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무게중심 설계, 안정감 있는 코너링…가슴 뛰는 ‘심장’ 우리에겐 왜 없을까
도요타 86의 저중심은 박서엔진 덕에 가능했다. 사진상으로도 엔진 커버가 서스펜션 위로 돌출되지 않는다.
엔진은 피스톤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직렬형 엔진(inline engine), V형 엔진(V engine), 그리고 박서엔진(boxer engine)이다. 직렬형 엔진은 실린더가 모두 수직으로 서 있는 형태로, 피스톤은 지면과 수직으로 왕복운동을 한다. V형 엔진에 빗대 ‘I형’ 엔진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흔히 타는 아반떼, 쏘나타 등이 직렬형 엔진이다. 작고 구조가 간단해서 배기량 2500cc 이하는 대부분 직렬형 엔진이다.
직렬형 엔진은 구조가 간단하고 제작비가 저렴해 저배기량 차량에 주로 적용된다.
V형 엔진은 피스톤의 방향이 양 갈래로 갈라져 V자 형태를 이루는 것이다. V형 엔진의 최대 장점은 엔진 사이즈의 축소다. 3000cc급 6기통 엔진을 직렬형으로 만든다면 길이가 상당하겠지만, V형으로 만들면 실린더를 양쪽으로 나누면 되므로 직렬형에 비해 절반 길이로 만들 수 있다. 올해 출시된 쉐보레 카마로SS의 8기통 엔진을 직렬형으로 만들려면 후드가 엄청 길어야 할 것이다. 4000cc를 넘어가는 대배기량 엔진은 어쩔 수 없이 V형으로 만들어야 한다.
V형 엔진은 엔진룸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3000cc급에서는 대개 V형을 택하지만, BMW처럼 직렬형을 고집하기도 한다. 3000cc급 직렬형 엔진을 만들려면 후드가 길어야 하고, 동일한 크기(전장)의 차라면 실내공간에서 손해를 본다. BMW5시리즈를 탔는데, 쏘나타보다 실내가 좁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직렬형을 고집하는 이유는 엔진 사운드를 튜닝하고 터보차저를 좌우에 쌍(雙)으로 장착(twin turbo)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6기통 직렬형 엔진은 실린더에서 나는 소리의 시간차가 있기 때문에 V형 12기통과 같은 리드미컬한 소리가 난다. 머플러를 튜닝하지 않은 차량의 운전석에서 들리는 소리는 흔히 폭발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흡배기 밸브가 엔진헤드와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다. 소리를 잘 들어보면 폭발음이 아니고 쇠가 부딪히는 소리임을 알아챌 수 있다.
즉 실내공간을 넓게 쓰는 실용적인 차는 고배기량에서 V형 엔진을, 실내공간은 손해보더라도 운전의 재미를 추가하는 차는 직렬형 엔진을 사용한다. 안타깝게도 국내 메이커에서 3000cc급 직렬형 엔진을 도입한 차량은 없다.
# 완벽한 저중심으로 코너링 탁월
마지막으로 소개할 박서엔진의 정식명칭은 ‘수평대향형 엔진(horizontal opposed engine)’이다. 4기통 박서엔진의 경우 좌우로 각 2개의 피스톤이 왕복운동을 하는데, 좌우측 중 한 쪽만 보면 마치 권투선수가 스트레이트 펀치를 연타하는 것처럼 보여 박서엔진이라고 한다.
수평대향형 엔진은 피스톤이 마치 권투선수의 스트레이트 펀치처럼 움직인다고 해서 ‘박서엔진’으로 불린다.
박서엔진의 가장 큰 특징은 저중심이다. 엔진은 초당 평균 25회(3000rpm인 경우)의 폭발이 일어나므로 두껍고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자동차 부품 중에서 엔진블록은 가장 무거운 부품이다. 직렬형 엔진은 엔진블록이 수직으로 서 있으므로 무게중심이 위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 성냥갑을 세로로 세운 것과 가로로 눕힌 것 중 어느 것이 더 안정적일지 생각해보라.
또 피스톤이 좌우로만 왕복운동을 하기 때문에 자동차의 상하 진동이 직렬형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적으며 좌우 피스톤이 정확히 180도 방향으로 대칭되므로 좌우 진동도 감쇄된다.
이렇게 좋은 박서엔진을 왜 모든 자동차 메이커가 도입하지 않는 것일까. 엔진오일 때문이다. 직렬형 또는 V형 엔진에서는 오일펌프가 실린더까지 밀어올린 엔진오일이 중력에 의해 내려와 오일팬에 다시 모인다. 그러나 박서엔진은 엔진오일을 회수하기 위한 별도 장치를 달아야 한다. 구조가 복잡해지고 비용이 상승한다. 따라서 독자 엔진을 개발하려는 메이커는 직렬형에서 시작하고, V형으로 발전한다. 박서엔진까지 굳이 개발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한다.
# 독일, 일본도 만드는데…
현재 박서엔진이 장착된 차량을 판매하는 곳은 일본 브랜드 스바루와 독일 브랜드 포르쉐, 그리고 BMW의 바이크 정도다. 스바루는 임프레자, 레거시 등 대부분 차종에 박서엔진을 장착한다. 도요타 86도 스바루의 엔진을 장착한 것이다. 스바루는 한국에서 브랜드, 디자인에 대한 낮은 선호도가 개선되지 않아 진출 3년 만인 2012년 철수했다.
포르쉐의 박서엔진도 유명하다. 포르쉐 911의 납작한 뒤태는 박서엔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만 스바루는 대중차로서 박서엔진을 접할 수 있는 것이 매력인 반면 포르쉐는 1억 원이 넘는 고급 스포츠카이므로 박서엔진이라는 매력이 묻히는 느낌이다. 1억 원이 넘으면 굳이 박서엔진이 아니더라도 뛰어난 파워트레인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BMW ‘R 나인 T’에 장착된 공랭식 박서엔진이 좌우로 돌출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박서엔진은 자동차가 아닌 바이크다. BMW 모토라드(BMW의 바이크 브랜드)의 R시리즈는 2기통 박서엔진으로 유명하다. 이 역시 박서엔진의 최대 장점인 저중심이 확실하므로 안정적인 주행과 코너링을 뽐낸다. 모토라드는 동일한 구조의 박서엔진에 다양한 프레임을 적용해 네이키드(R1200R, R 나인 T), 레플리카(R1200RS), 멀티 퍼포스(R1200GS), 투어러(R1200RT) 등 다양한 카테고리의 제품을 내놓고 있다.
특히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추구한 ‘R 나인 T’는 공랭식을 적용해 거친 엔진 사운드가 매력적이다. 공랭식은 온도 편차를 감안해 피스톤과 실린더의 간극에 여유를 둬야 해서 소음이 큰 편이다. 그러나 바이크는 이런 사운드를 즐기는 것이므로 오히려 할리 데이비슨처럼 공랭식이 환영받기도 한다. 포르쉐 또한 과거의 공랭식 박서엔진을 적용한 한정판 911을 출시한다면 마니아들로부터 환호를 받지 않을까.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아직도 한국 메이커들이 가슴을 뛰게 하는 제품을 만들 수 없는가 하는 점이다. 자동차 역사가 짧고,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넘은 것도 20년이 되지 않으므로 자동차 시장이 좁은 것도 원인일 것이다. 다만 어차피 안 팔릴 ‘아슬○’ 같은 차를 만들 바에는 가슴이 뛰는 스페셜 카를 만들 수는 없었는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우종국 자동차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