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맛’ 본 늑대 그냥 있을 리 만무
▲ 아프간 인질 전원 석방으로 42일간의 악몽이 끝났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남긴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사진은 석방된 한국인 인질들. AP/연합뉴스 | ||
정부는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제사회의 기본 원칙에 역류하는 선택을 했다는 혹평을 받고 있다. 테러단체와는 협상이나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대테러 원칙을 무시하고 정부가 테러단체와 직접 협상에 나서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사례를 남김으로써 전 세계 곳곳에 산재한 무장단체가 ‘인질극’을 전략적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는 국제사회의 비난도 피할 수 없게 됐다. 미국이나 독일 등 각국 정부가 인질 석방을 환영하면서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이런 이유. 캐나다의 막심 베르니에 외교장관은 30일 성명을 통해 “테러범과의 협상은 어떤 상황에서도 용납될 수 없으며 이 같은 협상은 결과와 상관없이 더 많은 테러를 부추길 뿐”이라고 항의했으며 일본을 방문 중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역시 같은 날 “탈레반에 납치된 독일인을 석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테러 단체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방침에는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또 정부가 탈레반과의 협상 과정에서 아프간 주둔 한국군 철수 카드를 너무 빨리 꺼내드는 등 미숙한 협상력을 보인 것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9일 ‘한국인질 석방-비용’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노 대통령이 협상 과정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미국의 ‘테러단체와 협상 불가’ 원칙을 포기하라는 국내 의견에 승복하고 말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인질사태 발생 이후 정부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정치·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다. 7월 19일 피랍소식을 접한 정부는 곧바로 정부합동대책본부를 꾸리고 24시간 비상체제에 돌입했고 주무부서인 외교부는 장관부터 하급직원에 이르기까지 사태 해결에 총력전을 펼쳤다. 북핵 6자회담, 남북정상회담 등의 외교·안보 현안들이 발생했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김만복 국정원장,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 등 정부 고위관계자들이 사태 해결을 위해 아프간 정부와 사우디아라비아 등에 파견돼 상당기간 자리를 비웠던 것도 정부의 부담이었고 이들 국가들에 대해 외교적으로도 큰 부채를 짊어지게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정원장의 현장지휘가 언론에 노출된 것도 부적절했다는 지적이다.
▲ 협상을 지휘한 김만복 국정원장. | ||
다른 외신들도 몸값과 관련 여러 가지 추측성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미국 <타임>은 “한국정부와 탈레반 측 모두 몸값에 대해 부인하고 있지만 몸값이 합의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고 아랍권 위성방송인 <알자지라>는 아프간 정부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해 “한국 정부가 인질 석방을 위해 탈레반에 2000만 파운드(약 380억 원), 인질 1인당 18억 원가량을 줬다는 소문이 있다”며 구체적인 몸값 액수를 보도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한국 협상단이 총 7000만 달러(약 660억 원)를 갖고 아프가니스탄으로 출발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몸값 이외에도 또 다른 이면합의 가능성을 둘러싼 논란도 확산될 조짐이 일고 있다. 탈레반 대변인 격인 카리 유수프 아마디가 “이번 납치는 성전을 수행하는 우리 전사의 위대한 승리”라며 “우리는 이 방법(납치)이 성공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의 다른 나라에 똑같은 일(납치)을 할 것”이라고 말한 대목에서도 몸값 이외에도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는 냄새를 풍긴다. 특히 탈레반이 시종일관 인질 석방 핵심요구 조건으로 내세웠던 수감자 맞교환 카드를 포기한 채 아프간 주둔 한국군 조기 철수, 기독교 선교금지 등 공식적으로 알려진 협상조건만으로 인질을 한꺼번에 석방할 리 만무하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정부도 탈레반과의 초기 협상 과정에서 탈레반의 기반인 가즈니 지역에 병원과 학교 건립을 약속하는 등 상당 규모의 인도적 지원 카드를 제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개신교 단체들은 정부가 탈레반 측과 인질 석방을 조건으로 합의한 ‘아프간 내 선교활동 금지’와 배치되는 위험지역 선교를 계속할 뜻을 밝혀 향후 정부와 종교단체간의 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한 사망자 가족 일부는 정부나 교회 측에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시민단체나 네티즌들의 문제 제기도 잇따르고 있다. 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위험지역으로 선교활동을 보낸 종교단체의 책임을 비롯 이면 합의설 등 각종 의혹에 대해 철저한 규명을 촉구하고 있어 논란은 확산될 전망이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