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들었다 놨다’ 복잡한 힘 겨루기
▲ 열린우리당 탈당과 신당 창당 과정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정동영 후보를 비난하며 심각한 갈등 구도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정치적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으며 현재의 갈등은 위장전술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 ||
노 대통령과 정 후보는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주역이자 현 정부 출범 이후 당과 청와대를 이끌어온 정치적 동지였다. 지난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두 사람이 끝까지 완주하며 선의의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노무현 후보의 승리가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정 후보의 ‘아름다운 완주’가 원동력이 됐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노 대통령이 입각 과정에서 대권 수업에 유리한 통일부 장관에 정 후보를 임명하는 등 남다른 애정을 보인 것도 정 후보에 대한 보은 성격이 묻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정 후보가 대권주자로 입지를 구축해 가면서 두 사람 사이에 정치적 앙금이 쌓이기 시작했다. 정 후보는 서서히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고 이를 감지한 친노그룹은 이른바 ‘정동영 죽이기’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노 대통령은 스스로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 당적을 정리(2월)했고 100년 정당을 기치로 출항했던 열린우리당은 8월 20일 마지막 전당대회를 갖고 사실상 해체됐다. 두 사람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당시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해체를 주장했던 정 후보 등을 겨냥해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당을 깨고 만들고, 지역을 가르고, 야합하고, 정계개편을 하고, 보따리를 싸들고 이 당 저 당을 옮겨 다니던 구태정치의 고질병, 당신들이 우리당을 창당하며 국민들에게 청산을 약속했던 그 구태정치의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한 바 있다.
정 후보가 신당 후보로 선출된 이후 노 대통령에게 지속적으로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데도 노 대통령이 소극적지지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앙금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정 후보가 신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직후 “정 후보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잘 껴안고 가기 바란다”는 의미 있는 발언을 한 바 있고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열린우리당 해체 및 경선 과정을 언급하면서 “열린우리당에 애정을 갖고 있는 대통령도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으로 본다”며 “앞으로 그 부분에 대해 정 후보의 입장이 솔직하고 충분하게 개진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청와대는 또 범여권 후보단일화 문제에 대해서는 2002년 후단협의 ‘노무현 흔들기’를 거론하면서 “후보를 뽑자마자 단일화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 후보를 깎아 내리는 것”이라며 “현재로선 후보들이 얼마나 지지율을 끌어 올리느냐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의 소극적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정 후보는 “노 대통령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할 것”이라며 적극적인 관계복원 의지를 피력했다. 당장은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범여권 후보단일화와 연말 대선 승리를 위해선 ‘적과의 동침’도 불사해야 하는 정 후보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정 후보의 적극적인 러브콜은 노 대통령이 자이툰부대 파병 연장안을 발표하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정 후보가 파병 연장안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가 하면 노 대통령에게 이명박이 되면 억울한 꼴 운운하는 협박성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정 후보는 24일 파병 연장안과 관련해 “대통령 얘기를 무조건 따르는 국회는 선진국회가 아니다”며 “국민과의 약속이니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신당이 파병 연장안 반대를 당론으로 정한데 따른 원론적인 발언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정책과 노선에서 만큼은 ‘친노’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동시에 파병 연장을 찬성하고 있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와의 차별화를 꾀하고자 하는 나름의 대권 전략이 투영돼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 지난 2002년 민주당 경선 당시 두 손을 꼭 마주잡은 정동영 노무현 후보. 당시 노무현 후보를 만든 데는 정동영의 공이 컸다. | ||
천호선 대변인은 25일 정 후보가 전날(24일) 밤 TV에 출연해 노 대통령의 ‘쫓겨났다’는 표현을 두고 “대통령이 자주 쓰는 과장된 어법”일 뿐이라고 발언한 것과 관련해 “단순한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라고 강조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노 대통령은 얼마전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정 후보에 의해 사실상 쫓겨난 만큼 해명을 들어야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청와대 홍보수석실도 이날 ‘대통령은 원칙과 대의를 말하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정 후보를 압박했다. 청와대는 이 글에서 “20, 30% 지지로 승리하자고 한다면 아무렇게 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나 51% 이상의 국민들 마음을 묶으려면 원칙의 문제를 해결해서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후보가 원칙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친노그룹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노 대통령과 청와대가 정 후보를 상대로 치열한 기 싸움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청와대가 최근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과 일정한 선을 그은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청와대홍보수석실은 25일 “대통령은 문 후보에 대해 잘 모르고 어떤 입장을 가질 만큼 검증을 거친 분이 아니어서 대단히 신중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정 후보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경선에서 선출된 후보 외에 지지할 후보가 없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혀왔다”면서 “대통령이 속했던 열린우리당이 신당으로 이어졌고 그 당의 경선 결과를 존중하는 것은 원칙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는 신당 후보로 선출된 정 후보를 배제하고 다른 후보와 손잡을 생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다만 그 전제조건으로 정 후보가 친노그룹의 지지를 받으려면 열린우리당 해체와 참여정부 차별화에 대해 진솔한 해명을 분명하게 내놓아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노 대통령의 이러한 입장은 범여권 후보단일화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된다.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던 대선 예비주자들이 줄줄이 낙마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문 전 사장은 아니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는 노 대통령의 입장 표명은 정치적 지지기반이 취약한 문 후보에게 큰 타격이 될 것으로 분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노 대통령과 정 후보는 참여정부의 주역이라는 정치적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 만큼 대선정국이 본격화되면 어떤 식으로든 손을 잡을 것이란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두 사람이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당권이나 내년 총선 공천권 등 보다 많은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기 위한 기 싸움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두 사람이 이미 대권 연대에 교감하고 있으면서도 물타기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갈등 국면을 조성하고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 후보 입장에서는 살아있는 권력과 맞서면서 보다 큰 인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노 대통령으로서는 친노그룹이 대선 후 생존하기 위해서는 정 후보와 손을 잡는 것 외에 딱히 묘안이 없다는 점에서 서로가 전략적으로 ‘위장전술’을 펼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노 대통령과 정 후보의 속내는 앞으로 대선 정국이 막바지로 치달으며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을 정점으로 전개되고 있는 범여권 권력투쟁이 실제로 이별전쟁으로 비화될지 아니면 고도의 위장전술로 귀결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