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미소 뒤로 매의 발톱 보인다
▲ 과반이 넘는 득표율로 당권을 장악한 정세균 신임 민주당 대표. 그의 강점으로 꼽히는 화합형 리더십은 ‘관리형’ 지도자라는 한계로 꼽히기도 한다. 국회사진기자단 | ||
정 대표는 취임 후 첫 당직 인선에서 계파·지역 안배를 기조로 한 탕평인사를 단행했다. 자신의 장점인 화합형 리더십을 십분 활용해 흐트러진 당 기강을 확립하고 대안정당으로 거듭나겠다는 강한 의지가 투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정 대표의 의지대로 ‘정세균호’가 순항할지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계파 갈등이 잠복해 있고 81석의 중소 야당으로서 거대 여당을 상대해야 하는 현실도 버겁기만 하다. 위기 때마다 당을 추슬러 온 정 대표가 또다시 정치적 실험무대에 서 있는 형국이다. 향후 2년간의 항해술에 따라 더 큰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더없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고, 아니면 ‘관리형’ 대표라는 한계에 봉착해 큰 꿈을 스스로 접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제1야당 대표로 등극한 이후 차기 대권주자로까지 거론되는 정 대표의 인생 스토리와 정치 역정을 되짚어 봤다.
“당을 운영하는 방법부터 확 바꾸겠다.”
정 대표가 취임 일성으로 던진 말이다. 지난해 대선과 4·9 총선, 그리고 7·6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곪을 대로 곪은 계파갈등을 치유하지 않고서는 대안 야당으로 거듭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정 대표가 지명직 최고위원에 영남과 여성 인사를 우선 배려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동시에 첫 당직 인선 과정에서 탕평인사를 단행한 것도 이러한 현실 인식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정 대표는 7월 8일 당 사무총장에 4선의 이미경 의원, 정책위의장에 3선의 박병석 의원을 각각 임명했다. 또 대변인에는 재선의 최재성 의원과 초선인 김유정 의원을 공동 기용했고 대표 비서실장에는 재선인 강기정 의원을 발탁했다. 당의 싱크탱크 역할을 맡고 있는 한반도전략연구원장에는 김부겸 의원이 내정됐다.
과거 열린우리당 시절 무계파로 분류됐던 인사들과 386그룹이 전면에 배치되면서 당내 역학구도에도 대대적인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정 대표 자신을 포함한 원혜영 원내대표, 이미경 사무총장, 박병석 정책위의장 등 당 4역 모두 소신파로 활동해 왔고 송영길·김진표 최고위원과 최재성 대변인, 강기정 비서실장, 조정식 원내 대변인 등도 무계파로 분류되고 있다. 바야흐로 정 대표를 정점으로 한 신주류 시대가 활짝 열리고 있는 형국이다.
신주류가 당내 최고 실세 그룹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상대적으로 정동영·김근태계는 사실상 와해된 게 아니냐는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양 계파의 대표 격으로 최고위원에 출마한 문학진 의원이 낙선했고 주요 당직자 인선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손학규계는 전대 과정에서 정 대표를 지원한 바 있어 손 전 대표가 정치 2선으로 물러난 이상 정 대표를 중심으로 세력화를 모색할 것으로 관측된다.
구 민주당계는 김민석·박주선 최고위원을 배출했다. 초선인 김유정 의원이 대변인에 발탁됐고 김효석·최인기 의원 등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어 구 민주계는 여전히 당내 실세 그룹으로 입지를 구축할 것으로 보인다. 친노(친 노무현 전 대통령) 그룹의 경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안희정 씨가 최고위원에 당선되면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이처럼 정 대표 체제가 출범했지만 민주당 내에는 여전히 다양한 계파가 존속하고 있어 앞으로도 치열한 당권암투를 예고하고 있다. 정 대표가 취임 일성으로 ‘통합’과 ‘소통’을 외쳤던 것도 계파 갈등이 여전히 최대현안임을 반증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당 안팎에선 정 대표가 흐트러진 당 기강을 다잡고 거대 여당을 상대로 대여 관계를 원만하게 재정립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당 내부적으로는 화합형 리더십으로 계파 갈등과 분열을 잠재우고, 대여 전선에서는 소신과 뚝심을 지키며 ‘승부사’ 기질을 발휘해 위기 때마다 당을 구출하는 역할을 맡아왔기 때문이다.
