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일 지뢰밭’ 사이 운전 위태위태
▲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미국발 독도 표기 원상 회복 소식으로 여권에서는 문책론이 수그러들었지만 야권에서 강한 사퇴압력을 받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62)을 정점으로 한 외교안보라인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 성명 파문과 독도 문제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정치권으로부터 문책론과 함께 강한 사퇴 압력에 직면한 바 있다. 하지만 미국 지명위원회(BGN)가 부시 미 대통령의 지시로 7월 31일 ‘독도 표기’를 원상회복함에 따라 독도 사태는 급속하게 봉합 모드로 접어들었고 여권 내부에서는 외교안보라인에 대한 문책론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형국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문책 불가론’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분위기다. 쇠고기 파동으로 한 차례 사퇴 위기에 직면했던 유 장관 입장에서는 또 한 번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는 급박한 닷새를 보낸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단계는 결코 아니다. 급한 불은 껐지만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고 야권은 잇따른 외교 실정에 따른 책임론을 부각시키며 여전히 외교안보라인 전면 쇄신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발 독도 사태는 진화되고 있지만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어 언제 난파할지 모르는 험난한 항해가 예상되고 있는 유 장관의 파란만장한 35년 외길 외교 인생을 되짚어 봤다.
유명환 장관은 35년째 직업외교관 길을 걷고 있는 정통파 외교관리다. 서울 출신으로 서울고-서울법대를 졸업한 유 장관은 73년 제7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이후 줄곧 외길 외교 인생을 걸어왔다. 30여 년 외교관 생활 중 15년 가까이 대미 외교에 종사한 이력 때문에 외교부 내에서도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통하기도 한다. 2001년 12월 대테러 및 아프가니스탄 문제 담당 대사와 2002년 3월 주이스라엘 대사를 지낸 바 있어 중동 지역 문제에도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 정부 때 북미국장을 지낸 바 있고 DJ(김대중 전 대통령) 정부 때도 주미 대사관 정무공사를 역임했다. YS DJ 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국 외교가 ‘홀대’를 받았던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한·미동맹을 강조하는 등 ‘친미’ 정책 지론을 굳히지 않아 당시 집권당이었던 열린우리당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유 장관은 2006년 10월 외무고시 3회인 반기문 당시 외교부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되면서 공석이 된 차기 장관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결국 외시 후배인 송민순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정책실장(외시 9회)에게 밀리고 말았다. 그 배경에는 참여정부의 대미정책과 배치되는 그의 친미 성향이 부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없지 않았다.
유 장관은 35년 외길을 걸어온 외교관답지 않게 정치적 판단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친화력과 통솔력을 겸비했다는 장점과 함께 권력에 약하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상존하고 있는 것도 그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실제로 유 장관은 전두환 정부 시절에 대통령비서실 파견 근무(85년)를 시작으로 YS 정부 때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비서관(95년), DJ 정부 당시 한승수 외교부 장관 특별보좌관(2001년), 노무현 정부 시절 외교부 2, 1 차관을 차례로 역임하는 등 정치권력에 근접한 외교관리 생활을 경험한 바 있다.
장관 경합에서 후배인 송민순 전 장관에 밀려난 이후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던 그가 ‘일본 경력’이라곤 3등 서기관 경험이 전부였던 주일본 대사에 발탁(2007년 3월)돼 절치부심한 끝에 이명박 정부 초대 외교부 장관에 등극한 배경에도 그의 탁월한 정치력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란 시각이 적지 않다.
유 장관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외교통일부 장관과 국정원장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등 주가가 껑충 뛰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특별한 인연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유 장관의 주가 급등에 정치권은 의혹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강부자’ ‘고소영’ ‘S라인’ ‘형님내각’ 등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명박 정부 첫 개각을 둘러싼 각종 구설수에 유 장관도 예외 없이 휘말렸다. 정가 일각에서 유 장관을 비롯해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 등의 입각 배경에 현 정부 최고 실세로 통하는 이상득 의원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란 이른바 ‘형님 내각’ 논란이 불거졌던 것이다.
