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서 남·북·미·중 정상들 모인다?
▲ 연초부터 정가에 나돌던 ‘평화협정 프로젝트’가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종전선언을 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상징적 장소로 휴전협정 장소였던 판문점이 꼽히고 있다. | ||
정부는 지난 8일 2차 남북정상회담 일정을 발표했다. 8월의 끄트머리인 28일부터 30일까지였다. “국내외 여건상 8월을 넘겨서는 성사되기 힘들 것”이라는 국내 북한 전문가들의 견해가 일단 적중한 셈이다.
대선정국에서 튀어나온 이 돌발변수에 범여권은 ‘환영’을 나타냈지만 한나라당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5년마다 반복되는 ‘북풍(北風)의 추억’ 때문이다. 주목해볼 것은 범여권이나 한나라당이나 모두 북풍이 8월의 일회성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가에서는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할 특급 태풍이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도 계속 몰아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소위 ‘10월 북풍설’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현 정부가 추진하려 한다는 ‘대북 프로젝트 시나리오’는 대선정국의 해인 2007년의 서막이 열리면서 정가 주변에서 구체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반도 휴전협정 당사국인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4개국이 한반도의 종전을 공동 선언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 한반도 냉전을 종식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 선행 조건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간의 2차 남북정상회담이 먼저 열릴 것이라는 게 시나리오의 내용이었다. 또한 이 같은 구상을 실현할 ‘디데이’로 6월 25일 또는 7월 27일을 잡고 있다는 설이 유력하게 흘러나왔다. 각각 한국전쟁 발발일이거나 휴전협정 체결일이라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일각에선 그 시기가 광복절인 8월 15일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지난 3월 초 기자는 한 정부 관계자로부터 주목할 만한 얘기를 전해 들었다. 북한문제 전문가인 A 박사가 정부의 통일 관련 부처 인사 몇몇과 함께 한 포럼 형식의 사적인 자리에서 “오는 6월 25일 남·북·미 3자 정상이 모여서 종전선언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다는 것. 이 관계자에 따르면 A 박사는 국정원의 연계 연구기관에 소속된 전문가이기 때문에 참여정부의 대북 정책에 비교적 밝은 인사라고 했다.
기자는 A 박사에게 전화로 발언의 진의를 물었다. 통화는 지난 3월 15일 이뤄졌다. 잠시 여기서 당시 통화 내용을 들여다보자.
─2주 전에 ‘6월 25일 남·북·미 3자 정상회담 가능성’ 발언을 했다는데.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학자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시나리오다.
─정부 고위 당국자와 공감대가 있는 내용인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학자든 행정가든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다.
─정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같은 2007년의 프로젝트를 준비했다는 얘기가 있다.
▲얼마나 오래전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아는 바로는 다만 작년 9월 14일 한미정상회담에서 언급된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 이후부터 이런 계획이 (청와대에서)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는 북핵 실험 등의 돌발적 변수가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인데.
▲그렇긴 하다. 하지만 프로젝트야 얼마든지 세울 수 있는 것 아닌가. 거기에 맞춰서 노력해 나가야 하는 것이고….
─프로젝트는 어떤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학계 등 자문기구에서 의견을 모아 정부에 올리는 것인가. 아니면 위에서 정해지면 거기에 맞는 여러 구체적인 사안들을 만드는 것인가.
▲후자의 경우다. 위에서 큰 바탕이 정해지면 우리들이 세부적인 내용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한다.
─종전선언 시나리오에 대해서 좀 더 소개를 한다면.
▲ 김정일 국방위원장. | ||
A 박사가 밝힌 시나리오대로라면 남북정상회담으로 먼저 북핵 문제 등을 논의한 뒤에 한미정상회담, 그리고 남북한과 미국 간의 3자 혹은 중국까지 포함한 4자 회담, 북미 관계 정상화 등으로 이어지는 일정이 나오는 셈이다. 지난 3월 당시에는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이 3자 혹은 4자 회담을 기준으로 올해 6월에서 8~9월 사이에 순차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전망됐다.
