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2월19일 대통령 당선 확정 직후 선물받 은 하회탈을 써보고 있는 노무현 당선자. | ||
특히 총선이 정권 출범 후 1년여 만에 치러지기 때문에 노 당선자의 입장에서는 현재 국회 의석 분포를 획기적으로 바꾸지 못할 경우 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일찍 레임 덕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노 당선자는 이에 대한 위기감을 ‘반통령(半統領)’, ‘반권(半權)’이란 말로 표현했다. 그는 지난 23일 민주당 연찬회에서
“요즘 내가 당선자 이러고 다니는데 혼자서 조용히 생각하면 내가 대통령 당선자인지 ‘반통령’ 당선자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다음 총선에서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반통령’이다.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고 ‘반권’을 잡은 것이 아닌가. 꼭 이겨야 한다”고 말했다.
12•19대선 승리 후 노 당선자가 보여준 일련의 행보에는 이 같은 절박감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분석이다. 이중 민주당 개혁과 개혁세력의 외연 확장은 총선 승리를 위한 ‘주체역량 강화’라는 점에서 노 당선자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대목.
노 당선자는 일단 ‘당•정 분리’의 취지를 존중한다는 입장에서 민주당 개혁은 현재 활동이 진행중인 당 개혁특위(위원장 김원기 고문)에게 일임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살생부’ 파문을 계기로 당내 구주류의 반발이 조직화하면서 개입의 강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노 당선자는 민주당 연찬회에서 “우리 스스로 (대통령) 선거에 이겨 놓고도 정권을 잡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다”며 “국민에게 신뢰받는 정치를 만들고, 그런 민주당을 만들고, 그를 통해 합리적인 정치가 이뤄지도록 해야 정치하는 보람을 찾을 수 있다”고 개혁의 필요성을 다시금 강조했다.
그는 이어 민주당에 “가지고 있는 것 중 부당한 것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고 구체적으로 총선 후보 공천권한을 “국민에게 돌려주라”고 제시했다.
▲ 지난 23일 노무현 당선자가 민주당 연찬회에 참 석, 연설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 총 선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말했다.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노 당선자의 한 측근은 “노무현 정부 개혁의 성패는 결국 국민의 지지를 얼마나 이끌어내느냐와 개혁 주체세력을 얼마나 튼튼히 꾸리느냐에 달려 있으며 전자는 정책을 통해, 후자는 개혁의 이념과 명분을 함께 주도할 세력의 충원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며 “이른바 ‘1만 개혁 엘리트 양성론’ 등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 외부에서는 민주당보다 노 당선자와 ‘코드’가 훨씬 잘 맞는 개혁국민정당도 김원웅 의원을 새 대표로 선출하고 오는 4월 경기 고양•덕양 갑 보궐선거에 유시민 전 대표를 출마시키기로 하는 등 본격적인 세 확산에 돌입했다.
이와 관련, 노 당선자는 민주당 개혁이 구주류의 반발로 지지부진할 경우 소장 쇄신파 그룹들을 중심으로 개혁국민정당과 한나라당 내 개혁그룹 일부와 함께 ‘헤쳐모여’식 합당을 통해 ‘신(新) 여권’을 형성하는 문제도 신중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 당선자가 대야 관계에서의 ‘파격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도 내년 4월 총선과 관련해 주목할 대목. 노 당선자는 이미 총선 후 야당과의 권력분점 가능성을 언급한 데 이어 서청원 대표, 이규택 원내총무 등 한나라당 지도부와의 회동을 ‘자청’하는 등 대야 관계에서 변화를 도모중이다.
여기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치개혁실은 여야 정당지도자와 국회의장을 비롯한 3부 요인들이 참여하는 ‘전국정상회의’(가칭)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자고 주장하고 나선 상황이다. 노 당선자에게 총선 전까지 야당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느냐는 국정 운영의 가장 큰 과제다.
‘소수 정권’의 처지에서 거대 야당과 대립해 봐야 생채기는 고스란히 여권에 돌아올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고 인위적 정계개편을 추진할 힘도 명분도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새 정부 개혁성과에 대한 중간평가로 17대 총선을 설정하기에는 기간이 너무 짧아 야당의 협조를 이끌어내지 않으면 그야말로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현실이다.
노 당선자의 ‘몸 낮추기’와 함께 청와대 정무라인을 김원기 정치고문―문희상 비서실장―유인태 정무수석 등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인사들로 ‘라인업’한 것도 대야 관계를 원만히 풀어야 한다는 절박감의 산물이다.
그러나 노 당선자측의 이 같은 대야 해법이 단순히 야당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소극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당선자 주변의 분석이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최근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을 만났더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김대중 정권 출범 초기 야당은 여권의 정계개편 공세가 집중되자 대여 투쟁을 통해 내부 분란을 수습하곤 했는데 노 당선자는 평화공세를 통해 오히려 야당을 교란시키는 것 같아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하더라”며 “한나라당도 당의 향후 진로를 놓고 내부 갈등이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 모르는 만큼 노 당선자가 계속 명분을 갖고 ‘대야 포용정책’을 구사한다면 거대 야당의 힘을 무력화시킴은 물론 ‘한나라당발 정계개편’을 자연스럽게 유도해 내는 효과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마지막으로 노 당선자의 선거구제 개편 구상은 총선 승리의 도구(tool)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에서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다. 노 당선자는 대선 승리 후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선거구제 개혁’을 주장했고 이의 일환으로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제시했다.
노 당선자는 그러나 한나라당이 이를 ‘호남 독식, 영남 분할의 정계개편 포석’이라고 반대하자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서라면 어떤 내용이라도 좋다는 쪽으로 선회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권역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다.
권역별 정당명부제는 비례대표의 수를 대폭 늘리고 권역별로 특정 정당이 의석을 독점할 수 없도록 한 것이 특징. 정당명부제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정치개혁 협상 중 ‘난제 중 난제’라는 선거구제 합의를 이견없이 끌어낼 최적의 방안이란 점 때문이다.
특히 노 당선자의 제안에 대해 한나라당이 ‘소선거구제+권역별 정당명부제’ 추진의사를 밝혔고 민주노동당, 자민련 역시 적극 호응하고 나서 합의 전망이 매우 밝은 편.
노 당선자측은 권역별 정당명부제가 도입될 경우 영남에서의 민주당 전패 양상이 개선되고 전통적 우세지역인 수도권의 우위가 유지될 경우 총선 승리 전망이 그만큼 밝아진다는 점을 들어 앞으로도 노 당선자가 직접 나서 선거구제 개편의 필요성을 정치권과 국민들에게 강조할 계획이다.
한편으로는 한나라당엔 총선 결과에 따라 권력을 나누겠다는 점과 내각제 개헌의 조기 공론화를 약속해 혹 있을지도 모를 선거구제 개편에 대한 반발 기류를 무마시킨다는 구상이다. 겉으론 평온하기만 한 여야 정국, 하지만 물밑에선 내년 총선을 향한 진군나팔이 벌써부터 울려퍼지고 있다. 박영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