 홍 관장은 2003년 10월 ‘13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상’을 수상한 뒤 언론 인터뷰에서 “시간 나는 대로 국내 또는 해외의 여러 미술관과 전시장을 찾는다” “국내는 물론 해외 문화계 인사들도 자주 만난다”고 밝힌 바 있다.
홍 관장은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부인 이정화 씨나 구본무 LG그룹 회장 부인 김영식 씨가 가풍에 따라 내조의 길만을 걸어온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내외를 종횡무진 다니며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다. 이렇게 한 덕분에 지난 2004년 설립된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의 넓은 공간을 단숨에 수만 점의 미술품으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국보급 문화재를 상당수 소장하고 있다’는 소문을 몰고 다녔을 정도로 예술품 수집에 남달랐던 이병철 회장과 국내 최고의 재력을 지닌 삼성가의 후원으로 국내 미술계 거목이 된 홍 관장은 2004년 삼성미술관 리움 개장 이후 국내 미술계에서 제일 손꼽히는 인사로 자리 잡게 된다. 미술 월간 <아트프라이스>는 매년 미술관 화랑 등에서 작가 관람객 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왔는데 홍 관장이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 연속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대표 인물’ 1위로 선정된 것이 단적인 예다. 미술계엔 홍 관장이 어느 작품에 얼마만큼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가격이 정해진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가 됐다는 전언이다.
허나 삼성의 ‘안방마님’ 홍 관장의 국내 미술계 실력자 등극 과정을 단순히 ‘명민한 며느리에 대한 시아버지의 후원’에서 비롯된 것으로만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각에선 상속·증여세 부담이 없는 공익재단을 상속에 활용하려는 재벌가의 관행과 맞물려 해석하기도 한다. 리움을 소유한 삼성문화재단의 경우처럼 미술관을 운영하는 법인이 얻은 수익에 대해서는 별도의 세금이 부과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세우고 소장 작품을 미술관 자료로 관련당국에 등록할 경우 이들에 대해서는 매각할 때까지 상속·증여세 징수가 유예된다. 막대한 세금을 물지 않고도 후손들에게 수집품을 물려줄 수 있는 셈이다. 또한 미술품 경매 등의 거래에서 구입자 신분에 대한 비밀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보유세와 양도세도 없다는 점에서 미술품 거래가 비자금 조성창구가 될 가능성이 오래전부터 거론돼 왔다.
▲ 지난 4일 삼성 특검에 출두한 이건희 회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결국 재계에 떠돌던 미술품 거래 관련 숱한 소문들과 김 변호사 폭로로 인해 홍 관장은 난생 처음 출국금지를 당하고 특검의 조사를 받게 됐다. 그런데 특검 주변에선 홍 관장이 지난 2일 출두한 순간부터 ‘무혐의 결론’ 관측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회장 일가를 대신해 국외에서 ‘행복한 눈물’ 등 고가 미술품을 사들였다는 의혹을 받는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는 특검 조사 과정에서 “미술품 구매가 삼성 비자금과 무관하다”는 주장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행복한 눈물’이 이 회장 자택에 걸려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을 때 홍 대표가 “해당 미술품을 다룬 바 없다”고 했다가 “내가 갖고 있으니 곧 공개하겠다”고 말을 바꾸는 등 미심쩍은 부분은 많지만 홍라희 관장과 비자금을 엮을 만한 결정적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홍 관장이 이사장으로 있던 1996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과정에서 삼성문화재단에 배정된 주식을 실권(포기)한 배경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뤄졌지만 홍 관장을 옥죌 만한 단서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홍 관장은 “실무자들이 처리해 에버랜드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다”는 진술로 일관한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2일 6시간 동안의 특검 조사를 마치고 나온 홍 관장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과 함께 약간의 미소도 보였다. ‘무혐의 결론’ 관측이 나돌 정도로 홍 관장에게 그다지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비자금 의혹을 받는 동안 적잖은 부담을 가졌던 듯한 모습이었다.
한편 김용철 변호사의 미술품 의혹이 제기되면서 홍 관장 등 재벌가 부인들이 주축이 돼 운영 중인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아름지기는 2001년 11월 문화재 지킴이를 자처하며 출범한 비영리 단체다.
이 재단의 이사장은 홍 관장의 동생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부인 신연균 씨가 맡고 있으며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부인 이명희 씨,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 부인 이운경 씨 등이 등기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홍 관장 등이 비자금으로 미술품을 구매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예술품 보호 명목하에 재벌가 부인들이 참여하는 이 모임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됐을 가능성에 삼성 특검팀이 주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최근 홍 관장이 아름지기 등기이사 명부에서 이름을 내린 것으로 확인돼 눈길을 끈다. 아름지기 법인 등기부에 따르면 홍 관장은 지난 2008년 1월 24일 등기이사직에서 사임한 것으로 돼 있다. 아름지기 분점 등기부에도 제법 많은 재벌가 인사들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데 여기서도 홍 관장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지난해 11월 김 변호사의 미술품 의혹 주장이 있은 직후인 올 1월에 이 모임 주축으로 알려진 홍 관장이 등기이사진에서 갑자기 물러난 배경이 궁금하다.
아름지기를 비롯해 홍 관장은 그동안 여러 분야에서 사회사업을 펼쳐왔다. 이병철 회장 부인 고 박두을 씨를 기려 설립된 두을장학재단(이사장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이건희 회장의 누나)에 삼성가 일원으로서 후원에 참여해왔으며 불교신도 모임 ‘불이회’의 회장직을 맡아 불교계 연구부문에 대한 포상과 후원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불이회에선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 부인 박현주 씨를 만나 그 딸인 임세령 씨와 이재용 전무를 맺어주기도 했다.
다른 재벌가 안방마님들과는 달리 남편만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 왕성한 사회활동을 펼쳐온 홍라희 관장. 그가 삼성 비자금 사태와 특검 조사를 겪으며 아름지기 등기이사에서 사임한 것처럼 대외활동의 폭을 좁혀가게 될지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