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칼은 칼집에 꽂지 않았다?
▲ 지난 20일 이명박 전 시장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자 경선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러 나가는 박근혜 전 대표. 뒤에 이명박 후보가 보인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하지만 전장은 치열했던 싸움만큼이나 많은 상처가 남아있는 상황이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당의 개혁을 예고한 것 역시 본선을 준비하기 위해 ‘집안 정리’를 새로이 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하지만 두 패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었던 양측이 진정으로 ‘화합’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아직은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경선결과에 깨끗이 승복한 박 전 대표는 한동안 ‘칩거’하면서 심신을 다스렸다. 과연 박 전 대표는 이번 대선에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경선에서 확인됐듯 ‘당심’에서는 우위에 있는 박 전 대표의 향후 행보에 따라 정국은 요동칠 수밖에 없다.
“경선을 계기로 한나라당은 새로운 대선국면을 맞이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경선에서 패자로 남게 됐지만 이명박 후보의 ‘대권’ 쟁취에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수도 있다. 박 전 대표의 선택에 따라 이 후보의 대권 장악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한 정치 분석가는 ‘이명박 승, 박근혜 패’로 막을 내린 한나라당 경선 이후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뿐이며, 이 전 시장의 갈 길이 결코 순탄치 않을 것임에 대해 정치권에서 이견을 다는 이는 많지 않다. 범여권 후보와의 본격적인 싸움에 앞서 박빙의 승부를 벌인 박 전 대표의 ‘협조’는 사활이 걸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후보가 당선 직후 “(당의) 색깔, 기능 면에서 모두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당 혁신을 강조하다 “우리가 혁명하자는 것인가. 잘못 알려진 것이며 어림도 없다”며 인적 쇄신 논란에 쐐기를 박은 것도 이런 맥락이다.
박 전 대표는 경선 후 자택에 칩거하며 향후 행보를 가다듬어왔다. 그러던 박 전 대표는 23일 밤 자신의 미니홈피 게시판에 “그저 한없이 미안하고, 어렵고 귀한 선택에 영광을 안겨 드리지 못한 제 자신이 스스로 용서가 되지 않고 죄스러울 뿐입니다”라는 내용의 경선 후 심경을 글로 남겼다. 이 글은 여러 가지 다양한 분석을 낳고 있다.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는 짙은 회한이 배어나오고 있으며 ‘죄스럽다’는 표현에서는 경선 결과에 승복한다는 의미가 깔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박 전 대표는 그동안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지며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구상을 가다듬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변에서는 ‘(대표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머리를 다듬고 공식 일정을 조심스럽게 재개한 만큼 일단 방향은 선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우세하다.
그러나 정계에서는 이 후보가 어떤 수준의 제스처를 보내느냐에 따라 박 전 대표의 행보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경선에서도 나타났듯이 박 전 대표가 가지고 있는 위상을 감안한다면 이 후보가 박 전 대표의 마음을 움직여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필요한 수순”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 후보가 박 전 대표에게 손을 내밀 경우 ‘승복’을 밝힌 박 전 대표로서도 이를 뿌리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어느 선에서 도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가장 먼저 거론됐던 것은 박 전 대표가 이 후보의 대선 선대위원장직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경선 전인 지난 18일 기자회견에서 이 후보는 “박 전 대표가 선거를 총괄하는 자리를 맡아 준다면 그 이상 고마울 게 없겠다”며 사실상 선대위원장직을 제의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박 전 대표의 최측근 중 한 명인 최경환 의원은 지난 22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구체적인 논의는 없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마련된다면 선대위장이 됐든 뭐가 됐든 간에 당의 정권 교체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뜻을 확고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는 박 전 대표가 선대위원장직을 맡을 의향에 무게를 둔 것이라기보다 경선결과에 승복하고 당을 위해 돕겠다는 박 전 대표의 ‘결심’을 강조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더구나 박 전 대표 주변에서는 박 전 대표가 직접 나서 선대위원장을 맡는다는 점에 부담감을 느끼는 분위기도 엿보인다. 박 전 대표 측 김재원 의원은 23일 “선대위가 10월쯤 출범한 뒤에 선대위원장 자리를 논의해도 늦지 않다”며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내보이기도 했다. 