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가자는 거냐구? 예정된 수순이야
▲ 노무현 전 대통령과 민주주의2.0 사이트. 사진은 합성. | ||
특히 노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의 각종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가 하면 ‘친정’이나 다름없는 민주당에 대해서도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정치 재개 논란을 넘어 어느덧 노 전 대통령이 여야를 망라한 정치권 논쟁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형국이다. 노 전 대통령은 또 10월 1일 퇴임 후 처음으로 서울 나들이가 잡혀 있는 등 정치 보폭을 넓혀갈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활동 재개와 맞물려 친노 진영도 심상치 않은 정치 행보를 보이고 있다. 민주주의2.0 사이트에 ‘노사모’ 등 친노 세력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고 참여정부와 친노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공식·비공식 모임도 활성화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 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친노 신당 창당설’이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퇴임 후 한동안 현실 정치 개입을 자제해 왔던 노 전 대통령이 또다시 피 말리는 정쟁 속으로 뛰어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 9단이라는 ‘3김’에 버금가는 정치력에 특유의 승부사 기질까지 갖춘 노 전 대통령의 숨겨진 복심 속으로 들어가 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재개는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친노와 가까운 재선인 K 의원이 던진 일성이다. 9월 24일 기자와 만난 K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부터 치밀하게 퇴임 후 정치 구상을 그려왔다”며 “민주주의2.0은 노 전 대통령이 구상하고 있는 ‘퇴임 프로젝트’를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하고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화된 정치구상이 단계별로 펼쳐질 것”이라고 전했다.
‘구체적인 퇴임 프로젝트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K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정치철학과 이념을 승계·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세력을 꿈꿔왔다”며 “과거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이끌었던 상도동·동교동계와 같은, 지역을 담보로 한 계보정치가 아닌 이념과 철학을 공유하는 정치세력의 출현이 절실한 만큼 그 역할을 하겠다는 게 퇴임 프로젝트의 핵심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K 의원은 또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에 여당은 물론 민주당도 자중지란에 빠지는 등 비판적 여론이 증폭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족쇄 때문에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역차별”이라며 “오히려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지적하고 올바른 정당문화 정착과 정치발전을 위해 국가를 경영해 본 풍부한 경륜과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훈수를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노 전 대통령이 이미 오래전부터 정치 재개를 위한 단계별 플랜을 물밑에서 가동해 왔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않고 있다. 보통 6개월 정도 보는 전·현 정부 간의 ‘허니문’ 기간을 감안해 그동안 정치 행보를 자제해 왔을 뿐 민주주의2.0 오픈을 신호탄으로 노 전 대통령의 정치 보폭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토론사이트 개설 전부터 정치 재개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진행해 왔다. 노 전 대통령은 8월 30일 퇴임 후 처음으로 봉하마을 인근에서 열린 민주당 당원대회에 참석해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정당이 되려면 전국정당이 돼야 한다”며 정치적 발언에 포문을 열었다. 9월 1일에는 노 전 대통령 재임시절 청와대 정책실장실이 작성한 ‘참여정부의 축약된 가치지향점 설정 검토 보고서’가 공개돼 여야 간 논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 문건은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상생’ 가치를 이어감으로써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 ‘상징 조작’을 통해 재임 시절의 평가를 미화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한 반면 민주당은 “정치 공세에 불과하다”고 일축한 바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9월 6일 자신의 핵심 측근인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장녀와 오랜 후원자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의 장남 간 결혼식에 직접 주례자로 나서기도 했다. 이날 결혼식에는 참여정부 핵심 인사들과 친노 그룹이 대거 참석해 친노 진영의 건재함을 알리는 대규모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
추석연휴 때 봉하마을을 찾은 최철국 민주당 의원에게는 “민주당에 뚜렷하게 부각되는 대선주자가 빨리 나타나지 않아 걱정”이라며 차기 대선정국을 겨냥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탄력 붙은 노 전 대통령의 발언 수위는 민주주의2.0 개설 이후 절정에 달하고 있다. ‘노공이산’이라는 필명으로 사이트 오픈 이후 20여 개의 글을 올린 노 전 대통령의 사이버 공격은 단숨에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다.