유·강·정 장관은 이 의원이 신한국당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던 시절(96년) 각각 외교부 북미국장, 재경부 차관, 건교부 기획관리실장으로 당시 당정협의에 참석했던 인연이 계기가 돼 이 의원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유 장관은 주일대사 시절인 지난 1월 이명박 대통령당선인 ‘4강 특사단’ 중 대일 특사단 단장으로 파견된 이 의원을 도와 고무라 일본 외상 등 일본 측 고위인사들과의 폭넓은 면담을 주선하는 등 적극적으로 가교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오른쪽)이 7월 31일 청와대에서 열린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에 참석해 회의 시작에 앞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유 장관은 외교부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올랐지만 그의 앞길은 가시밭 그 자체였다. ‘쇠고기 파문’으로 책임론에 시달리면서 한 차례 사퇴 위기를 넘는가 싶었는데 아세안지역포럼(ARF) 의장 성명 파동과 미국 지명위원회(BGN)의 ‘독도 분쟁지역화’ 등 총체적인 외교 난맥상이 드러나면서 외교안보라인 문책론과 맞물려 또다시 강한 사퇴 압박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BGN이 7월 31일 ‘독도 표기’를 원상회복함에 따라 미국발 독도사태는 봉합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고 여권 내부의 문책론 주장도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 대통령이 ‘문책 불가’ 입장을 시사하자 한동안 문책론에 무게를 뒀던 한나라당 지도부도 꼬리를 내리고 있는 분위기다.
실제로 이 대통령의 입장 표명 이전까지 유 장관을 비롯한 외교안보라인의 문책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해 온 한나라당 일부 지도부는 7월 31일 이후 백팔십도 바뀐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 장관의 자진 사퇴까지 촉구하면서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했던 공성진 최고위원은 “MB 외교의 승리”라며 유 장관을 비롯한 외교팀을 극찬하고 나섰다. 전날(30일)까지 “문책할 일이 있으면 즉시 문책하는 게 맞다”고 주장해온 홍준표 원내대표도 문책론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미국발 ‘희소식’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흐트러진 내부 전열을 추스르는 쪽에 방점을 찍으면서 위기상황에 몰렸던 유 장관과 외교안보라인에 대한 문책론은 수면 아래로 급격히 가라앉고 있는 분위기다.
하지만 민주당 등 야권은 외교안보라인의 총체적 무능이 미국의 ‘독도 표기’ 원상회복 조치로 희석될 수 없다면서 근본적인 대책마련과 함께 문책론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7월 31일 국회에서 열린 고위정책회의에서 “외교안보라인은 독도 문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문제, 한·미 쇠고기 협상,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 등 현 정부 들어 큰 실책을 많이 범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며 문책 필요성을 강조했고, 원혜영 원내대표도 “국민들이 외교안보라인 시스템을 믿지 못하고 교체를 바란다는 것을 묵살해서는 안 된다”며 전면적인 쇄신론을 요구했다. 박선영 선진당 대변인은 “미국의 조치가 외교안보라인의 치명적 결함을 치유할 만한 사건이 될 수는 없다”며 문책론을 압박하고 있다.
특히 유 장관의 경우 현 정부 출범 이후 외교안보정책을 실질적으로 총괄해 왔다는 점에서 문책론 중심에 서 있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는 유 장관을 의장으로 하는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를 설치·운영하면서 외교부에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조율기관 역할을 맡겼다. 국가안전보장회의 법 개정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헌법기구로만 존치되고 관련 부처 장관급으로 구성된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가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하게 된 것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통일부 장관이 NSC 상임위원장을 맡아 대북정책을 조율했던 반면 현 정부는 대북정책의 무게중심을 외교부로 이동시킨 셈이다. 이는 남북관계를 외교문제 내지는 국제문제로 접근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방향이 투영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따라서 유 장관이 비단 이번 독도사태뿐만 아니라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과 ARF 성명 파동 등 잇따른 외교 실정이 남북관계 경색에서 비롯됐다는 책임론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란 관측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미국산 쇠고기 문제, 일본과의 끝나지 않은 독도 전쟁, 꽁꽁 얼어붙은 남북관계 등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작금의 어려운 외교 현실을 감안하면 언제라도 제2, 제3의 외교 분쟁 내지는 북한발 대형 사고가 터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유 장관으로서는 자신에 대한 문책론에 불을 붙일 만한 뇌관이 아직 여럿 남아 있는 셈이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