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론 탄 마당에 극단 카드 꺼내기 어려워…‘수권 능력’ 제시 전략에 방점
게이트 정국으로 차기 대선 구도는 대혼돈에 빠졌다. ‘반기문 대망론’도 단숨에 흔들렸다. 야권주자인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와 박원순 서울시장은 11월 12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석, ‘박근혜 하야’를 고리로 반문(반문재인) 연대 전선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의 제3지대설로 3자 구도였던 2017년 대선판이 4자 구도로 전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문 전 대표가 3자 필승론에서 한발 더 나아가 4자 필승론을 위한 전략 수정을 꾀해야 한다는 얘기다.
문재인 전 대표.
“개인 문재인은 촛불집회에 함께하고 싶지만, 정치인 문재인으로서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문 전 대표가 블랙아웃(정전) 사태가 최고조에 달한 11월 9일 정국 수습책 논의 과정을 위해 하태훈 참여연대 공동대표 등 시민사회단체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다. 문 전 대표의 고민을 보여준 단적인 장면이다.
범야권이 거국중립내각에서 하야로 확장하는 ‘단계적 퇴진론’을 꺼내 들었지만 문 전 대표는 신중 모드를 이어가고 있다. 문 전 대표 측은 11월 23일로 예정된 싱크탱크 ‘정책공간 국민성장’(가칭) 출범식을 연기하기로 했다. 일반 국민과 함께하는 ‘국가비전회의’(가칭) 출범도 미루기로 했다. 야권 내부에서 ‘내년 1월 혹은 4월 조기대선론’이 나오는 상황에서 ‘문재인 대권병’에 대한 비판을 불식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문 전 대표가 ‘로우키’에 나섰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대규모 촛불집회 등에 대해서도 “정치권에서 결합하게 되면 혹여 이 순수한 집회가 오염되거나 진영논리에 갇힌다”고 밝혔다. 게이트 정국이 보수와 진보의 정쟁 프레임에 갇힐 경우 진보 포지션에서 중도 외연 확장을 꾀하는 선거 전략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로 풀이된다.
앞서 문 전 대표는 11월 7일 서울 중구 정동 달개비에서 가진 사회 원로들과의 만남에서도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과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장 등으로부터 “하야는 성급한 얘기”라며 “안보와 국방을 챙겨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게이트 정국을 대처하는 문 전 대표의 전략 코드명은 ‘수권능력 제시’다. 대세론을 탄 마당에 ‘판 흔들기’에 나선 후발주자들과 같이 극단적 수단을 꺼낼 수 없다는 논리다. 현 시국이 ‘혁명적 사태’라는 데 공감하는 문 전 대표 측이 국정 공백에 대한 구체적 실행 프로그램 없이 ‘하야’, ‘탄핵’ 등 정권 퇴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까닭이다.
다만 그는 박 대통령을 향해 “하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국민들의 민심 속에서 이미 불신임당하고 탄핵 당했다. 군 통수권 등 대통령 고유권한 내려놔야 한다”고 2선 후퇴에 방점을 찍었다. 정권 퇴진의 최전선에 서는 ‘행동파 역할’만 하지 않을 뿐, 사실상 속내는 다르지 않은 셈이다. 박 대통령의 향후 수습책과 국민적 요구에 따라 앞서 밝힌 ‘중대 결심’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문제는 문 전 대표의 딜레마다. 그가 게이트 정국에서 ‘선명성 경쟁’에 뛰어들 경우 최대 과제인 표 확장성은 억제된다. 반대로 ‘신중한 행보’를 지속한다면, 야권 지지층의 결집도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민주당 지지율은 새누리당을 압도했다. 문 전 대표의 지지율은 하락하지는 않았지만 집권여당을 이탈한 세력을 흡수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의 11월 첫째 주 정례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당 지지율은 민주당 33.0%, 새누리당 21.4%, 국민의당 15.8%, 정의당 5.8% 순이었다.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에서는 문 전 대표가 20.9%로 1위를 기록했지만, 민주당 지지층보다 12.1%포인트 낮은 수치다. 이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17.1%, 안 전 대표 10.7%, 이재명 성남시장 9.1% 등으로 집계됐다.
