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안철수’ 또는 ‘반기문·안철수’ 먼저 연대한 뒤 나머지 세력 흡수
‘중간지대 정계개편’은 원심력을 밑바탕에 깐 ‘공존의 미학’이다. 원조 제3 지대론자인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전략적 연대를 하는 A안부터, 여권 후보로 분류되는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이 가세하는 역단일화의 B안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정의화 전 국회의장과 이재오 전 새누리당 의원 등도 중간지대 탑승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중간지대 정계개편’이 고차방정식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대위대표가 9월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나라 살리는 헌법개정 국민주권회의 출범식 및 토론회에 참석헤 기조 강연을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중간지대 정계개편의 명분은 ‘개헌’을 통한 87년 체제 종식이다. 이를 매개로 이질적 세력 간 이합집산 꾀하기가 중간지대 정계개편의 핵심이다. 질서 정연한 현 구도를 단숨에 흔드는 ‘정계개편 쿠데타’다. 속내는 전략적 연대를 통한 권력분점, 즉 ‘지분 나누기’다. ‘여의도 원심력 활용→이질적 세력 간 헤쳐 모여→지분 나눠 먹기’ 등 최소 3단계 중 한 곳에서라도 스텝이 꼬이면 ‘중간지대 정계개편’은 한낱 신기루로 전락한다. 사실상 ‘모 아니면 도’의 리스크 큰 도박판인 셈이다.
포탄은 장전됐다. 누군가 총알만 당기면 된다. 현 상황은 좋지 않다. ‘최순실 게이트’가 블랙홀로 작용하면서 정국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 국면에 빠졌기 때문이다. 다만 청와대 전면 개각 및 거국내각 구성 등 정국 향방에 따라 정계개편이 다이너마이트급 이슈로 부상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정국이 시계 제로에 빠지면 빠질수록 정계개편 ‘회오리의 원심력’도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중간지대 정계개편’의 A안과 B안이 ‘단계별 교집합’을 형성한 점이다. 손·안·김(손학규·안철수·김종인) 연대, 반·안(반기문·안철수), 반·안·손(반기문·안철수·손학규) 연대 등이 선 조합을 꾀한 뒤 나머지를 흡수할 수도 있고 어느 선까지만 연대한 채 그칠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킹메이커’ 김 전 대표의 움직임이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각 주자들이 김 전 대표와 손을 잡은 뒤 나머지를 벼랑 끝으로 모는 ‘압박 전술’을 구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관전 포인트는 중간지대 정계개편의 폭발력을 배가시키는 촉매제 찾기다. 일단 개헌 연대의 시발점은 플랜 A로 기울었다. 플랜 B는 반 총장이 귀국하는 내년 초에나 가동될 수 있다. 제7공화국 개헌을 고리로 제3 지대로 치고 나간 손 전 대표가 김 전 대표와 공존 체제를 형성한 뒤 안 전 대표를 포위하는 포지션이 이 시나리오의 핵심이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제3 지대 정계개편의 가장 큰 볼륨을 형성할 수 있는 조합은 ‘손·안’ 연대”라고 잘라 말했다.
손 전 고문은 정계 복귀와 함께 출간한 <나의 목민심서, 강진일기> 마무리 부분에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며 “우리 둘이 힘을 합쳐 10년 이상 갈 수 있는 정권 교체를 하자”고 제안했다고 전했다. 안 전 대표에게 강한 러브콜을 보낸 셈이다.
다만 손 전 대표는 국민의당에 입당할 뜻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 전 대표와 함께 탈당한 이찬열 무소속 의원은 “‘손학규 제3 지대’에 안 전 대표가 합류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간지대에서 국민의당과의 경쟁을 벌이겠다는 의중을 내비친 것이다. 국민의당 관계자도 “우리는 러브콜을 보내는데, 저쪽에서 반응이 없다”고 전했다.
이 경우 손 전 고문은 ‘김종인·정의화’로 이어지는 개헌파를 형성, 안 전 대표와 중간지대에서 경쟁을 펼칠 수 있는 세력 키우기에 나설 것으로 점쳐진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와의 일전을 위한 ‘1차 정계개편’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한 개헌 지대 만들기에 착수하는 셈이다. 손 전 대표는 ‘최순실 게이트’ 정국에서도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개헌 논의에서 손을 떼야 한다”며 개헌 불씨 살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김 전 대표 움직임은 더욱 구체적이다. 개헌을 고리로 한 ‘비패권지대’ 구상을 천명한 그는 손 전 대표가 복귀하기 전 직접 만나 정계개편 의사를 교환한 데 이어 최근에는 국민의당 천정배 전 공동대표와 김한길 전 의원 등을 만나 개헌과 관련한 정계개편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대표는 손 전 대표가 정계 복귀 기자회견을 한 10월 20일 “우리 현실 문제를 타결하는 데 기여하는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고 밝힌 바 있다. 김 전 대표의 행보에 따라 개헌 중간지대 주도권 확보를 위한 수 싸움의 판도도 달라질 전망이다.