정 대표가 2005년 10·26 재선거 패배 이후 3개월간 임시 당 의장과 원내대표를 겸임하던 시절 당시 대표적 개혁입법인 사립학교법 개정안 통과를 진두지휘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사학법 통과를 기점으로 당시 위기에 처했던 열린우리당은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반면 한나라당은 사학법 후폭풍에 휩싸여 강재섭 원내대표가 낙마하는 내분을 겪기도 했다.
정치권 주변에선 정 대표의 인생 역정과 색다른 정치 입문기가 회자되고 있다. 전북 장수 출신인 정 대표는 고등학교를 세 군데나 옮겨 다닌 후 군부독재가 유신으로 치닫던 71년 고려대에 합격하면서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하게 된다. 대학시절 법학도였지만 고대 신문사 일에 열정을 가지고 참여했고 유신체제가 본격화되던 시기에 고려대 총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다.
정 대표는 대학졸업 후 첫 직장으로 쌍용그룹을 선택한다. 그룹 계열사인 쌍용종합상사에 입사한 그는 시멘트 영업을 시작으로 기계부품, 신발 등 소위 ‘라면에서 미사일까지’라는 국제영업의 최일선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미국지사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하는 동안 선진 정치·경제의 현장을 체득하는 좋은 기회를 갖기도 했다.
18년간의 실물경제를 현장에서 직접 체험한 정 대표는 1995년 마흔다섯이란 다소 늦은 나이에 민주당 지구당위원장을 맡으면서 정치권에 입문하게 된다. 96년 4월 제15대 총선 때 고향(전북 무주·진안·장수)에서 출마해 상대후보를 40%라는 큰 표 차로 따돌리면서 금배지를 단 정 대표는 이후 16·17대 총선에서도 무난히 당선돼 3선 중진 반열에 오른다.
외유내강형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정 대표는 정계 입문 이후 구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정책위 의장, 국회 예결특위위원장을 거치면서 정책통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특히 2005년 1월 당시 집권당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시절에는 국가보안법 등 이른바 ‘4대 개혁입법’ 처리 실패로 흐트러진 당의 전열을 재정비하면서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는 당시 행정도시특별법, 과거사법, 사학법 등을 차례로 통과시키는 데 기여했고 같은 해 10·26 재보선 참패 이후에는 임시 당 의장직을 겸하면서 당내 갈등을 수습하고 정국현안을 대과 없이 처리하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2006년 1월 산업자원부 장관에 임명된 이후 ‘1·2 개각 파문’에 휩쓸려 잠시 당내 위상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그는 11개월의 장관 재임 기간 동안 수출 3000억 달러 시대를 열어 ‘3000억 달러의 사나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정 대표가 특유의 ‘통합의 리더십’을 기치로 구원투수로 재등판한 것은 열린우리당이 분열로 치닫던 2007년 2월. 복잡한 당내 계파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2·14 전대에서 당 의장에 합의추대된 그는 같은 해 8월까지 열린우리당을 마지막까지 지켜내며 통합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지난 4·9 총선에서는 전북 진안·무주·장수·임실 지역에서 무난히 당선, 관록의 4선 의원이 됐다.
7·6 전대를 통해 제1야당 수장으로 등극한 정 대표가 향후 당내 계파갈등 봉합과 대여 관계 재정립이라는 당면 과제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정 대표는 또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도로 열린우리당’이라는 이미지를 탈색시키고 새로운 대안 야당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정책 노선과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과제도 안고 있다.
정 대표는 이번 전대를 계기로 차기 대권주자 반열에 올라섰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정동영·김근태계가 사실상 붕괴되고 있고 손 전 대표 또한 당분간 정치 휴지기를 보내야 하는 만큼 정 대표가 강력한 리더십으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할 경우 유리한 차기 대권고지를 선점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과연 정 대표가 자신에게 주어진 호기를 살려 차기 대권행 열차에 탑승할 수 있을지 아니면 ‘관리형’ 대표에 만족해야 할지 그의 항해술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