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게 닫힌 철문을 뒤로하고, 휴대폰, 필기구 등 소지품을 사물함에 넣고 몸 수색을 받은 뒤에야 방문증을 패용하고 면회실로 향할 수 있었다. 국민의 정부 제2인자.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은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채 겹겹이 껴입은 내의와 스웨터, 털장갑으로 중무장한 모습으로 면회실에 먼저 나와 기자를 맞았다.
▲ 권노갑 | ||
“나는 괜찮아요”.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데, 어디 불편한 데는 없습니까”.
“날이 추워 운동을 못하니까, 아무래도…. 당뇨 합병증으로 발가락이 좀 불편해요.”
기자와 함께 면회에 나섰던 보좌진은 당초 어렵사리 구한 동상약을 건네줄 요량이었다. 그러나 알루미늄으로 포장된 동상약은 몸수색 과정에서 구치소 직원들에게 압수되고 말았다.
초췌한 모습으로 하늘색 수의를 입고 있는 권 전 고문의 모습 속에 ‘2인자’ ‘실세’라는 용어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아 보였다. 다만 “사필귀정(事必歸正)”을 읊조리며, 담담히 재판결과를 기다리는 70대 중반 노인의 모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정말 억울합니다. 내가 40년을 넘게 정치를 해오는 동안 갖은 고초를 다 겪어봤지만, 지금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은 처음입니다. 이익치 한사람 얘기로 나에게 그런 죄를 뒤집어 씌우는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진승현 때도 그랬고, 월드컵휘장 때도 그랬고, 재판부의 올바른 판단을 기대할 뿐입니다.”
권 전 고문은 정치 얘기를 화제에 올리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다만 열린우리당 당의장에 당선된 정동영 의장에 대해서 만큼은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96년 총선을 앞두고 정 대표가) 서울에서 이부영 의원하고 맞붙어 싸워보라고 했는데, 전주에서 출마하겠다고 해서 공천 받도록 도와줬다”고 공개했다.
그는 또 “그때 (2000년 12월 당시) KKK다 뭐다 해서 한나라당의 무차별 폭로에 대응하기 위해 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던 정 의원이 도리어 ‘부통령’이니 ‘김현철’이니 하며 나를 공격했다”며 “자신이 맡은 소임을 다하지 않고 나를 몰아 세웠던 것을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고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한편 면회를 마친 뒤 권노갑 전 고문의 한 측근은 “얼마전에 김태랑 전 의원을 통해 정동영 의원이 ‘찾아오겠다’는 연락을 한 적이 있다”며 “전 고문은 ‘공개 사과한 뒤 찾아오라’며 거절했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위 측근은 “연말연시를 맞아 적잖은 정치권 인사들이 권노갑 전 고문을 찾고 있다”며 “주로 동교동계 출신 인사들이 많지만, 김원기 의원이나 신계륜, 송영길 의원 등도 면회온 일이 있다”고 전했다.
기자와 동행했던 배석영 민주당 부위원장은 “면회를 하고 나면 늘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대검 중수부(안대희 검사장)로부터 현대비자금 2백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 5년에 추징금 1백50억원, 몰수 50억원이 구형돼 구치소 독방에서 쓸쓸히 2004년 설을 맞아야 했던 권 전 고문의 운명은 오는 29일 재판부의 선고 공판에서 갈릴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