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포’ 떼니 이만한 ‘쌍마’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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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반도체 신화를 이끌어냈던 이윤우 투자조정위원장. 연합뉴스 | ||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을 선장으로 하는 사장단협의회가 그룹의 최고기구가 됐지만 40명의 사장들이 모이는 이 기구는 ‘결정체’ 성격이 아닌 ‘협의체’ 성격을 보일 전망이다. 아무래도 총수→전략기획실(옛 비서실·구조조정본부)→각 계열사로 이어진 운영체제를 탈피, 독립경영체제로 가는 과정이 간단치 않을 듯하다.
이렇다 보니 사장단협의회 산하에 구성된 투자조정위원회와 브랜드관리위원회에 관심이 쏠린다. 각각 6~7명의 사장단으로 꾸려질 두 위원회는 계열사 간 사업조정과 통합 브랜드 관리를 수행하며 축소 개편된 전략기획실 성격을 지닐 것으로 평가받는다. 자연스레 두 위원회의 수장인 이윤우 부회장과 이순동 사장에게 업계의 안테나가 쏠릴 수밖에 없다. 그룹 창립 70주년 만에 첫 가동되는 계열사 독립체제의 중심에서 과도기 그룹 살림을 사실상 주관하게 될 이윤우 부회장과 이순동 사장. 이 두 사람이 걸어온 길과 향후 전망을 통해 삼성의 앞날을 가늠해본다.
이윤우 투자조정위원장(부회장)과 이순동 브랜드관리위원장(사장)은 각기 ‘엔지니어’와 ‘홍보맨’이라는 다른 전문분야에서 엘리트코스를 거쳤다. 1946년 경북 월성 출생인 이 부회장은 경북고-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1968년 삼성전관에 입사해 삼성과 첫 인연을 맺는다. 1977년 삼성전자로 옮긴 뒤 반도체 라인에 몸담기 시작해 반도체총괄 상무와 전무, 메모리사업총괄 부사장을 거쳐 1994년 반도체총괄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승진했고 1996년부터 2003년까지 반도체총괄 사장으로 삼성 반도체 신화를 이끌었다. 대중에게 친숙한 진대제 전 정통부장관(1985년 삼성전자 입사,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 역임)이나 ‘황의 법칙’으로 유명한 황창규 현 기술총괄 사장(1989년 삼성전자 입사, 반도체총괄 겸 메모리사업부 사장 역임) 모두 이 부회장이 반도체 실무라인을 휘젓고 다닐 때 부하직원으로 영입한 인사들이다.
이윤우 부회장이 정통 삼성맨인 반면 이순동 사장은 중앙일보 기자 출신이다. 1947년 경기 수원 출생인 이 사장은 8년여의 기자생활을 접고 지난 1981년 삼성전자 홍보팀 과장으로 입사했다. 이 사장은 이건희 전 회장이 총수직에 오른 1987년 삼성전자 홍보실장이 된다. 1991년 전략기획실의 전신인 삼성 회장 비서실 홍보팀 이사가 된 후 승진을 거쳐 1999년 삼성 구조조정본부(구조본) 기획홍보팀장(전무)직에 오른다. 2001년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2006년까지 삼성 컨트롤타워가 비서실→구조본→전략기획실로 개편되는 동안 그룹 홍보의 간판으로 자리매김해왔다.
두 사람에겐 삼성 고위임원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해외유학 경험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술을 보유하기까지 진대제 전 장관이나 황창규 사장 같은 해외파들의 역할이 컸던 것이 사실. 그러나 이들은 회고를 통해 자신들이 활약할 수 있는 토대를 건설한 주인공으로 이윤우 부회장을 꼽는다. 이병철 선대회장이 1983년 이른바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사업 본격진출을 선언하고 1985년 기흥 공장을 건설하면서부터 반도체 사업의 기초 골격 구성은 이 부회장 몫이었다. 해외 학위 하나 없음에도 그는 미국의 IBM이나 델 같은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이 인정하는 경영자로 우뚝 서게 된다.