여권 후보로 인식돼온 반 총장의 지지율 하락, 탄핵 주장에 불을 지핀 이 시장의 상승세만 눈에 띌 뿐, 문 전 대표의 지지율은 요지부동이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다음 대선에서 문 전 대표의 맞수는 안철수도, 박원순도 아니고 트럼프를 흉내 내고 있는 포퓰리스트 이재명”이라고 주장했다.
게이트 정국에서 ‘문재인 지지율’이 고착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문 전 대표의 고정 지지층은 진보 유권자층과 2030세대로,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이들과 겹친다. 게이트 정국으로 경제도 외교도 꽉 막힌 상황에서 야권이 현실 가능한 수습책 없이 ‘하야 블랙홀’에 빠질 경우 갈 길 바쁜 문 전 대표의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다. 민주당 전략통 의원은 “문 전 대표가 성급히 진보 지지층의 입맛에 맞는 행보를 하기보다는 중도 확장성을 갖춰야 한다”며 “진보 유권자는 이미 마음속에 ‘이번엔 문재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오히려 박 대통령이 무너진 상황에서 거국중립내각의 책임총리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와 김종인 민주당 의원 등 야권 주자들이 거론될수록 그간 누려왔던 ‘반 박근혜 프레임’의 반사적 이익만 감소할 수도 있다. 반론도 있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문 전 대표는 민주당 기반이 있다”며 “(게이트 정국에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타 후보들보다 유리하다”고 밝혔다.
반 총장이 새누리당이 아닌 제3지대로 방향을 튼다면 차기 대선은 다자구도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문 전 대표 측의 고민거리다. 게이트 정국의 촉발로 대선 삼각 축이었던 ‘반기문 vs 문재인 vs 안철수’ 구도가 ‘여권 후보 vs 문재인 vs 반기문 vs 안철수’의 4자 구도로 전환하는 시나리오다.
반 총장이 이탈한 여권 후보의 퍼즐이 진보성향의 비박계 후보로 결정될 경우 문 전 대표의 중도 포지션은 더욱 좁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3자 구도 때보다도 수권능력 제시를 통한 중도 외연 확장 중심의 행보를 할 수밖에 없다는 셈법이 나온다.
문 전 대표를 둘러싼 대내외적 환경도 좋지 않다. 대외적으로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당선으로 반 총장이 최대 프리미엄을 얻었다. 트럼프의 외교 정책의 핵심은 ‘미국 우선’이다. 국내 지도자 그 누구도 트럼프 새 행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에 한국통으로 부를 만한 인적 네트워크가 없다. 미국 정·재계에 넓은 인맥을 보유한 반 총장의 외교력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최순실 게이트로 대망론에 직격탄을 맞았던 반 총장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대내적으로는 반문 연대 전선이 강화됐다. 총성은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아름다운 단일화’를 이뤄냈던 안 전 대표와 박 시장으로부터 시작됐다. 이들은 11월 9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50분간 비공개 회동하고 “박 대통령은 즉각적인 하야 없는 책임총리는 더 큰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의기투합했다. 하야를 언급하지 않은 채 거국중립내각을 주장한 문 전 대표와 차별화를 시도한 것이다.
또한 정국 수습을 위한 ‘초당적 비상시국 회의체’를 추진키로 했다. 이들의 회동은 2011년 이후 5년 만이다. 안 전 대표가 촛불집회에 참여키로 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일각에선 초당적 비상시국 등을 고리로 대선 발 정계개편의 물꼬가 트일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4자 구도에서 반문 연대 전선이 핵심축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얘기다. 대내외적 악재 속에서 문 전 대표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한편 <리얼미터>의 11월 첫째 주 정례조사 결과는 지난 10월31일~11월4일까지 5일간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2528명을 상대로 유선(20%)·무선전화(80%) 병행 임의걸기(RDD) 및 임의스마트폰알림(RDSP)에 따라 전화면접(CATI), 스마트폰앱(SPA), 자동응답(ARS) 혼용 방식으로 실시됐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1.9%포인트, 응답률은 전체 10.6%였다. 그 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www.nesdc.go.kr)를 참고하면 된다.
