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정통’ 의혹의 주인공 일단 엎드리기
정찬우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지난 10월 25일 취임식에서부터 안하무인식 언행으로 입방아에 올랐다. 연합뉴스
실제로 정 이사장은 ‘금융계 황태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그가 최순실 씨 혹은 그 측근의 비호 아래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불거지고 있다. 특히 현 정부 들어 계속 문제가 된 금융권 낙하산 인사 논란의 배후에 정 이사장이 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된다.
정찬우 이사장과 박근혜 정부의 인연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나온 정 이사장은 전남대 교수와 금융연구원 부원장으로 재직하던 중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인수위 전문위원으로 참가해 현 정부와 밀월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서울대 동기동창인 강석훈 현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의 지원 덕에 인수위에 입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 등과 친분을 쌓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현 정부 출범 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전격 발탁된 그는 이때부터 존재감이 급속히 커지며 금융권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3년 이건호 당시 KB국민은행 부행장이 은행장으로 전격 발탁된 일이다. 조흥은행 출신인 데다 리스크관리 담당이라는 비주류(?) 업무를 맡고 있던 그가 당시 국내 최대은행이던 국민은행장으로 선택되자 금융권에서는 뒷말이 무성했다. 하지만 이 전 행장이 금융연구원에서 정찬우 당시 부위원장과 함께 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 금융권의 정설이다.
이뿐 아니다.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돌연 사퇴한 최수현 전 금융감독원장의 퇴진이 그의 뜻이었으며, 숱한 논란을 낳았던 하영구 전 한국시티은행장의 전국은행연합회장 취임, 서근우 금융연구원 기획협력실장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 임명 등에도 그가 개입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밖에 이광구 우리은행장 등 숱한 금융사 인사에 정 이사장이 깊숙이 관여했다는 것이 금융권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심지어 자신의 거래소 이사장 취임 자체도 낙하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 5일 취임한 그는 평범치 않은 과정을 거쳐 한국거래소 이사장에 올랐다. 9월 초 이사후보추천위원회가 구성되자 전임자인 최경수 당시 거래소 이사장은 연임하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후보자 공모에 지원조차 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났다. 최 전 이사장이 자진사퇴를 한 직후 ‘정찬우 내정설’이 돌기 시작했고, 실제로 6명의 지원자 가운데 그가 단독후보로 추천됐다. 결국 9월 30일 열린 한국거래소 임시주주총회는 정찬우 이사장의 선임을 승인했고, 노조는 그날부터 공모절차에 문제가 있다며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이쯤되자 정치권에서도 의혹이 터져 나왔다. 지난 9월 국정감사에서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는 “정찬우 이사장에 대해 ‘금융의 우병우’라는 세간의 평가가 있다”며 “이번 거래소 이사장 추천과 선임절차는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를 위한 요식절차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난 11일에는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 긴급현안질문에서 “차은택이 문화계의 황태자였다면 금융계 인사를 주무른 사람은 정찬우 한국거래소 이사장이다”라며 그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박 의원은 특히 정 이사장이 이재만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내통했다며 ‘배후세력’까지 실명으로 거론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자신의 입지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거래소 수장에 오른 뒤에도 여전히 안하무인식 언행으로 입방아에 올랐다. 정 이사장은 지난 10월 5일 열린 취임식에서 ‘주식거래시간 추가 연장’이라는 청사진을 펼쳐 보였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그의 깜짝 발언에 주관부서인 금융위원회는 화들짝 놀랐다. 금융위는 즉시 반박에 나서며 “거래시간 연장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제도를 손질해야 하는 문제를 주무당국과 협의도 없이 발표한 셈이다.
며칠 뒤 열린 취임 첫 공식일정에서도 구설수가 이어졌다. 정 이사장은 언론과의 취임 기념 간담회에서 “공매도 제도를 손질하겠다”며 또 다른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이 역시 금융위원회가 해명 자료를 내며 없던 일이 됐다. 게다가 이날 그는 실내에서, 그것도 언론사 카메라가 지켜보는 앞에서 버젓이 담배를 꺼내 물고, 간담회 내내 반말로 일관해 빈축을 샀다. 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금융위원장급 거래소 이사장”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금융권의 관심은 이제 그가 최순실 게이트라는 고비를 넘기고 한국거래소의 지주사 전환이라는 중대 사업을 완수할지에 쏠리고 있다. 지난해 공공기관에서 해제된 거래소는 조만간 지주회사로 거듭난다는 큰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이는 자본시장법을 바꿔야 가능한 일이니만큼 법사위나 정무위 등 국회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현재의 정치구도를 볼 때 법안통과는커녕 국회의원들을 만나기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점이다. 정 이사장은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는 만큼 그가 의원들, 특히 야당을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금융권은 보고 있다.
다만 그가 산업은행 회장, 기업은행장 등 하마평에 올랐던 다른 자리를 뒤로하고 거래소 이사장을 택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쉽사리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적지 않다. 지주회사 소속 한 금융권 고위 인사는 “지주사가 된다는 것은 다수의 계열사를 거느리겠다는 의미”라면서 “정 이사장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일 수 있다”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