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부터 상대전적 26승 17패…언제나 한국만 만나면 ‘총력전’ 펼쳐
#일본과 대만 사이에 낀 한국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이 주최하는 프리미어12는 야구 세계랭킹 상위 12개국이 참가하는 국가대항전이다. 3회째를 맞은 올해 대회에는 한국·일본·멕시코·미국·대만·베네수엘라·네덜란드·쿠바·도미니카공화국·파나마·호주·푸에르토리코 등 12개국이 출전 자격을 얻었다. A조에 속한 멕시코·미국·베네수엘라·네덜란드·파나마·푸에르토리코는 멕시코에서, B조에 포함된 한국·일본·대만·쿠바·도미니카공화국·호주는 대만에서 각각 조별리그를 치른 뒤 각 조 2위에 든 4개국이 11월 21일 일본 도쿄돔에서 슈퍼 라운드를 벌여 결승 진출팀을 가리는 방식이다.
한국은 2015년 1회 대회에서 초대 우승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2019년 2회 대회에서는 일본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해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에 걸려 있던 단 한 장의 도쿄올림픽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그러나 이 대회를 기점으로 한국 야구의 위상을 둘러싼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기 시작했다. 강호로 분류됐던 미국과 멕시코를 잇달아 꺾었지만, 정작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과 대만에게는 1승도 거두지 못해서다. 당시 한국이 기록한 3패는 모두 일본전 2경기(슈퍼 라운드·결승전)와 대만전 1경기(예선 라운드)에서 나왔다.
아시아 야구 3강으로 꼽히는 한국·일본·대만은 오랜 기간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쌓아왔다. 특히 객관적인 전력상 가운데에 위치한 한국은 '한 수 위' 일본과 '한 수 아래' 대만 사이에서 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해야 했다. 일본과 대만 양국이 모두 "한국은 무조건 잡는다"는 각오로 국제대회에 나섰기 때문이다. 국가대표팀 간의 라이벌전은 각국 프로야구 리그의 수준과는 또 다른 문제다. 한국은 일본을 만날 때마다 기량 이상의 집중력으로 맞섰고, 대만은 늘 한국전에 가장 강한 선발투수를 기용해 전력의 한계를 극복했다. 한국과 일본이 "가위바위보를 해도 한일전은 이겨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는 '숙적'이라면, 대만은 중요한 고비에서 종종 한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난적'이었다.
#대만전이 힘겨운 이유
잘 알려진 대로 대만 프로야구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다. 미국·일본·한국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프로 리그(1990년 출범)를 운영하고 있지만, 리그 역사가 승부조작을 비롯한 각종 사건·사고로 얼룩지면서 좀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기회를 놓쳤다.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은 "한국 프로야구가 마이너리그 더블A에서 트리플A 정도 수준이라면, 대만 프로야구는 싱글A나 루키리그 정도 수준"이라고 평가하곤 한다. 실제로 대만은 한국에서 뛰다 퇴출된 외국인 선수들이 선수 생활 연장을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리그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만의 야구 사랑은 한국과 일본 못지 않다. 여전히 야구를 '국기'라 부르고, 국제대회에서 한국과 일본을 꺾는 일을 '사명'으로 여긴다. 특히 '두 수 위'인 일본전보다 승리 가능성이 더 큰 한국전에 주요 전력을 아낌없이 투입한다.
이런 이유로 한국 야구대표팀은 대만전을 앞두고 늘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한국 야구 역사에 '참사'로 남은 대회의 대부분이 대만전 패배로부터 시작된 탓이다. 2003년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대회가 대표적이다. 한국은 예선 1차전에서 대만을 만나 연장 10회 접전 끝에 4-5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고, 그 결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본선행 티켓을 놓쳤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깜짝 동메달을 수확한 뒤 한창 국제 무대 경쟁력을 높여가던 시기라 더 뼈아팠다. 반대로 대만은 이 경기 승리 장면을 지상파 방송 개시와 종료 때 나오는 국가 연주 화면에 삽입했을 정도로 큰 의미를 부여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예선전의 2-4 패배도 치명적이었다. 대만은 당시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던 궈홍치(당시 LA 다저스)와 장첸밍(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 원투펀치를 한국전에 '1+1'로 모두 기용해 승리를 향한 절박함을 드러냈다. 결승전을 방불케하는 대만의 투수 운용에 덜미를 잡힌 한국은 목표로 했던 금메달 레이스에 급제동이 걸려 끝내 동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와야 했다. 심지어 이 대회에선 한국 야구를 꺾으려던 의지가 불필요한 장외 신경전으로 이어져 눈총을 받기도 했다. 이른바 '인터뷰 거부' 사건이다. 대만은 한국전에 궈홍치와 장첸밍을 모두 내보낼 시나리오를 짜놓고도 경기 당일도 아닌 개막 하루 전 공식 인터뷰 시간에 둘의 인터뷰를 모두 불허했다. 한국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도 모두 반려된 것은 물론이다. 투수들의 불펜 피칭 장면은 통상적으로 사진 촬영이 허용되는데, 대만만 "궈홍치와 장첸밍의 불펜 피칭 장면은 찍을 수 없다"고 막기도 했다. 둘은 이미 외부에 전력분석 자료가 많이 노출된 투수인데도 굳이 꽁꽁 감추는 제스처로 비난을 받았다.