김 의원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도 “박 전 대표는 이 후보를 지지해달라고 호소하는 일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이고 맡아야 할 분야이지 선거기획을 하면서 인사권이나 재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다른 관계자 역시 “박 전 대표 입장에서는 당장 선대위원장 자리에서 이명박을 ‘지지’하는 적극적인 모양새를 취하는 것이 아무래도 부담스럽지 않겠느냐”며 “모든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 갈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또한 앞으로 이 후보에 대한 범여권의 대대적인 공격이 벌어질 경우 박 전 대표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될 공산이 크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이 후보를 향해 겨누었던 검증 의혹의 ‘근거’가 역으로 이용될 것이 예상되기 때문.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 전 시장에 대한 검증 공방이 다시 불거질 경우 박 전 대표 측에서 공격했던 멘트가 그대로 범여권 주자들의 입을 빌어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어떻게 대응을 하겠는가. 명분과 논리가 부족하다. 이는 박 전 대표 뿐 아니라 이 후보 입장에서도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후보 측 내부에서도 현재 박 전 대표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이 후보 경선 선거위원장을 지낸 박희태 의원은 한 인터뷰를 통해 “(박 전 대표에게) 선대위원장뿐 아니라 그보다 큰 자리도 뭐든지 다 드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에게 차기 정권에서 총리직과 같은 요직을 보장하고 총선에서의 공천권 지분을 나누는 해법을 제시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또 박 전 대표를 도왔던 인사들을 선대위에 기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 전 시장 측에서는 고심 중인 상황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박 전 대표로서는 이 후보 측이 제시하는 모든 ‘단 것’을 덥석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표가 경선 수락 연설에서 ‘백의종군 하겠다’는 발언을 한 것은 그런 속내를 내보인 것 아니냐는 것이 한나라당 주변의 분석이다. ‘백의종군’ 발언의 해석에 대해 박 전 대표 측은 ‘백의종군하면 일부에서 흔히 얘기하는 수수방관하겠다는 오해를 부를 수 있는데 그런 뜻은 결코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 일각에서는 향후 범여권과의 대결 구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심지어는 경선 기간 중 고개를 든 ‘후보교체론’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말도 나온다. 특히 치열한 전투를 직접 치른 측근들이나 지지자들의 경우는 박 전 대표 의중과 다른 행동으로 나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박 전 대표와 함께 경선을 치른 대다수의 인사들도 일단은 휴식기를 보내고 있다. 이들은 이 후보가 당의 개혁을 이야기할 때마다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박 전 대표 캠프에서 일하던 한 의원이 이 후보 측 사람들에게 굽실거리고 다닌다는 등의 소문이 없는 것도 아니며 또 다른 일부 의원들은 “이 전 시장이 지금은 화합을 이야기하지만 언젠가는 당 개혁의 칼을 빼들 것이며 그 칼날은 우리에게 향해질 수도 있다”며 진로를 고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 후보 측의 배려에 따라, 그리고 박 전 대표의 결심에 따라 상당한 행동의 진폭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그런 가운데 강재섭 당 대표 주재로 열기로 했던 양 캠프의 5인 중진 모임이 철회된 것도 양측의 앙금이 삭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원내대표 자리를 두고 이 후보 측의 안상수 의원과 경쟁했던 박 전 대표 측 이규택 의원이 결국 출마를 포기한 것 역시 양 측의 대리전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을 염려한 탓이다.
박 전 대표를 도왔던 인사들을 이 후보가 얼마나 포용할 지에 대해서도 벌써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다. 캠프 내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 캠프에서 조직총괄본부장을 맡았던 김무성 의원을 선대본부장으로 기용하는 등 박 전 대표 측근들을 대폭 기용하자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지만 이 후보 측 인사들의 자리 경쟁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한편 박사모를 비롯 박 전 대표의 일반 지지자들 가운데서는 ‘경선 불복’을 외치며 강경투쟁에 나서는 움직임도 없지 않다. 그러나 경선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표 지지율 상당수가 이 전 시장에게 넘어오는 양상을 보였다. 코리아 리서치 조사결과 이 전 시장 지지율은 경선전인 8월 12일 39.5%에서 경선 후인 8월 20일 56.6%로 올라섰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조사에서도 36.8%(12일)에서 59.3%(21일)로 훌쩍 뛰었으며 박 전 대표 지지층의 45.6%가 이명박 지지층으로 이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단 ‘대탈주극’은 없었다고 보이지만 이 후보로서는 안심하기는 이르다.
경선이 끝난 뒤 일주일 동안 자택에서 머무르며 휴식을 취했던 박근혜 전 대표는 자신을 도왔던 캠프 인사 및 지지자들과의 식사 자리를 마련하는 등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박 전 대표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한 채 남아 있으며 이 후보로서는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이번 대선에서 승패가 갈리게 될지도 모른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