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조순형 의원, 신기남 의원, 천정배 의원 | ||
원래 탈레반은 회교원리주의로 무장한 아프가니스탄의 몰락한 학생정권을 말한다. 당초 이 별명은 급진적인 정치노선을 취하는 의원들을 비아냥거리는 차원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 강경 개혁파들이 당내 신주체 세력으로 급부상하면서 탈레반이란 별명이 ‘훈장’처럼 인식되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탈레반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신기남 의원도 지난 14일 “나는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으며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다. 탈레반은 애칭이라 생각하고 올바른 말을 계속해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강직한 원칙주의자들’, 탈레반은 과연 누구인가. ‘탈레반’이란 별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민주당의 지방선거 및 8월재보선 참패 이후 반노세력들의 ‘노 후보 흔들기’가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일부 친노파 의원들이 ‘노 후보 사수’에 나서면서부터.
당시 노 후보의 지지율은 10%대로 당선가능성이 희박한 것으로 전망돼 백지신당론, 후보단일화론 등 갖가지 대안이 거론됐다. 그러나 이들은 ‘국민경선후보’라는 명분과 원칙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당내에서는 이들을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고 원칙론만 내세운다는 의미에서 탈레반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 후보를 지지한 핵심측근이라고 해서 모두 탈레반으로 불리는 것은 아니었다. 김원기 고문, 정대철 최고위원, 정동채 당시 후보비서실장,이강래, 김경재, 이호웅, 임종석 의원 등이 모두 노 후보 사수에 나섰지만 이들은 탈레반으로 불리지 않았다.
탈레반의 기준이 친노 여부가 아니라 현실을 무시한다는 평판을 들을 정도로 정치적 명분과 원칙을 중시하는지 여부였기 때문. 당시 이같은 기준을 충족시켰던 대표적 인사로는 조순형, 신기남, 천정배 의원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사실 정치권에 입문한 이후 줄곧 명분과 원칙을 강조해 온 인물들이다.
조순형 의원은 당내에서도 언제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인사로 명성을 떨쳐왔고 국회활동에서도 당론보다는 원칙과 명분을 앞세우는 인사로 유명하다. 당내에서는 이런 그를 박상천 최고위원과 함께 ‘죽림 2현’이라고 부른다. 두 사람이 색깔은 다소 다르지만 지나칠 만큼 원칙과 논리에 집착, 따르는 사람이 없는 외로운 처지임을 빗대어 부르는 말이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천정배 의원도 소장파 중에서는 원칙론자로 알려져있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야당총재 시절 특보, 비서실 수석부실장, 아태재단 감사 등을 맡았지만 동교동계로 분류된 적이 없었다.
노 당선자가 당내 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는 세 불리가 역력했지만 정치개혁과 지역구도 타파를 할 수 있는 후보라는 이유로 앞뒤 재지 않고 노 당선자를 지지했다. 역시 인권변호사 출신인 신기남 의원도 김대중 대통령 특보 등을 지냈지만 동교동계로 분류되지 않았고 최고위원이 된 이후에도 소장파 의원들보다 더 진보적인 성향을 보여 정치적 위상에 걸맞지 않는 행보를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같은 특성 때문인지 이들은 모두 당내 정치개혁 관련 조직과 인연을 맺어왔다. 신기남 의원은 지난해 정치개혁실천위원장을 맡은 데 이어 선대위에서는 정치개혁 본부장에 임명됐다.조 의원과 천 의원 역시 선대위 정치개혁추진위(정개추)의 위원장과 총간사를 맡았다.
▲ 지난 12월 개혁파가 주도한 인적청산 요구 기자회견. | ||
이들의 기자회견은 그 자체로 당내에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기자회견 추진과정에서 조순형 의원은 ‘탈당 각오로 나서야 한다’고 제안, 원내교섭단체 구성 요건이 넘도록 20명 이상이 서명하는 등 또 한번 탈레반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같은 급진적 성향은 당선 이후 민주당을 추스르고 정국을 안정시켜야 하는 노 당선자에게 부담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노 당선자는 이들의 기자회견 직후까지만 해도 “당의 개혁요구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며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이후 ‘인적청산’에 반대하고 당개혁과 관련한 이들의 핵심 주장 중 하나인 ‘원내정당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노 당선자와 이같은 입장 차가 노정되면서 탈레반 사이에서도 미세한 분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탈레반 중 노 당선자의 신임이 가장 두터운 것은 역시 당내 후보경선 과정 초기부터 노 당선자를 지지했던 천정배 의원이다.
최근 노 당선자는 안가를 집무공간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 곳에 민주당 의원들을 불러 면담을 했는데 가장 먼저 초청을 받은 사람이 천정배 의원이다. 이에 따라 노무현 사단 중 중진그룹에서는 김원기 고문이 최고 실세라면 소장그룹에서는 천정배 의원이 최고의 파워맨으로 꼽히고 있다.
물론 천 의원은 노 당선자와의 이같은 신뢰관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직언을 서슴지 않아 가끔 노 당선자와 냉각기를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천 의원은 대선 이후에는 비교적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반면 조순형, 신기남 의원은 여전히 당 개혁에서 원론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인적청산 주장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다. 특히 조순형 의원은 최근 대통령직인수위 활동과 관련, 노 당선자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서 원칙에 충실한 탈레반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이 주축이 된 ‘서명파’들은 최근 ‘열린개혁포럼’을 구성하는 등 세 확산에 나서면서 상당한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 지난 16일 공식 발족한 ‘열린개혁포럼’은 18일 현재 이미 민주당 소속 전체의원(1백2명)의 과반을 훨씬 상회하는 61명을 확보하는 등 당내 최대 그룹으로 부상했다.
더구나 포럼에는 노 당선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정동영, 추미애, 천정배 의원 등은 물론 김경재, 이호웅, 유재건 의원 등 선대위 핵심 관계자와 이만섭, 김상현, 김근태, 김기재, 김덕규, 장재식 등 당의 중진의원들이 다수 포함돼 있어 명실상부한 당의 신 주체세력으로 불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포럼은 결성 초기 후단협의 김명섭, 송석찬 의원 등은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18일에는 두 사람도 취지에 동의할 경우 함께하기로 입장을 바꿨다. 또 당 개혁방안과 관련해서도 전체 포럼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할 예정이어서 당초 서명파가 주장했던 개혁안에 비해 상당히 완화된 안이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포럼의 이같은 ‘유연성’은 당 개혁특위의 개혁안 확정을 앞둔 상황에서 세 확대가 필요하다는 판단과 함께 당내 최대 그룹으로 배타적 기준을 적용할 경우 반발을 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조순형, 신기남 의원은 포럼의 이같은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현 시점에서는 당의 개혁을 위해 세 확산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일단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3인의 탈레반은 당선 이후 약간의 입장차를 보이면서도 ‘당 개혁’이란 목적을 위해 노력중이며 적어도 당분간은 노 당선자와 대립각을 세우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과거 민주당 구주류에게 그랬던 것처럼 노 당선자에게 ‘새로운 탈레반’이 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