한편 연세대 졸업 이후 이순동 사장은 기자 생활을 거치느라 공채가 아닌 특채로 삼성에 늦깎이 입사했지만 삼성은 물론 국내 대기업 홍보분야의 개척자로 평가받게 된다. 특히 1999년 삼성그룹 홍보팀장 취임 이후 전국경제인엽합회(전경련) 경제홍보협의회 회장, 한국PR협회장, R-홍회(ROTC 홍보인 모임) 고문을 맡아오면서 홍보분야의 입지를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게 재계의 평이다. 이 사장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대기업 내 변방으로 여겨지던 홍보업무의 위상 또한 격상되기 시작해 2000년대에 접어들어선 ‘홍보맨 전성시대’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자기 분야에서 지워지지 않을 큰 획을 그린 두 사람이지만 이건희 전 회장이 물러난 그룹의 안위를 책임지게 될 투자조정위원장과 브랜드관리위원장직에 오른 점이 다소 의외라는 평도 있다. 이들이 한동안 실세 라인에서 밀려나 있던 탓이다. 이윤우 부회장은 지난 2004년 반도체총괄 사장직에서 대외협력담당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한다. 그룹 내에서 몇 안 되는 부회장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엔지니어로 잔뼈가 굵은 이 부회장이 대외협력 분야로 가는 모습은 그룹 주력인 반도체 실무에서 밀려난 것으로 비치기도 했다.
그가 반도체 현장을 한창 누빌 때인 1989년 영입된 황창규 현 기술총괄 사장이 이 부회장에 이어 2004년 반도체총괄 겸 메모리사업부 사장직을 꿰차면서 이 부회장은 한때 ‘뒷방지기’로 묘사되기도 했다. 윤종용 전 부회장의 삼성전자 최고경영자 장기집권 때문에 이 부회장이 가진 능력에 비해 빛을 보지 못한다는 지적도 따랐다.
이순동 사장은 지난해 정기인사에서 6년간의 부사장 직함을 떼고 ‘사장’이 됐다. 몇 해 전부터 승진설 속에도 사장 직함을 달지 못하다가 결국 신임 사장 명부에 올랐으니 ‘감개무량’으로 비쳤을 법했다. 그러나 기획홍보팀장 자리를 장충기 부사장에게 내주면서 사실상 결재라인에서 밀려나게 됐다. 삼성의 막강 홍보라인 수장에서 책상물림으로 격하됐다는 다소 과장된 평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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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기업 홍보 분야를 한 단계 격상시킨 이순동 브랜드관리위원장. 연합뉴스 | ||
이순동 사장의 화려한 롤백도 삼성 특검 여파로 이학수 부회장의 2선 후퇴가 가시화되면서 어느 정도 예견된 부분이었다. 이학수 부회장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그룹 브랜드 관리 분야에서 이 부회장을 배제하고 나니 대체 카드로 지난 27년간 홍보업무에 투신해온 이순동 사장만 한 인사가 없었던 셈이다.
두 사람은 삼성의 출세코스로 여겨져 온 이학수 부회장 인맥으로 묶기 어렵다는 평을 받아왔다. 이윤우 부회장은 일찍부터 ‘포스트 윤종용’ 후보로 불렸다. 삼성전자맨인 윤종용 전 부회장과 비서실 재무라인에서 잔뼈가 굵은 이학수 부회장 사이에 퍼진 알력설은 업계 인사들 사이에서 늘 화젯거리였다.
이순동 사장은 비서실·구조본·전략기획실에서 줄곧 이학수 부회장을 보좌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정기인사를 통해 일각에서 이 부회장 세력과의 갈등설이 불거지면서 그를 ‘이학수 사단’ 일원으로 보는 시선 또한 수그러들게 됐다.
