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난 조연들 다음 총선 향해 ‘재주 넘기’
▲ (왼쪽부터)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지난 1일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은 청와대 비서실에 대한 국회 운영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가 (대선에서) 당선되기를 바란다’는 뜻의 말을 해 관심을 끌었다. 문 실장은 이날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이 “대선에서 정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느냐”고 묻자 “뭐 솔직히 답변한다면 그렇다”고 했다. 문 실장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당선 안 되길 바란다는 뜻이냐”고 하자 “지금 답변이 적절하지 않을지 모르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문 실장은 또 “정 후보 외에 지지할 후보가 없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다. 그게 원칙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경선에서 선출된 후보 외에 지지할 후보가 없다”고 했던 것을 재확인한 것이다.
이 같은 답변에 대해 한나라당 의원들은 “선거 중립 의무가 있는 비서실장이 국감장에서 공적으로 그렇게 답변하면 되느냐”는 등 비판을 했지만 많은 이들은 청와대와 노무현 대통령의 고민이 드러난 발언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대안이 없어 원칙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이다.
요즘 대선 정국에서 친노 세력에 대해 거론하는 목소리가 쑥 들어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무현 대통령과 친노 세력의 ‘잠재력’에 대해 이런 저런 평가가 나왔고 종종 이번 대선의 주요 변수로 고려됐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사그라들었다. 왜일까. 가장 큰 원인은 이해찬 후보의 경선 탈락이다. 대통합민주신당 예비경선에서 ‘친노후보’ 3인방인 이해찬, 유시민, 한명숙 후보가 모두 살아남자 한때 이들 세 명이 합세하면 경선판을 흔들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한명숙, 유시민 후보의 사퇴 역시 치밀한 계산 아래 이해찬 후보에게 표를 몰아 주려는 의도라고 분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었다. 경선이 끝나면서 친노 주자들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친노 대표주자로 승부수를 던졌던 이해찬 후보도, 시베리아 벌판으로 나와 뚜벅뚜벅 걷겠다던 손학규 후보도 결국 정동영 후보에게 무릎을 꿇었다. 두 주자는 선대위원장 직을 맡아 정동영 후보를 돕겠다고 나섰다. 과연 친노세력이 승자인 정동영 후보와 화합적 결합을 한 것일까. 그러나 상당수 정계 관측통들은 아직은 아니라는 해석이다. 물론 현재 경선에서 패한 친노세력은 뿔뿔히 흩어졌다. 우선 친노 대선 주자들의 입장도 제각각이다.
이해찬 전 총리는 공동선대위원장으로 ‘변신’한 뒤 비교적 적극적인 행보를 펼치고 있다.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지지층이 두터운 부산·경남 및 대구·경북 지역을 돌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정동영 후보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경선 당시 경쟁자의 입장에서 정 후보에 관해 비판적 목소리를 서슴지 않았던 그이지만 최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정 후보를 돕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 전 총리는 지난달 29일 첫 선대위 회의에서 이명박 후보를 ‘히틀러’에 빗댄 공격성 멘트를 내놓기도 했다. 이 전 총리는 이날 “히틀러가 인류사회에 재앙을 가져왔듯 이 후보도 그에 못지않은 과오를 범할 사람”이라고 언급해 주목을 끌었다.
‘적극적 행보’의 이해찬, ‘정중동’의 한명숙에 비해 유시민 전 장관의 행보는 ‘소극적’이다. 최근 유시민 전 장관은 정동영 캠프 측과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을 확인시켜준 바 있다. 최근 언론사 논설위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 전 장관은 “현재 우리 정치에서 확실한 여당도 없고 정당정치가 실종되어 버렸다”며 “통합신당이라도 여당으로 제대로 남아 정책을 가다듬고 준비하면 모르겠는데 여당마저 깨졌으니 어디 희망을 걸 데가 없어 국민이 불쌍하다”고 정동영 후보를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유 전 장관은 자신을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한 것도 사전 조율이 없었다고 다소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대통합민주신당의 한 관계자는 “유 전 장관의 고향이 경북지역이기 때문에 그 지역 표심잡기에 애써달라는 의미에서 내린 결정”이라며 “하지만 유 전 장관이 돕겠다는 자세가 아닌 것 같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렇듯 서로 간에 감정적 거리감이 좁혀지지 않은 상태다.
‘친노 후보’였던 세 사람의 입장이 다르듯 친노세력의 입장도 하나로 통일돼 있지는 않은 듯하다. 일부는 정동영 후보를 지원하는가 하면 일부는 다른 후보를 지지한다. 예를 들어 김두관 전 장관 지지층의 상당수는 정동영 캠프에 흡수됐지만 일부 지지 세력은 문국현 캠프로 옮겨간 상황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세력은 후보 단일화에 몸을 싣는가하면 아예 내년 총선을 노리고 벌써부터 낙향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다. 또 일부는 노 대통령과 뜻을 같이하며 다음을 내다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도 곤란해 보인다. 앞서 문 실장의 답변처럼 노 대통령도 ‘원칙’상 정동영 후보를 지지해야 하지만 아직 마음에서 우러나오지는 않는 듯하다. 정동영 후보가 “대통령이 바뀌면 다른 정부”라며 현 정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한 부분에 대해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정 후보 발언은 본인에게 물어볼 일”이라고 피해가는가 하면 “막상 대통령이 되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를 일이며, 추상적인 표현을 갖고 청와대가 의견을 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만 언급했을 뿐이다. 앞서의 소극적 지지 입장을 고수한 셈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범여권의 후보로 뚜렷한 대안이 없는 만큼 노 대통령의 영향력이 크게 줄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이번 대선은 접고 내년 총선을 겨냥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정치적으로 이념을 계속 추구해 나가고자 하는 노 대통령에게 정동영 후보는 이미 품을 벗어난 인물이며 그렇다고 대안도 없는 입장이라면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타고난 정치 전략가라고 평가 받는 노 대통령이 순순히 친노세력의 와해를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어떻게든 세력을 유지해 범여권 내에 든든한 둥지를 틀고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정권 탈환을 막기 위한 최후 승부수를 던질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일단은 정권이 한나라당에 넘어가지 말아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