안 전 대표 의중도 변수다. 독자완주에 방점을 찍은 안 전 대표는 당분간 4차 산업혁명 등 민생행보에 나설 방침이지만, 당내 구민주당 호남파 의원의 견제가 만만치 않아 결국 어떤 식으로든 제3 지대 정계개편에 뛰어들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유성엽 국민의당 의원은 안 전 대표를 향해 “(대선 후보라는 말은) 다 한가한 소리로 성급한 표현”이라고 잘라 말했다.
‘손·안’ 연대가 현실화된다면 이원집정부제(분권형 개헌)를 고리로 한 정계개편이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권 내 실세인 친박계 내부에서도 ‘대통령 반기문·실권 총리 친박’ 시나리오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원집정부제 논의가 힘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민주당 친문(친문재인)계 좌장인 문 전 대표를 제외한 제 세력이 정계개편에 가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최순실 게이트’로 여권 원심력이 폭발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새누리당 비박(비박근혜)계 일부가 이 지대에 참여할 수도 있다. 레임덕에 가속페달을 밟은 박 대통령의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즉시, 비박계 일부 세력의 이탈이 불가피해서다. 이 국면에서 최대 난관은 내치와 외치를 나눠 갖는 ‘지분 나누기’가 될 전망이다.
반·안(반기문·안철수) 혹은 반·안·손(반기문·안철수·손학규) 연대 등도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역단일화’로 불리는 중간지대 정계개편 B안은 ‘임기 단축’을 통한 세력 구축 등의 비밀코드가 숨어있다.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반 총장도 마냥 친박계 꽃가마를 탈 수만은 없다. ‘반기문식 제3의 길’을 통해 세를 규합한 뒤 안철수·손학규 전 대표 등과 개헌을 매개로 연대 수순을 밟을 수 있다는 게 이 시나리오의 골자다.
야권 전략가인 민병두 민주당 의원은 “(차기 대통령 임기를 2020년 5월까지로 단축하면) 친박계가 추진하는 2년 3개월 사이에 두 차례의 대선을 치르는 이 안은 여러 세력을 묶는 역단일화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반 총장이 친박계 무등에 타지 않는다면, 새누리당은 당명 개정을 포함해 시스템 전반을 바꾸는 창조적 파괴가 불가피하다. 향후 이 세력이 새누리당과 합당할 경우 자연스럽게 정권 재창출 급행열차에 탑승하게 된다. 이원집정부제뿐 아니라 내각제 등을 통해서도 실권을 장악할 수 있다.
‘영원한 킹메이커’인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10월 25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가진 안 전 대표와의 회동에서 반 총장에 대해 “귀국하더라도 생각하는 대로 가기는 어려울 수 있다”며 “반 총장이 새누리당으로 가서 (대통령이) 되겠냐”고 말했다. 반 총장의 제3 지대론에 힘을 싣는 대목이다. 다만 JP는 반·안 연대에 대해선 “그분이고 저분이고 어렵다”고 밝혔다.
어느 쪽도 힘을 실어주지 않기 위한 ‘존재감 높이기’ 차원인지, 안 전 대표를 띄워주기 위한 덕담성 발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치권의 새판 짜기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향후 또 하나의 정국 변수가 될 전망이다. 안 전 대표는 회동 후 “(김 전 총리가) 이런 시국에 희망을 걸 곳은 국민의당이라고 하셨다”고 귀띔했다. JP는 비공개 회동에서 안 전 대표를 ‘안 선생‘이라고 부르며 친밀감을 나타냈다고 한다.
반면 제3 지대 정계개편이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것이란 전망도 만만치 않다. 차재원 부산 가톨릭대학교 교수는 “손 전 대표의 개헌론, 김 전 대표의 비패권지대 등은 최종 지향점이 다르다”며 “이들보다 파괴력 높은 안 전 대표 등은 개헌에 부정적이지 않나. 개헌을 바탕으로 한 정계개편이 현실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한 당직자도 “각 주자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풀 구심력이 없다”며 “용두사미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키는 개헌론에 불을 지핀 손 전 대표와 개헌행보에 시동을 건 김 전 대표의 선 단일화 여부에 달렸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