이뿐만 아니다. 당시 대만 대표팀을 이끌던 예치시엔 감독은 영어에 능통했지만, "한국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답변은 중국어로 하겠다"고 말해 통역 담당 직원을 당황하게 했다. 또 정해진 인터뷰 시간이 다 됐는데도 일부러 "선수들에게 훈련 지시를 하고 가겠다"며 시간을 끌었고, 대만 선수단 훈련이 시작된 뒤에는 결국 "대회가 시작될 때까지는 누구와도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말을 바꿨다. 한참 기다리던 한국 취재진은 아쉬움을 삼킨 채 물러났다. 더 놀라운 건 몇 시간 뒤 아시안게임 공식 뉴스 서비스에 예치시엔 감독의 영어 인터뷰가 상세하게 실렸다. '한국에게만큼은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겠다'는 게 당시 대만 대표팀의 속내였다.
승리로 이어지긴 했어도 내용상 마지막까지 진땀을 흘린 경기는 더 많았다. 특히 일본이 프로 선수들을 파견하지 않는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주로 그랬다. 한국은 1998년 방콕 대회와 2002년 부산 대회 결승전에서 대만에 1점 차로 힘겹게 이겼다. 안방에서 열린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결승에서도 마찬가지. 최종 스코어는 6-3이었지만, 7회까지는 2-3으로 뒤져 패색이 짙어 보였다. 7회 무사 만루 위기를 무실점으로 간신히 넘기기도 했다. 8회 초 역전 드라마가 펼쳐지지 않았다면 금메달이 날아갈 뻔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예선전에선 1회부터 7점을 뽑고도 6회 8-8 동점을 허용해 망연자실한 적도 있다. 결국 9-8 한 점 차로 겨우 승리했다.
#대만에 실력으로 졌다?
대만은 오랫동안 한국에 '장타력이 뛰어난 대신 마운드와 수비가 약하고 타격의 정교함이 떨어지는 팀'이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홈런과 같은 '큰 것 한 방'만 조심하면 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제 대만의 국가대표급 선수들은 해묵은 약점을 거의 극복해낸 모양새다. 마운드와 수비 모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성장했다. 2017년 11월 열린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APBC)은 '달라진 대만 야구' 경계령이 떨어진 출발점과도 같았다. APBC는 24세 혹은 프로 3년 차 이하 선수들에게 국제대회 출전 경험을 주기 위해 한국·일본·대만·호주가 의기투합해 만든 대회였다.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한국 대표팀은 당시 대만전에서 1-0으로 신승했다. 그 경기에 대만이 내세운 선발 투수는 일본 프로야구 지바롯데 마린스에서 뛰고 있던 천관위였다. 지금은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이름이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 타자들은 출중한 실력을 갖춘 생소한 투수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국 간판 타자 이정후의 적시 3루타로 간신히 결승점을 뽑는 데 성공했지만, '한 방'이 있는 대만과 1점 차 승부를 펼치느라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을 때까지 마음을 졸여야 했다.
심지어 이듬해 열린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선 첫판부터 대만에 1-2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한국은 에이스 양현종이 출격했고, 대만 대표팀은 이전과 달리 최정예 멤버를 꾸리지 못했는데도 그랬다. 한국 타자들은 대만의 은행원 출신 선발 투수와 실업 야구에서 뛰는 불펜 투수들에 밀려 점수를 뽑지 못했다. 선수들의 몸값은 점점 오르는데 정작 리그의 경쟁력은 뒷걸음질치고 있던 한국 야구에 대만 야구가 다시 한 번 경종을 울렸다.
