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로 흥한 자 ‘인사’로 망하더라
▲ 이명박 대통령의 ‘장세동’이라고까지 불렸던 박영준 청와대 전 기획조정비서관. 인사를 두고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과 갈등을 빚은 끝에 결국 세 달 만에 낙마하고 말았다. | ||
그럼에도 정치권 인사들의 그에 대한 평가는 매우 엇갈린다. 그는 오로지 이명박 대통령의 성공만을 위해 달려왔다는 점에서 분명 이 대통령의 ‘장세동’(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이었다. 이 대통령의 ‘입맛’에 딱 맞는 충직한 부하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인간관계에 있어 ‘호불호’가 강했던 박 전 비서관은 인사권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만 골라 쓴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3달 천하’로 막을 내린 박영준 전 비서관의 낙마 스토리로 들어가 본다.
박영준 전 기획조정비서관은 철저한 ‘이명박 맨’이었다. 그는 사석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MB(이명박 대통령의 영문 이니셜) 정권의 성공”이라고 공공연하게 얘기하곤 했다.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들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는 ‘이명박교(敎)’의 열렬한 전도사였다. 타고난 그의 우직함과 남다른 충성심은 웬만해선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의 눈에도 띄게 되는 ‘도약대’ 역할을 하게 해주었다.
일각에서 그를 ‘이명박의 장세동’으로 부르는 이유도 그가 물불을 안 가리고 이 대통령의 궂은일을 대신하는 가장 확실한 참모였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올 봄 대구 지역 총선 출마를 위해 떠나려는 그를 2시간여 동안 설득해 결국 새 정부 청와대의 기획조정비서관(1급)으로 눌러앉게 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그 자리(국회의원)보다 이 자리(대통령 비서관)가 할 일이 훨씬 많다. 그리고 네 역할을 메울 사람이 없다”라며 간곡히 설득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대통령의 강권에 그는 ‘눈물을 흘리며’ 공천 신청서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 대통령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박 전 비서관은 지난 1994년 이상득 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뒤 2002년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이상득 의원이 동생 지원 차원에서 박 전 비서관을 MB 캠프에 파견, 비서실 부실장으로 이 대통령을 돕게하면서 두 사람의 첫 인연은 시작됐다. 당시 경선 캠프 비서실장이 정두언 의원이었다. 이후 그는 2005년 아예 보좌관 직을 사임하고 ‘이명박 서울시장’ 아래서 서울시 정무담당 국장을 맡았다. 2002~2003년 무렵 서울시 정무부시장이던 정두언 의원과도 다시 만나 의기투합했다.
캠프 입성 초기만 해도 박 전 비서관의 존재감은 미미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그는 남다른 기획력과 충성심으로 이 대통령의 엄격하고도 혹독한 ‘내구성 테스트’를 통과해 결국 1급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사실 이명박 캠프는 다른 대선 캠프에 비해 가장 경쟁이 심했던 조직이었다. 이 대통령 자신이 가장 경쟁이 치열했던 현대그룹에서 최장수 CEO로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하들을 어떻게 경쟁시켜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일단 사람을 데려오면 일을 시키지 않고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이명박 캠프에서 일했던 인사들은 하나같이 “혼자 뭐든지 기획을 해 일을 만든 다음 성공을 시키면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승승장구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부름도 못 받고 자연 도태된다”라고 말한다. 특히 대선 후반기에 외부 영입 케이스로 들어온 참모들은 좋아하던 술도 끊고 경쟁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제 시간에 출근 못하거나 제대로 대답 못하면 점수가 깎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영입된 한 인사는 “직장생활 20년 한 것보다 이 후보 캠프에 자리 잡기까지 20일 동안 더 많은 것을 느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올라선 사람이 바로 박영준 전 비서관이다. 능력이 있다는 얘기다. 박 전 비서관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던 시절에 외부 강연 프로그램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이 후보의 강연 내용이 자주 언론에 소개되면서 그의 인지도와 호감도가 높아져 이 대통령이 매우 흡족해했다는 후문이다. 또한 박 전 비서관은 ‘오세훈 서울시장 선거 파견’을 비롯해 이 대통령이 직접 하달한 굵직한 임무들을 한 번도 ‘주군’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발군의 수완으로 완수해 두터운 신임을 계속 쌓아나갔다고 한다. 특히 그는 이명박 대선 후보에 대해 반감을 가진 노조위원장들 앞에서 큰절로 지지를 호소한 일도 있을 정도로 충성도 면에서 특 A급 참모였다.