비슷한 시기인 지난 3월 4일 통일연구원은 ‘2·13 북핵 합의 이후 북한정세와 남북관계 전망’이라는 정세분석 보고서에서 ‘남북 모두가 관계 발전을 통한 실리 추구를 위해 결정적인 관계 발전의 추동력 회복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며 ‘오는 8월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통일연구원은 통일부와 연계된 국책연구기관이다.
참여정부의 공식적 대북 창구인 통일부 및 국정원과 연계된 두 연구기관에서 나온 이 같은 전망은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이번 2차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발표되자마자 그 이후 일정에 더욱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사전 시나리오 때문이다. 세종연구소의 정성장 연구위원은 “북핵 불능화의 속도 여하에 따라서 시기가 달라지겠지만 4자 회담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남북한은 물론 북한의 비핵화를 원하는 미국과 성공적인 베이징 올림픽 개최가 지상과제인 중국으로서도 한반도의 평화협정 선언은 실보다는 득이 많기 때문이다. 즉 4개국이 모두 ‘윈윈’하는 셈”이라고 전망했다.
정치권에서도 이 같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해찬 전 총리는 9일 열린우리당 관계자들에게 “빠르면 9월 초 APEC 정상회담에서의 한미 정상회담 직후에 평화협정을 위한 4자 정상회담이 이뤄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한나라당의 이규택 의원은 10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김정일 위원장이 10월 말에 제주도를 방문한다는 설이 있다”며 “8월 남북정상회담보다는 10월 답방이 훨씬 대선에 더 큰 영향을 줄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 의원이 밝힌 김정일 위원장의 ‘10월 답방’이 단순한 3차 남북정상회담 성격이 아니라 4자회담을 위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범여권의 한 관계자는 “8월 남북정상회담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 9월, 10월을 계속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며 “10월 혹은 11월 4자회담에서의 종전협정과 함께 평화체제 선언이 이어진다면 지난 80년대 말 동구권의 장벽이 무너진 이후 가장 역사적인 냉전 종식의 평화 무드가 동북아에 조성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A 박사는 9일 기자와 다시 가진 전화통화에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비핵화와 평화협정 선언이 핵심 주제가 될 것”이라며 “이 두 가지 문제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다면 그 다음 수순으로는 자연스럽게 남북한과 미국 그리고 북한과 미국의 대화가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정황 등을 놓고 볼때 참여정부의 일련의 움직임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시나리오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이에 대해서도 A 박사는 “정부가 어떤 성과를 위해 로드맵을 설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그런 계획이 없다는 것이 더 무원칙적이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또 정부가 설정한 사전 시나리오가 잘 맞아간다면 그것은 오히려 시대의 흐름을 잘 읽는 능력이 있다는 반증도 되는 셈이다. 한나라당으로서는 무작정 이 같은 흐름을 정략적이라고 비난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이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지나치게 경직된 대북자세를 보인 전략적 실책을 드러내는 것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한나라당이 고민하는 대목은 바로 이 부분에 있다. 8월 20일 경선으로 당내 후보가 확정되면 이후 야당의 바람을 일으켜나가야 하는데도 자칫 8월 남북정상회담과 그 이후 이어질 10월 평화협정 선언 등으로 인해 바람의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실제 범여권 관계자는 “한나라당 입장으로서는 찜찜하지만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는 노무현 정부나 북한에게 ‘정략적 이용’이라며 비난할 수 있겠지만 10월의 4자회담 추진 등으로 한반도 주변 동북아 정세가 평화무드로 넘어간다면 그때도 과연 한나라당이 미국을 향해 정략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비난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고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한나라당 모 후보캠프의 한 관계자는 “8월 정상회담이나 10월 평화협정설이나 모두 국내 대선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 몇 개월 사이에 한반도에 갑자기 획기적인 변화가 오리라고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우리 국민들의 수준이 그 같은 외풍에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성숙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과연 10월 북풍설은 그의 전망처럼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게 될까 아니면 거대한 태풍의 핵이 될까.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