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다리인 듯 아닌 듯 알쏭달쏭
▲ 줄곧 칩거 중이던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 11월 12일 집을 나서고 있다. 최근 유세 행보를 시작함으로써 일단 이회창 후보한테서 한 걸음 멀어진 기분이다. | ||
지금 한나라당 상황은 박 전 대표를 깊은 생각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이명박 후보 측에서는 박 전 대표가 당초의 약속대로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믿고 싶어 하지만 박 전 대표 지지세력 중에서는 ‘절대 이명박은 안 된다’고 외치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곽성문 의원과 김병호 의원의 탈당은 ‘반이명박 세력’의 움직임을 부추길 것이라는 전망이다. BBK 사건 등 이명박 후보에 대한 의혹이 어떤 방향으로 진전될지도 알 수 없다. BBK 사건의 향방에 따라서는 원칙과 소신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박 전 대표로서도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나서는 이탈세력을 잡을 명분이 부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한나라당이 제2의 내분사태를 맞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선 과정에서부터 이어진 ‘이명박 vs 박근혜’의 내분에 이어 ‘이명박 vs 이회창’으로 이어지는 제2의 내분이다. 여기에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이 박근혜 전 대표다. 이미 박 전 대표 지지세력 중에는 이탈세력이 생겨났다. 지난 29일 친박 의원으로 이명박 후보에 대해 비판적인 위치에 서있던 곽성문 의원이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탈당한 데 이어 다음날에는 김병호 의원이 뒤를 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며 이회창 후보를 선택했다.
당내에는 앞으로도 추가 탈당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나라당의 친박 성향의 한 보좌관은 “아직은 무어라 말할 수 없다. BBK 검찰 수사 발표가 기점이 되리라고 본다”면서 “이명박 후보에 대해 불만을 가져왔던 이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동요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가시적인 움직임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얼마전 박근혜 전 대표 지지세력인 ‘박사모’와 ‘파랑새단’도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한 바 있다. 파랑새단은 팬클럽인 박사모에 비해 언론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국적으로 2만여 명의 회원을 가진 적지 않은 규모의 조직이다. 파랑새단의 강동훈 기획단장은 지난 2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회창 후보를 선택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고민이 없었다”면서 “이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박근혜 전 대표를 살리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강 단장은 이어 “다들 눈치만 보고 있다. 곽성문 의원 탈당 이후 연쇄적으로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하기도 했다. 경선 당시 박근혜 전 대표 캠프에서 일했던 인사들 중 일부도 이회창 후보 캠프에 합류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친박 세력들의 ‘반이명박’ 행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박 전 대표는 곽성문 김병호 의원의 탈당에 대해 “안타깝다” “그러시면 안 되는데…”라며 말을 아꼈다. 그리고 두 의원의 탈당 직후인 30일 박 전 대표는 ‘이명박 후보 지지’ 유세에 나섰다.
박 전 대표는 전남 무안에서 가진 첫 번째 유세에서 “이번에 이명박 후보를 선택해주신다면 잘못된 나라를 바로잡고 활력이 넘치는 나라로 만들겠다”며 이 후보 이름을 두 번이나 명시하는 등 당초 예상을 뛰어 넘는 수위를 보여 눈길을 끌었다. 그동안 당 관계자들은 박 전 대표가 ‘정권교체’를 언급하는 수준에서 유세를 할 것으로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명박 후보 측은 박 전 대표가 마음을 털고 이 후보 지지 방침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며 한껏 고무돼 있다.
그러나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이다. 박 전 대표는 지원 유세에 나서기 하루 전인 29일 고 육영수 여사 탄생 82주년을 맞아 충북 옥천에서 열린 숭모제가 끝난 후 ‘검찰 조사결과 이 후보가 연루된 것으로 나와도 유세를 계속할 것이냐’는 질문에 “검찰에서 발표를 하면 그것은 그 때 보고 또 판단할 일”이라고 답했다. ‘약속대로 지원에 나서긴 하지만 BBK 사건 수사 발표 이후 지지를 계속할지의 여부는 판단하지 못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멘트라는 해석이 강했다.
일부에서는 박 전 대표가 이 후보의 이름을 명시하며 지지 유세를 한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이미 박 전 대표가 이 후보에게 ‘약속’한 게 있는 만큼 유세 지원을 더 이상 미룰 명분이 없었으며 지지 유세를 하는 한 이 후보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박 전 대표가 이 후보를 지지할 ‘결심’을 굳힌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섣부르다. 오히려 지지 세력마저 이탈하고 있는 상황에 약속과 신의를 쉽게 저버리지 않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 노련해 보인다”고 설명했다.
어찌 됐든 이명박 후보 측으로서는 아직도 박 전 대표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박 전 대표의 움직임에 따라 이명박 후보에겐 위기가 될 수도, 대세론을 끝까지 이어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이회창 후보 캠프로 건너간 두 의원들에 대해 이명박 후보 측은 “개인적으로 총선을 겨냥한 선택”이라며 평가 절하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들의 지역구가 대구와 부산으로 TK·PK 지역 출신이라는 점이 한나라당으로서는 마음에 걸린다. 곽성문 의원에 이어 김병훈 의원까지 탈당하자 한나라당은 ‘배신자’라고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두 의원의 지지선언으로 고무된 이회창 후보 측은 박 전 대표에 대한 러브콜을 계속하고 있다. 이 후보는 지난 29일 한 토론회에서 “노 대통령이 총리 역할 분담론을 주장하며 일정한 역할을 나누는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이 후보가 박 전 대표에게 ‘책임총리직’을 제안하며 제휴를 시도할 여지를 남겨 놓는 발언이다.
한 친박 의원은 기자에게 “우리는 모범답안대로 갈 것”이라며 박 전 대표의 향후 행보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범답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리송하다. 결국은 BBK 수사결과가 말해 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과연 이명박 후보와 이회창 후보 사이에 선 박 전 대표가 선택하게 될 ‘모범답안’은 누가 될지 아직도 분명히 말하기는 이른지도 모른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