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언덕은 없다’ 뿔뿔이 낮은 포복
▲ 노무현 대통령 | ||
“열린우리당이 있었더라면 앞으로 도울 일이라도 있고, 의지를 가질 수도 있었겠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서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7일 저녁 청와대 영빈관에서 참여정부 전직 인사들의 모임인 ‘청우회’ 회원 및 현직 참모들과 만찬을 함께하면서 한 말이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앞으로 자유인을 향한 발걸음을 내디딜 것이고, 정치적 역할은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특히 ‘청우회’ 모임에 대해서도 “이 모임도 정치적 비전을 추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8일에도 미국 뉴스 전문 채널 CNN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대통령을 그만두는 것은 정치도 그만둔다는 얘기”라면서 “정치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희망했던 것이 자유인이었으니까 자유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바 있으며 14일 제 2차 균형발전정책 보고회에서도 고향으로 돌아가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를 실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퇴임 후에도 정치에 강한 미련을 보이던 노 대통령이 대선 후 그 의지를 접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노 대통령의 이러한 입장은 친노 세력들의 사기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은 386 친노 세력들에 대해 ‘폐족(廢族)’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대선 패배에 대한 반성을 드러낸 것도 이러한 분위기의 표현이다. 그는 지난 26일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글 중에서 자신의 가족을 폐족이라 표현한다. 친노라고 표현되어 온 우리는 폐족이다. 죄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과 같은 처지”라고 표현했다. 안 위원장의 말 가운데는 ‘억울하다’는 뜻이 내포돼 있지만 한 친노 세력의 관계자는 “친노 세력들의 현재를 보여주는 말 아니겠느냐”며 씁쓸한 반응을 보였다.
노 대통령의 퇴임 후 정치 기반이 될 것으로 알려져 왔던 참평포럼도 지난해 12월 28일 활동 종결을 선언했다. 참여 정부의 전·현직 인사들이 참여해 만들어진 참평포럼의 해체로 친노 세력의 세는 더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서 나돌던 ‘영남신당론’의 기반이 참평포럼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기 때문에 참평포럼의 해체에 대해 남다른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정동영 후보가 예상을 넘는 참패를 하면서 대통합 민주신당 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친노 세력들에게 패배의 책임을 묻는 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친노주자’의 ‘빅3’ 격인 이해찬 전 총리, 유시민 전 장관, 한명숙 전 총리 등도 막판에 몰리고 있는 분위기다.
▲ 문재인(왼쪽), 안희정 | ||
이런 가운데 친노 세력의 대표적 인사들도 살길을 찾아 제각기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아직 우리는 실컷 울 여유가 없다”며 반성과 대안을 찾자고 말했던 안희정 위원장은 현재 총선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안 위원장은 대선 당시 정동영 캠프 내에서 충남 논산-계룡-금산 선대위원장을 맡으며 자신의 지역구(충남 논산) 다지기에 주력했다.
노 대통령의 ‘복심’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이강철 대통령 정무 특보와 ‘시니어그룹’ 염동연 의원도 독자적으로 생존 활로를 모색 중이다. 이강철 특보는 두 번이나 고배를 마셨던 대구 동구 출마를 노리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공신으로 평가받으면서도 정치인으로서 독자적인 생존에 야심을 보여 왔던 그는 ‘친노계’이면서도 친노 세력들과 좀 다른 색깔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친노 세력의 흥망과는 별개로 생존을 모색 중이다.
박남춘 인사수석, 전해철 민정수석, 윤승용 홍보수석, 이광재 의원, 이화영 의원 등은 개별적으로 총선 준비에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이밖에도 정태호 전 대변인, 김만수 전 대변인, 최인호 전 부대변인, 김성환 전 정책조정비서관, 전재수 전 제2부속실장, 송인배 전 사회조정비서관 등도 총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당으로 자리를 옮긴 김현 서영교 전 춘추관장도 총선에서의 역할을 모색 중이며 이병완 전 비서실장과 차의환 혁신관리수석, 천호선 홍보수석 등은 대중적 지명도가 높아 주변에서 출마를 권유 중이나 당사자들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노 대통령의 퇴임 이후 함께 낙향을 계획 중인 측근들도 있다. 노 대통령과 함께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내려갈 뜻을 비친 문재인 비서실장은 이곳 사저에 지은 빌라 한 채를 분양받았다. 이 외에 김경수 전 1부속실장과 문용욱 현1부속실장 등이 노 대통령을 따라가 보좌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 대통령과 막역한 친구이기도 한 정상문 총무비서관과 부산 출신인 이호철 상황실장도 함께 내려갈 계획이다. 노 대통령의 ‘복심’으로 평가받는 윤태영 전 대변인은 공식 직책은 없지만 김해 사저와 서울을 오가며 참여정부의 기록정리 등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최근 훈장을 받아 또다시 논란이 된 양정철 홍보기획비서관과 김종민 국정홍보비서관, 정구철 국내언론비서관, 소문상 정무비서관 등은 야인으로 돌아간다. 이백만 전 홍보수석도 목포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로 가 강의에 전념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노 대통령의 측근인사들 중 각종 구설수에 올랐던 인사들의 앞으로 행보도 관심거리다.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은 최근 ‘기내난동’을 부린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는가 하면 노 대통령의 후원회장을 지낸 이기명 씨는 대선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이명박, 정동영 후보를 거세게 비난하며 지속적인 ‘친노 인사’로서의 활동을 벌여오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친노 세력들의 퇴조는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몰락으로까지 표현되는 친노 세력의 퇴조는 역사가 내리는 무서운 심판인지도 모른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