설상가상으로 2019년 프리미어12에서는 대만에 0-7로 참패하는 굴욕을 맛봤다. 또 다른 한국의 에이스 김광현이 3⅓이닝 3실점으로 조기 강판했고, 타선은 투수로 전향한 지 얼마 안 된 대만 선발을 공략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국 야구 관계자들 사이에서 "이전에는 '기세'에서 밀렸다면, 최근에는 '실력'으로도 확실히 밀리는 것 같다"는 한탄이 나오기 시작했다.
#항저우 결승에서 3연패 끝
그 걱정은 지난해 9월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까지 계속 이어졌다. 한국은 조별리그 B조 두 번째 경기에서 대만을 만나 0-4로 완패했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과 프리미어12에 이은 국제대회 대만전 3연패였다. 이때 한국전에 등장한 호적수가 바로 린여우민이다. 이 경기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는 그에게 '한국 킬러'라는 별명이 붙는 계기가 됐다. 한국 선발 투수 문동주가 4이닝 2실점 하고 물러난 사이, 린여우민은 6이닝 4피안타 6탈삼진 무실점으로 한국 타선을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그가 마운드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선두 타자가 출루하지 못했고,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들어간 것도 2회 2사 2·3루 기회가 유일했을 정도다. 한국은 2-0으로 앞선 8회 초 2사 2루 추격 기회를 잡았지만, 4번 타자 강백호가 유격수 땅볼로 물러나 반격 기회를 잡지 못했다. 반면 대만은 8회 말 2사 2·3루에서 린쯔하오가 한국 불펜 투수 고우석을 2타점 중전 적시타로 두들겨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또 아시안게임에서 또 대만에 진 한국은 고개를 숙인 채 경기장을 떠났다.
그러나 야구의 여신은 가장 중요한 결승전에서 다시 한국의 손을 잡았다. 선발 투수는 예선과 똑같은 문동주와 린여우민이었지만, 선수들은 "이제 우리도 타격감이 올라왔다. 지난 번과는 다를 것"이라던 각오를 그라운드에서 실현했다. 이번엔 문동주가 6이닝 3피안타 무사사구 7탈삼진 무실점으로 반격해 차세대 국가대표 에이스의 탄생을 알렸고, 5일 만에 다시 만난 린여우민(5이닝 2피안타 2볼넷 2실점)과의 리턴 매치에서도 완승했다. 6회 1사 2루 마지막 위기에선 대만 2~3번 타자 린쯔웨이와 린리를 차례로 3구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자신이 던진 공 6개에 대만 간판 타자 두 명이 정확히 6번 헛스윙을 하자 평소 차분하던 문동주마저 주먹을 불끈 쥐고 가슴을 팡팡 치며 포효했다. 한국은 그렇게 2010년 광저우, 2014년 인천,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에 이은 4회 연속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어 두 달 뒤 다시 열린 APBC에서도 '젊은 대표팀'이 대만에 6-1로 완승해 모처럼 한 수 위의 기량을 뽐냈다.
#프리미어12에서 다시 꺾인 기세
다만 한국은 항저우 아시안게임 결승과 APBC에서의 연승 기세를 오래 이어가지 못하고 이번 프리미어12 대만전에서 또 다시 패배의 쓴맛을 봤다. 이와 함께 한국은 프로 선수가 처음 참가한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이후 국제대회에서 대만 상대 전적 26승 17패를 기록하게 됐다. 다만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부터 이날까지 최근 6년간의 맞대결 성적은 2승 4패로 밀리는 추세다. 항저우 때부터 한국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류중일 감독도 이번 프리미어12에서 다시 대만에 승리를 내준 뒤 "정말 아쉽다"며 완패를 인정했다. 고영표와 곽빈을 놓고 저울질하다 고영표를 대만전 선발로 선택했던 류 감독은 "(잠수함 투수인) 고영표가 상대 좌타 라인을 못 막은 게 패인이다. 2사 만루에서 체인지업을 던졌는데 잘 떨어지지 않아서 큰 것을 맞았다"고 안타까워했다. 다만 타선이 0-6으로 뒤지다 3점을 쫓아간 것과 관련해선 "대만 투수들이 워낙 좋다. 선발도 그렇고, 불펜도 좋았다. 그래도 다음에 대만을 또 만나면 공략해야 한다. 계속 연구하겠다"고 다짐했다. 3경기째 한국전에서 호투한 대만 투수 린여우민은 "한국처럼 강한 팀을 이겨서 정말 기쁘다"고 치켜세운 뒤 "지난해 아시안게임에서 만난 경험이 있어서 큰 부담은 없었다. 타자들이 일찌감치 6점을 내줘서 편하게 던질 수 있었다"며 공을 돌렸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