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맨·적토마·국민노예…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사람의 육체적 능력은 나이를 먹을수록 떨어진다. 베테랑 선수는 조금만 몸이 둔해져도 ‘세대교체’라는 명분의 희생양이 된다. 반대로 구단은 앞으로 팀의 미래를 책임져줄 유망주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던 선수라 해도 흐르는 시간은 막을 수 없다. 마지막이 온다.
2016년 역시 한국 프로야구의 굵직굵직한 선수들이 은퇴 소식을 알렸다. LG 이병규와 두산 홍성흔, 그리고 ‘인간 승리’의 아이콘인 LG 정현욱 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홍성흔.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두산은 11월 22일 보도자료를 통해 “프랜차이즈 스타 홍성흔이 은퇴를 결심했다”고 전했다. 홍성흔은 경희대를 졸업하고 1999년 두산의 전신 OB에 1차 지명 선수로 입단했다. 그해 신인왕을 거머쥐며 화려하게 출발했다. 이후 그라운드에서 그 누구보다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오버맨’이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허슬플레이의 대명사로 통했다. 2001년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도 함께 했다.
홍성흔은 2009년 FA가 돼 4년간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롯데 시절 3할 타율을 세 번 기록했고, 도합 59홈런을 쳤다. ‘역대 최고의 야수 FA’라는 찬사도 받았다. 2013년에는 다시 FA 자격을 얻어 친정팀 두산에 복귀했다. 첫 두 시즌엔 베테랑 타자로서 제 몫을 해냈다. 하지만 2015년부터 2년간 좀처럼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다. 후배 선수들에게 주전 자리를 내줬고, 부상까지 겹쳐 2군에 내려갔다. 올해 팀이 새로운 멤버들로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홍성흔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결국 홍성흔은 고심 끝에 아름다운 마지막을 결심했다.
홍성흔은 화려하고, 건실했다. 프로 통산 1957경기에 출장해 타율 0.301(6789타수 2046안타), 208홈런, 1120타점을 기록했다. 통산 안타(2046개)와 2루타(323개), 타점(1120점) 모두 역대 두산 타자들 가운데 가장 많다. 2015년 6월 14일 잠실 NC전에서는 오른손 타자 사상 최초로 통산 2000안타 고지를 밟는 위업을 달성했다.
선수 생활 내내 ‘열정’과 ‘활기’의 아이콘이었던 홍성흔이다. 그는 “팀을 위해 언제나 더 나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펼쳐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앞으로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선수’, ‘참 야구를 잘한 선수’보다 ‘최고가 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 선수’, ‘열정적인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지금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 조용히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새해에는 해외에 나가 야구를 더 공부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인생의 전부였던 ‘야구’와 또 다른 인생을 함께 하기 위해서다.
이병규. 연합뉴스
LG를 대표하는 타자였던 ‘적토마’ 이병규(42)도 홍성흔과 같은 선택을 했다. 2017년 보류선수 명단 제출 마감일인 11월 25일을 하루 앞두고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누구보다 LG의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이 잘 어울리는 선수였다. 1997년 데뷔 첫 해부터 풀타임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타율 0.305를 기록했고, 신인왕까지 거머쥐었다. 일본 주니치에 몸담았던 3년(2007~2009년)을 제외하면 1997년부터 줄곧 LG에서만 뛰었다.
독보적인 ‘안타 제조기’였다. 3년 차였던 1999년 홈런 30개, 도루 31개를 기록해 잠실을 홈구장으로 쓰는 선수로는 최초로 30-30클럽에 가입했다. 그해부터 2001년까지 3년 연속 최다 안타 1위에 올랐다. 주니치에서의 3년은 순탄치 않았지만, 2010년 친정팀으로 돌아온 뒤에는 다시 명예를 회복했다. 2013년 최고령 사이클링히트 기록과 함께 최고령 타격왕에 올랐고, 시즌 직후 두 번째 FA 자격을 얻어 3년 총액 25억 5000만 원에 LG와 계약했다.
그러나 40대에 접어든 2014년부터 하락세가 뚜렷했다. 그 사이 LG는 무서운 속도로 세대교체를 해나갔다. 이병규는 올해 아예 전력에서 제외됐다. 남은 선택은 둘 중 하나. 방출돼 다른 팀을 알아보거나, 지도자로서 LG에 남는 것이었다, LG를 사랑한 이병규는 후자를 택했다. 통산 1741경기에서 타율 0.311, 2043안타, 161홈런, 972타점, 992득점, 147도루의 성적을 남기고 유니폼을 벗기로 했다.