▲ 정두언 의원 | ||
그는 이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말보다는 성과로 말하는’ 참모들의 1세대 리더였기에 캠프에서도 ‘큰형님’으로 통했다. 당연히 그는 이 대통령을 보좌하는 기능 외에 새로 유입되는 보좌진들의 ‘군기반장’ 역할도 도맡아 했다. 여기에서부터 최근 논란이 된 정두언 의원 측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그는 지난 2005년까지 거칠 것이 없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확실한 참모였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직에 있으면서 본격적으로 대선을 준비했던 2005년 중반부터 사단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외연을 확대하기 위해 각계의 인재들을 두루 모집하고 있었다. 이때 한나라당 소장파 관계자들도 대거 캠프에 영입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2인자’ 역을 자임했던 박 전 비서관이 자연히 위기의식을 느낄 만했다. 그는 새로 영입된 전략통들에게 ‘시어머니’ 역할을 하며 견제를 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때 불거졌던 박 전 비서관과 소장파 관계자들의 갈등은 결국 2008년 6월 정두언 의원과의 권력 쟁투로 비화되며 불행한 결말을 맺게 된 것이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대통령과 직접 독대를 하며 역할을 맡기로 했는데 박 전 비서관이 견제를 해서 캠프에 들어간 뒤 몇 달 동안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 뒤로도 사사건건 그가 새로 영입된 소장파 관계자들을 물고늘어지며 견제해 굉장히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한 관계자도 이에 대해 “정두언 박형준 의원 등 소장파와 함께 지난 대선에서 고생했던 사람들 거의 모두가 박 전 비서관의 견제를 받고 ‘실업자’가 되었다. 이유도 알 수 없이 무조건 인사에서 배제돼 그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당시 양측 간의 갈등은 박 전 비서관이 조금 양보하면 충분히 해결됐을 문제였다. 하지만 끝까지 박 전 비서관은 소장파 관계자들의 권력 입성을 막아 자신마저 낙마하는, 자업자득의 측면이 없지 않다는 지적이다.
박 전 비서관은 소장파로부터 ‘막힌 인사를 좀 뚫어달라’는 부탁을 여러 번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그는 냉정했다. 결국 양측은 ‘조각 인사’를 두고 그 갈등이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정두언 의원이 추천한 사람들이 조각 인사에서 수용이 안 된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당시 정 의원은 인사의 편파성을 이 대통령에게 지적했지만 매번 좌절되자 ‘신임 경쟁에서 대통령이 박영준 비서관 손을 들어줬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 뒤부터 양측의 감정싸움은 깊어졌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관계자는 “인수위 무렵 박 전 비서관이 대통령에게 ‘정두언 의원이 차기 대통령 야심을 가지고 자기 세력 구축을 위해 요소요소에 사람을 박으려 한다’는 보고를 올린 것 같다. 최근 정 의원이 박 전 비서관을 두고 ‘이간질의 명수’라고 직공한 부분도 이런 이유에서다”라고 말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박 전 비서관의 질투가 굉장히 심했다. 이 대통령에게 접근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그의 견제를 받곤 했다”라고 주장한다. 그 자신이 이 대통령의 가장 충직한 부하였기에 자신을 능가하는 2인자 출현을 끝까지 견제했다는 것이다. 대선 당시 곳곳에서 인재가 영입돼 자신의 지위를 위협받던 박 전 비서관이라면 최근 정두언 의원이 이 대통령의 신임을 잃고 분노를 느끼는 것을 한편으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
▲ 박영준 전 비서관이 과학기술위(위쪽)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화하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 ||
한편 박 전 비서관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도 인심을 많이 잃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이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대선 과정에서 ‘선진국민연대’를 이끌어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박 전 비서관은 전국에 산재해 있는 이명박 후보 지지 사조직을 통합·흡수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다. 당시 조직을 맡은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비서관은 지방에 내려올 때마다 마치 점령군처럼 굉장히 고압적이었다. 지방에서 어렵게 이 대통령 지지모임을 유지하고 있는 인사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무조건 자신 밑으로 들어오라며 큰소리를 쳐 기분이 나빴다. 또한 어렵게 일궈낸 지역 조직을 자신이 당연한 듯 싹 거두어 가버린 뒤 그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것에 대해 매우 화가 났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박 전 비서관은 고압적인 언행으로 지난 대선 과정에서 당내의 인심을 많이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청와대로 들어가서도 ‘정실 인사’를 노골적으로 펴 주변의 눈총을 받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지난 2002년경부터 한나라당을 떠나 있었지만 당내에는 자신과 친분이 깊은 보좌관들이 꽤 있었다. 새 정권 들어 그들이 정부 정무직으로 가면서 일부는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박 전 비서관의 ‘백’으로 요직에 들어간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박 전 비서관의 인사에 대한 잡음이 계속 나오면서 그렇지 않아도 ‘실세’로 부각돼 견제를 받아온 그가 더욱 미움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박영준 전 비서관은 무뚝뚝한 외모에 말이 별로 없는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로 통했다. 때로 냉정해 잔정이 없다는 지적도 있지만 일부에선 의리가 있고 주군을 위해 자기 생명도 던질 수 있는 지조와 절개가 있다는 평가도 따른다. 경북 칠곡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뒤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1급)에까지 오른 그는, 분명 정치권의 성공신화에 들 만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만약 그가 최고의 지위에 오른 뒤에도 몰려오는 아군들을 무조건 밀어내지 않고 따뜻하게 포용하는 덕을 발휘했더라면 앞으로 더 큰 꿈을 위해 뛸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