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N, 한국 50대 명소로 선정...마의태자 전설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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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에서 본 운해
[대전=일요신문] 육심무 기자 = 성난 민심의 물결이 군주인 배를 뒤집는다는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단어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채택될 만큼 대통령 탄핵과 현직 대통령 특검이 시작된 다사다난했던 병신년 한해를 차분히 돌아보고, 정유년 새해를 소박하지만 뜻 깊게 맞이하고픈 분들에게 충청권 해맞이 장소로 충북옥천군옥천읍삼청리 장령산의 용암사(주지 현관스님)를 추천한다.
대한불교조계종 법주사(法住寺)의 말사로 정통 불교의 수양 도량으로 천축국(天竺國)에 갔다가 귀국한 의신조사(義信祖師)가 552년(진흥왕 13년)에 창건해 본사인 법주사보다 오히려 1년 먼저 창건돤 1464년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량이다. 용암사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미국의 CNN 방송이 한국에서 꼭 보아야할 명소 50곳 가운데 하나로 선정할 만큼 장엄하고 빼어나 전국 각지에서 일출을 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사철 이어지고 있다.
또 고려에 항복해 치졸한 안락함을 이어가려던 신라 황실의 결정에 반대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친 마의를 입고 속세를 떠나야 했던 비운의 황태자 마의태자의 전설이 서린 마애석불도 새해의 기원을 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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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 전경
용암사의 일출은 우연히 이 곳을 찾은 사진 작가가 찍은 일출 작품이 권위있는 공모전에 입상하면서 사진 작가들 사이에 일출 촬영의 숨겨진 명소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용암사는 사찰 입구까지 승용차가 올라갈 수 있어 노약자들도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보물인 고려시대 쌍 삼층석탑과 충북도지정문화재인 마애불이 있지만 매점은커녕 그 흔한 커피 자판기도 없어 집에서 보온병을 준비하거나, 옥천 읍내에서 간단한 음료를 챙기는 것이 좋다.
물맛이 좋은 시원한 약수는 항상 흐르고 있고 새해에는 주지스님과 신도들이 해맞이 객들을 위한 떡국을 제공하기도 한다.
소박하고 접근이 쉬운 새해 해맞이 장소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아무런 행사나 알리는 이가 없음에도 매년 정초면 1000명이 넘는 해맞이 객들로 좁은 경내가 붐비고 있다.
경내가 좁고 주차공간도 몇 대 안돼 새해 해맞이를 이 곳에서 하려는 분들은 산 아래 주차하고 10~20분 정도 걸어 올라갈 생각을 하면 일출 시간을 못 맞춰 낭패 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용암사라는 사찰 명칭은 경내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용암사로 이름 지었으나, 일본인들의 만행으로 파괴되어 현재에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신라 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이곳 용암사에 머물면서 용바위 위에 서서 신라의 수도 경주가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하였다는 설화와 마의태자가 해탈하여 부처가 된 흔적이 바위에 새겨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또 마의태자를 존경했던 석공이 바위에 태자의 상을 부처님의 모습으로 새긴 것이 마애불이라는 설과 마의태자를 추모하였던 신라의 공장(工匠) 후손이 염불하던 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미륵불을 조각하였다는 등 마의태자와 관련된 설화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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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에서의 일출 촬영
고려초 새 왕조의 신라 지우기와 임진왜란 등의 병화 등으로 인해 오랫동안 용암사는 역사의 기록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창건 이후의 중수·중건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고려시대 양식의 쌍 석탑과 마애불상이 고려시대에도 이어져왔음을 입증한다.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용암사가 없어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시대에는 명맥만 유지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경내에는 대웅전, 천불전, 산신각, 용왕각, 요사채, 범종각 등의 전각이 있다.
대웅전에는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하여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에는 5점의 탱화가 있는데, 그중 화법이 정교한 후불탱화와 고종 14년(1877)에 조성된 불교의 호법신을 묘사한 신중탱화(神衆幀畵)는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다.
대웅전 뒤에는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 사상을 상징하는 천불전이 있다.
삼세불을 중심으로 좌우, 뒷면에 작은부처가 빼곡하게 앉아 있고 천불전 뒤로 마애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3m 높이의 마애불은 연화대좌 위에 발을 좌우로 벌리고 서 있는 모습으로 눈은 가늘고 길며, 입은 작고, 코는 도드라져 있다.
어깨는 넓고, 팔은 다소 길게 표현돼 신라 조각이 형식적으로 변해가던 고려 초기 또는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인상적인 것은 마애불이 붉은빛을 띠고 있는 점이다. 암벽의 본래 빛깔이 붉은 것은 아니고 누군가 붉은 물감으로 칠을 한 것이다.
충북유형문화재 17호인 마애불은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 형태이며 높이 3m로,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마의태자가 신라 멸망을 통탄하며 유랑하던 중에 이곳에 머물다가 떠나자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그를 기리며 조성하였다고 하여 마의태자상이라고도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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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 쌍 석탑
보물 1338호로 지정된 용암사 동 서 쌍3층석탑은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것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이며 같은 형태의 석탑 2기가 자연 암반 위에 나란히 서 있는 쌍석탑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거의 체감 없이 비슷한 비율로 올린 특이한 형태이다.
용암사 쌍삼층석탑은 상륜부의 모습만 다를 뿐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 위에 놓인 3층 탑신이 체감률이 적어 안정감이 떨어진다.
각 부의 양식과 석재의 결구 수법도 매우 간략화한 양식을 보인다.
동탑이 4.3m로 4.13m인 서탑보다 조금 크다.
가만히 살펴보면 서탑이 동탑보다 이끼도 적고 깨끗함을 알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석탑이 대웅전 앞이 아닌 사찰의 북쪽 낮은 봉우리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이는 자연 지형의 보완이나 강한 기운에 대한 조화와 균형으로 이상적인 터를 조성한다는 산천비보사상에 따른 것이다.
현재까지 산천비보사상에 따라 건립된 석탑 중 유일한 쌍탑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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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사 주지 현관 스님
우리나라 어느 곳에나 있을 만한 산세에 평범하기보다도 작아 보이는 사찰은 허름해 보이는 이 곳에 대해 문화재청에서는 겉으로 보아서는 허름하고 못난 듯하나 실상은 비범한 가치와 훌륭한 자질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정유년 새해 밝아오는 새벽의 아름다움과 광대무변한 하늘에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을 보며 새해의 계획을 다져보기에 더할 나위 없는 명소이다.
현관 스님은 “조용한 작은 도량이지만 일출을 보며 자연의 경이로움을 향유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다”면서 “추운 날씨에 대비해 옷을 잘 챙겨 입으시고 마애불이나 경사가 급한 곳에 오르는 것은 위험하니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다.
smyouk@ilyods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