다행히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는 얻었다. LG의 시즌 최종전인 10월 8일 잠실 두산전 4회 2사 1·2루서 이병규가 대타로 나왔다. 368일 만의 1군 경기, 그리고 시즌 처음이자 마지막 출전이었다. 그는 두산 에이스 더스틴 니퍼트의 초구 직구를 받아쳐 외야 왼쪽에 떨어지는 안타를 쳤다. 그리고 이어진 공격에서 2루수 윤진호로 교체됐다. 단 한 경기, 단 한 타석. 그래도 잠실구장을 가득 메운 LG팬들은 이병규에게 엄청난 함성과 응원을 보냈다. 계속 이병규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병규는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서 팬들을 향해 오래오래 손을 흔들었다.
정현욱. 연합뉴스
LG 정현욱(38) 역시 2016년를 마지막으로 공을 내려놓았다. 암을 극복하고 마운드에 다시 서서 팬들에게 ‘할 수 있다’는 감동과 희망을 전했던 정현욱이다. 그러나 파란만장했던 21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로 결정했다. 스스로 구단에 “유니폼을 벗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정현욱은 신인왕 출신인 이병규, 홍성흔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대기만성’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였다. 1996년 삼성에 입단했지만, 1998년에 처음으로 1군 무대를 밟았다. 삼성 불펜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한 해는 입단 8년 만인 2003년. 그리고 5년이 더 흐른 2008년에야 리그에서도 알아주는 구원 투수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팬들이 기억하는 그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천신만고 끝에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던 투수가 불펜에서 전천후로 맹활약했다. 삼성의 ‘마당쇠’를 넘어 ‘국노(국민 노예)’로 승격됐다. ‘국노’는 은퇴할 때까지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별명이다.
그는 2013년을 앞두고 FA 자격을 얻어 LG로 이적했다. 그러나 2014년 7월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 후 종합검진을 받다가 위암을 발견했다. 외부에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고 암세포와 싸웠다. 위를 모두 들어내면서 살이 빠지고 힘이 떨어졌지만, 굴하지 않고 버텼다. 긴 재활을 이겨낸 끝에 2016년 3월 시범경기에서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4월 15일 대전 한화전에선 647일 만에 1군 경기에 등판해 1043일 만에 세이브를 올렸다. 그리고 이날 똑같은 위암을 극복하고 돌아온 한화 정현석과 투타 맞대결도 펼쳐 뜨거운 박수도 받았다.
정현욱의 재기는 프로야구팬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감동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구위에 만족하지 못한 순간 미련 없이 마운드에서 내려오기로 결정했다. 정현욱의 친정팀 삼성은 은퇴 소식을 듣고 곧바로 그에게 코치직을 제의했다. 삼성 시절 클럽하우스에서 훌륭한 리더 역할을 하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정현욱도 삼성이 내민 손을 잡았다. 2017 시즌 친정팀 삼성의 1군 불펜 코치로 새 출발한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A-로드의 씁쓸한 은퇴…‘약쟁이’ 오점 남겼다 한국 프로야구의 레전드 스타들만 그라운드를 떠난 게 아니다. 2016년 메이저리그에서도 ‘A-로드’가 사라졌다. 알렉스 로드리게스(41·뉴욕 양키스)는 시즌이 한창이던 8월 8일(한국시간) 기자회견을 통해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닷새 후인 13일 탬파베이와의 홈경기에서 화려했던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로드리게스는 출발부터 슈퍼스타의 운명을 타고난 선수였다. 1993년 신인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시애틀의 지명을 받았고, 이듬해인 1994년 18세의 어린 나이에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다. 스무 살이던 1996년에는 타율 0.358, 홈런 36개, 123타점을 기록해 처음으로 올스타에 선정됐다. 1998년에는 역대 최연소 40홈런-40도루를 달성했다. 역대 최초로 50홈런을 친 유격수도 로드리게스였다. 로드리게스는 시애틀(1994년~2000년)과 텍사스(2001~2003년)를 거치면서 점점 더 대단한 선수가 됐다. 2003년 처음으로 아메리칸리그 MVP에 오른 뒤, 2004년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 구단인 양키스로 이적했다. 그 후 2005년과 2007년에 두 차례 더 리그 MVP를 수상했다. 실력만큼 인기도 최고였다. 총 14차례나 올스타로 뽑혔다. 