윤지상 언론인
반기문 제3지대행 ‘여권 텃밭’ TK 민심에 달렸다 ‘분화냐, 결집이냐.’ 여권 텃밭 대구·경북(TK) 민심이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인 ‘최순실 게이트’ 이후 TK 민심조차 박근혜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면서 이들의 재결집 여부에 따라 차기 대선판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간 친박(친박근혜)계 꽃가마에 탔던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의 TK 지지율이 타 후보들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점에서 이 지점이 대선 발 정계개편의 중대 변곡점이 될 전망이다. TK 민심이 재창당 수순에 들어간 여권을 또다시 외면한다면 반 총장의 제3 지대 정착 가능성은 한층 커질 수밖에 없다. 비박(비박근혜)계의 이탈이 현실화될 경우 영남권 표심 분열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더불어민주당 등이 영·호남 민주 세력 복원을 명분 삼아 영남권 공략에 시동을 건다면, 야권의 대선 승리 셈법인 ‘영남권 분열-비영남권 결집’이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 여론조사전문기관 <한국갤럽>의 11월 첫째 주(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 응답률 27%) 박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5%까지 추락했다. 이는 지난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6%보다 낮은 수치다. 보수적 여론조사의 대명사로 알려진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충격파는 컸다. 10월 첫째 주(표본오차 동일, 응답률 20%) 29%를 기록하던 국정 지지율이 6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자, 정치권 안팎에선 ‘권력기반의 마지노선’이 붕괴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비박계 한 관계자는 “답이 없다. 백약이 무효 아니겠느냐”라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TK 지지층도 요동쳤다. 10월 첫째 주 TK 지지율은 39%였다. 부정평가(43%)보다 4%포인트 낮은 수치를 기록한 TK 민심은 11월 첫째 주 10%까지 하락했다. 부정평가는 82%까지 치솟았다. TK 지지율이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는 동안 부정평가 수치는 2배 가까이 상승한 셈이다. 2012년 대선 때 박 대통령이 기록한 TK 득표율은 대구 80.1%(126만 7789표), 경북 80.8%(137만 5164표)였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각각 19.5%(30만 9034표), 18.6%(31만 6659표)에 그쳤다. ‘최순실 게이트’가 TK 민심의 역린도 건드렸다는 분석이 수치로 증명된 셈이다. ‘콘크리트 지지율’의 대명사였던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통치 불능’ 상태로 치닫자, 여권 내부에선 반 총장의 제3 지대 행을 점치는 인사들이 늘었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11월 4일 국회에서 열린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반 총장을 언급하며 “이런 당에 오겠느냐”고 말했다. 정 원내대표는 “그만큼 당이 위기”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지만, 당 내부에선 친박 이미지가 강한 반 총장이 재창당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 총장 측근인 김숙 전 유엔본부 대사는 최근 언론과 인터뷰에서 “반 총장이 내년 1월 중순 귀국한다”면서도 “(향후 행선지 등은) 임기를 마친 후에나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반 총장의 여권행에 선을 그은 것으로 풀이된다. 야권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김병준 국무총리 내정자 지명 철회 및 거국중립내각의 각론에 대한 명시적 입장, 여권 재창당 등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수습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는 11월 첫째 주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1005명, 10월 첫째 주 1009명을 각각 대상으로, 휴대전화 임의걸기(RDD) 표본 프레임에서 무작위 추출한 뒤 전화조사원 인터뷰 방식으로 실시했다. 그 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www.nesdc.go.kr)를 참고하면 된다. [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