그는 사이트에 올린 글을 통해 미국발 금융위기, 신자유주의, 국민연금, 미디어렙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 현 정부의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가 하면 친정이나 다름없는 민주당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호남의 단결로는 영원히 집권당이나 다수당이 될 수 없고 호남이 단결하면 영남의 단결을 해체할 수 없다” “안방정치, 땅 짚고 헤엄치기를 바라는 호남의 선량들이, 호남표로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수도권 정치인들이 민주당을 망치고 있다” 등 민주당을 겨냥한 가시 돋친 비판도 서슴지 않았던 것.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자녀 결혼식에서 주례를 봐 관심을 끌었다. 연합뉴스 | ||
우군으로 생각했던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예상 밖의 카운터펀치를 얻어맞은 민주당은 자중지란에 빠졌다. 특히 동교동계 등 구 민주계는 격노하며 노 전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는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9월 24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 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배은망덕한 말”이라며 “사실 민주당을 망친 분은 노 전 대통령 아닌가”라고 분개했고, 구 민주계 출신인 박주선 최고위원도 “민주당이 호남사람들이 지지를 많이 한다고 해서 영남당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은 지지층에 대한 도리도 예의도 아니다”고 비판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초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 전 의원도 성명을 내고 “노 전 대통령의 호남 비하 발언은 자신을 지지했던 호남인들에 대한 용납될 수 없는 배신행위이자 지역주의를 증폭시키려는 망언”이라며 “국정 파탄과 민주세력 분열로 정권을 한나라당에 헌납했던 친노 세력이 호남을 희생양으로 정치복귀를 꾀하려는 술책이자 국민기만”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처럼 자신의 정치재개 움직임과 잇따른 정치적 발언이 정치권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킬 것을 예측했으면서도 노 전 대통령은 왜 여야를 망라한 정치권을 상대로 ‘사이버 전쟁’을 선포하고 나선 것일까.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전 대통령이 구상하고 있는 ‘퇴임 후 프로젝트’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K 의원이 주장한 것처럼 노 전 대통령과 친노 그룹은 오래전부터 참여정부의 정치이념과 철학을 승계·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세력화를 모색해 왔고 노 전 대통령의 일련의 정치 행보 또한 이러한 중장기적인 퇴임 구상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의 퇴임을 1년여 앞둔 지난 2006년 12월 당시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은 노 전 대통령의 퇴임 후 구상과 관련해 “노 대통령은 올해 환갑을 맞았다. 퇴임 이후 사저에만 있을 수 없지 않나”라고 말해 퇴임 후 현실 정치에 개입할 가능성을 열어논 바 있다.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갖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이 현 정부 정책뿐만 아니라 민주당을 상대로 직격탄을 날린 배경에도 퇴임 후 구상을 본격화하기 위한 사전포석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야성을 잃고 지지율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민주당의 현실을 꼬집으면서 지역과 계파 정당이 아닌 이념과 철학 중심의 새로운 정치세력 태동을 위한 선전포고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퇴임 프로젝트와 맞물려 친노 진영의 움직임도 한층 빨라지고 있다. 민주주의2.0 사이트 내에 연구모임 결성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전직 비서실장들이 주축이 된 재단법인 ‘봉하’와 강금원 회장 등이 만든 후원업체 (주)봉화 설립도 눈앞에 두고 있다. 친노 그룹 핵심 인사인 이해찬 전 총리, 김우식 전 비서실장,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은 각각 ‘광장’, ‘한국미래발전연구원’, ‘더 좋은 민주주의 연구소’ 등을 만들어 참여정부의 재평가 작업과 민주개혁 진영의 대안제시 작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친노 정치인들과 참여정부 핵심 참모 출신 50여 명은 가칭 ‘청정회’ 모임을 결성하고 친노 세력의 재결집을 시도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 범친노 진영을 모두 아우르는 ‘신당 창당설’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도 친노 진영의 이러한 정치세력화 움직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과 친노 진영의 퇴임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여야 정치권은 물론 일부 진보 진영에서조차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재개 행보에 비판적 시각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주의2.0과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외연 확대를 놓고 진보 진영 내부에서 적잖은 마찰과 갈등을 빚고 있다. 민주주의2.0 개설을 둘러싸고 <한겨레신문>과 일부 친노 진영이 치열한 논리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겨레신문>은 9월 20일자 ‘전직 대통령의 토론 웹사이트 개설 유감’이란 사설을 통해 “지금 시점에서 전직 대통령이 직접 토론사이트를 개설해 운영하는 건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한 논란을 확산시키며 정치적 반목과 대립만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참여정부 당시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는 다음날(21일) 한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아직도 정신 못 차린 한겨레사설 유감’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노 전 대통령이 사이트를 운영만 하는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것을 보니 이런 신문을 과연 정론지라고 할 수 있는지 심한 회의가 든다”고 반박했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를 놓고 찬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어 자칫 적전분열 양상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과연 노 전 대통령과 친노 진영이 추진하고 있는 ‘퇴임 후 프로젝트’가 어떤 식으로 그 본 모습을 드러낼지 승부사 노 전 대통령의 거침없는 정치 행보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