투자조정위원회와 브랜드관리위원회는 사장단으로 구성된 6~7명 정규멤버 외에 전략기획실 출신 임원과 중간간부들이 몇 명 더 배치돼 계열사 업무 파악과 정보 취합 등에 나설 태세다. 이 때문에 100명 규모의 전략기획실이 각각 10명을 약간 웃도는 두 개의 위원회로 축소·개편됐다고도 풀이된다.
상위조직으로 사장단협의회가 있으나 실질적 권한을 두 위원회가 쥘 것으로 볼 때 과연 어느 조직이 그룹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내게 될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업계에선 일단 직급에서도 앞서는 이윤우 부회장의 투자조정위원회가 우위를 점할 것으로 본다. 투자조정위원회 멤버들은 삼성 주력 계열사의 간판급 경영자들이다. 이건희 전 회장 리더십 공백을 메우는 동시에 신수종사업 개발의 주도권을 쥘 것으로 점쳐지는 것이다.
이윤우 부회장은 비서실·구조본·전략기획실 같은 이 전 회장 친위조직에 발을 담근 적은 없다. 그러나 삼성전자 맨 밑바닥부터 밟고 올라오면서 직원들과 곧잘 삼겹살에 소주를 나누며 쌓아온 친화력은 이순동 사장을 압도하는 그만의 강점이다. 이건희 전 회장의 신뢰도 여전해 삼성전자에 사원증마저 반납한 이 전 회장의 ‘리모컨 경영’ 전령사가 될 것이란 평도 일각에서 나돈다.
다만 대부분의 경력을 반도체에만 쏟았다는 점이 약점으로 비치기도 한다. 기술총괄이나 대외협력담당 업무 경험이 있지만 정보통신과 디지털미디어 같은 주력분야 경험이 전무한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 전체 사업부문을 효과적으로 아우를 수 있을지 관심사다. 이 부회장이 자칫 흔들릴 경우에 대비해 ‘애니콜 신화’ 주역 이기태 대외협력 부회장이나 황창규 사장 같은 ‘또 다른 포스트 윤종용’ 후보들이 버티고 있는 점도 관전거리다.
이순동 사장은 친위세력이랄 수 있는 전략기획실 홍보 인력 대부분이 각 계열사로 원대복귀한 터라 당장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이건희 전 회장의 아들 이재용 전무의 화려한 롤백을 위해 이 사장 역할이 절대적일 것이란 평가에도 귀 기울여진다. 이 전무는 이미 그룹 지배에 필요한 삼성에버랜드 지분 25.10%를 확보해 차기 총수직에 오르는 데 걸림돌이 없다. 다만 삼성 특검 수사 이후 이 전무가 당분간 해외근무를 통한 백의종군을 선언한 터라 삼성전자 복귀, 나아가서 차기 그룹 회장직에 오르기 위한 명분 축적을 필요로 한다. 이 과정에서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대이적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사장의 행보가 주목받는다. 이 전무가 삼성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있다는 점을 얼마나 부각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이 전무의 총수직 승계 속도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룹 내 2인자로 불릴 만큼 위세가 높던 이학수 전 부회장 세력이 이재용 전무로의 안정적 승계에 걸림돌이 될 것이란 평도 있었다. 따라서 이 전 부회장 세력과 알력설을 낳기도 한 이순동 사장과 브랜드관리위원회가 조직 내에서 이 전 부회장 향수 지우기 작업에 나설 가능성도 주목을 받는다.
이윤우 부회장은 과거 한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는 (서구와 일본에 비해) 의사결정이 빠른 총수중심 경영의 장점을 갖고 있다. 이것이 1등의 요인”이라 밝힌 적이 있다. 이순동 사장은 IMF 외환위기 때를 떠올려 “그때의 구조조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삼성전자는 많은 전자회사 중 하나로 남았을 것”이라며 이 전 회장의 결단력을 치켜세워 왔다. 이건희 전 회장의 총수 체제를 신봉했던 두 사람이 이 전 회장이 자리를 비운 삼성호(號)의 순항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