그 안에는 2000년부터 2008년까지 9년 연속 출전이 포함돼 있다. 2009년 이 화려했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남았다. 처음으로 로드리게스가 스테로이드성 금지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는 “텍사스 시절 벌어진 일이다. 양키스 이적 후에는 약물에 손댄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2013년 시즌 도중 이 고백마저 거짓이라는 점이 들통났다. 로드리게스에게 약물을 공급한 의사가 양심선언을 했다. 그는 그해 남은 경기는 물론, 2014시즌 전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다. 기나긴 쉼표를 찍고 돌아온 로드리게스는 예전의 위력을 잃었다. 지난해 151경기에서 타율 0.250, 홈런 33개, 86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2016년에는 벤치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타율도 2할대 초반에 머물렀다. 결국 로드리게스는 어려운 결심을 했다. 은퇴 경기였던 탬파베이전에 3번 타자 3루수로 선발 출장했고, 1회 1사 1루 첫 타석에서 중전 2루타를 때려냈다. 로드리게스의 메이저리그 2784번째 경기이자 현역 생활 마지막 게임이었다. 통산 타율 0.295, 3115안타, 696홈런, 2086타점, 2021득점, 392도루. 영욕의 세월을 마감한 그는 양키스 구단 특별 자문 겸 인스트럭터로 제2의 야구 인생을 시작했다. [은] |
구로다 히로키의 특별한 작별…히로시마팬과 ‘의리’ 지켰다 일본 프로야구 히로시마는 2016년 ‘야구장인’으로 통하는 투수 구로다 히로키(41)와 어려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구로다는 지난 10월 니혼햄과의 일본시리즈를 함께 준비하던 동료들에게 “이번 시리즈를 끝으로 유니폼을 벗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지난 2년 동안 좋은 팀에서 뛰었고 멋진 꿈을 꿨다. 2년 동안 진심으로 고마웠다”는 인사도 전했다. 이어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은퇴를 전격 선언했다. 일본에서 메이저리그,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이어진 20년간의 선수 생활이 그렇게 막을 내렸다. 1997년 히로시마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구로다는 20시즌 동안 일본과 메이저리그에서 통산 533경기에 등판해 203승 184패를 쌓아 올렸다. 이 가운데 히로시마에서 거둔 승리가 총 124승. 전통적인 약팀이던 히로시마 소속이라 승수에서는 손해를 많이 봤지만, 294번의 선발 등판 가운데 76번을 완투하면서 ‘고독한 에이스’로 통했다. 자신의 야구에 대한 신념도 확고했다. 그는 2008년 LA 다저스와 3년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그러나 2011년부터는 계속 1년 계약만 해왔다. 나이가 들면 계약기간을 1년이라도 더 늘리려 애쓰는 다른 선수들과는 달랐다. “다년계약을 하면 아무래도 힘을 남겨놓기 마련이다. 매년 내 가치를 입증하겠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2015년에는 몇몇 구단이 200억 원이 넘는 거액을 제시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잘 던질 수 있을 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히로시마로 귀환했다. 그리고 불혹이 넘은 2016년도 10승 8패, 평균자책점 3.09이라는 성적을 올려 히로시마가 25년 만에 센트럴리그에서 우승하는 데 힘을 보탰다. 우승을 확정하는 마지막 경기의 승리 투수도 구로다였다. 구로다와 히로시마의 의리 역시 유명하다. 구로다의 2006년 마지막 등판 경기 도중, 히로시마 팬들은 관중석에 대형 현수막을 걸었다. ‘미래에 빛나는 그날까지 응원하겠다. 눈물을 흘린다면 그대의 눈물이 되겠다.’ 그 시즌을 끝으로 FA 자격을 얻는 구로다에게 팬들이 보내는 편지였다. 시민 구단인 히로시마는 구로다 같은 대형 FA 선수를 잡을 능력이 없었다. 히로시마 팬들도 이미 아름다운 작별을 예감했다. 그러나 그 장면에 마음이 움직인 구로다는 팀에 1년 더 남았다. 이어 1년 뒤에는 일본 내 다른 구단이 아닌 미국 진출을 택하면서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히로시마 선수에게 공을 던질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떠날 때 남겼던 “언젠가 다시 히로시마로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2015년 이미 지켰다. 그가 히로시마의 ‘심장’이라 불렸던 이유다. 히로시마 구단은 구로다의 등번호 15번을 구단 역사상 세 번째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그 이유로 “팀의 고난과 우승을 모두 경험한 구로다는 우리에게 돈보다 더 귀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웠다”고 설명했다. 구로다는 히로시마로부터 명예시민상도 받았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