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직 경찰이 한인 사업가 마약상으로 몰아 살해 뒤 돈 요구…시체는 소각해 화장실에 버려
지난달 19일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발표에 따르면 지 씨는 지난해 10월 18일 마약 혐의로 필리핀 경찰에 연행됐다. 하지만 일반적인 연행이 아니었다. 납치였다. 현직 경찰 3명, 퇴직 경찰 1명 등 8명이 지 씨를 마닐라 케손 경찰청 내 마약단속국 건물 옆 주차장으로 끌고 간 뒤 차 안에서 목 졸라 살해했다. 지 씨는 즉사했고 일당은 지 씨 가족에게 사건 2주 뒤 몸값을 요구했다. 지 씨 가족은 일당에게 500만 페소인 약 1억 2000만 원을 건넸다. 하지만 지 씨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경찰 조사에서 일당은 지 씨의 시신을 전직 경찰이 운영하는 화장장에서 소각한 뒤 화장실에 버린 것으로 드러났다. 외교부 관계자는 “전직 경찰 1명은 1월 초 캐나다로 출국한 상태다. 나머지 인원은 필리핀에 체류 중인 것으로 파악했다”며 “필리핀 검찰은 그간의 수사결과를 토대로 지난달 17일 용의자 전원에 대해 체포 영장 발부를 청구했다“고 전했다.
지 씨가 살해된 경찰청 안 주차장에 추모 공간이 마련되었다. 사진제공=필리핀한인총연합회
필리핀에 거주하는 교민은 이번 사건을 단순한 범죄로 보고 있지 않다. 필리핀에 거주하는 한 교민은 “명백한 셋업 범죄다. 타국에서는 남의 일처럼 보이지만 필리핀에서는 비행기 사고나 교통 사고보다 더 빈번하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며 “처참할 정도다. 한 인간과 가정이 무너지는 장면을 똑똑히 봤다. 사업하는 모든 교민이 제2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마사랍 코리안(“한국인은 맛있다”는 표현으로 이용하기 쉬운 한국인을 비꼬는 필리핀어 표현)’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단호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셋업(Set-up) 범죄는 선량한 개인을 용의자처럼 기획해 금품을 뜯어내는 사건을 뜻한다. 현지 범죄 조직과 부패 경찰이 짜고 범죄에 연루될 수 있는 물건을 일반인의 소지품처럼 위장한다. 경찰이 접근해 정황을 만들면 현지 상황에 어두운 외국인은 올가미에 걸려드는 셈이다. 뇌물로 상당한 금액을 내지 않으면 교도소로 직행해야 한다는 경찰의 협박을 이겨낼 외국인은 많지 않다.
한국인은 주된 셋업 범죄 대상이었다. 지난 2009년 12월 김규열 선장(당시 52세) 사건이 이런 셋업 범죄를 세상에 알렸다. 당시 김 선장은 마약 판매 혐의로 필리핀 경찰에 구속됐다. 하지만 그는 이 사실을 부인하며 필리핀 경찰의 협박을 상세히 언론에 알렸다. 김 선장은 당시 “필리핀 경찰이 마약판매 혐의로 나를 체포했는데 증거물로 제시된 마약은 처음 본 물건이었다. 필리핀 경찰이 석방을 빌미로 돈을 요구했다. 권총을 머리에 대며 협박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2013년 11월 수감도중 뇌출혈로 쓰러져 숨졌다. 필리핀에서 사망한 한국인은 2012년 6명에서 2013년 12명으로 증가했다. 이후 꾸준히 두 자릿수를 보이고 있다. 2014년 10명, 2015년 11명이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셋업 범죄가 최근 들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이유가 두테르테 대통령의 ‘범죄와의 전쟁’ 탓이라고 주장했다. 익명을 원한 한 한국 교민은 “필리핀 경찰의 급여는 한화로 약 30만~50만 원 사이다. 그 돈으로 생활이 쉽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레 뇌물이 생활화돼 있다. 운전하다 깜빡이를 켜지 않았다는 이유로 잡히면 1만 원 정도를 주면 자연스레 풀려난다. 필리핀에서 깜빡이 안 켰다고 잡히는 건 죄다 외국인뿐”이라며 “두테르테 대통령이 이런 부정부패를 근절하겠다고 나서며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하니 경찰 입장에서는 평소 소소하게 벌어들인 작은 뇌물을 버리고 큰 셋업 범죄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필리핀에서는 셋업 범죄가 경찰의 주요 매출처로 불린다. 마약과 폭발물, 성매매가 주된 셋업 범죄의 수단이지만 경범죄 역시 부패 경찰에겐 짭짤한 수입이다. 얼마 전 마닐라로 휴가를 떠났다가 바닷가 근처에서 맥주를 마셨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갔던 송 아무개 씨(33)는 “끌려갈 때 경찰이 ‘벌금으로 10만 원 정도인 4000페소를 낼래, 아니면 1000페소를 그냥 나에게 주고 끝낼래?’라고 하더라. 주위를 둘러 보면 필리핀 사람 다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나만 옭아맸다. 한식집에서 억울하다고 주인에게 하소연했더니 ‘거의 날마다 있는 일’라는 현지 한인의 답을 듣고 힘이 빠졌다”고 토로했다.
지 씨가 살해된 필리핀 경찰청 내 주차장에서 한인회 인사들이 지 씨를 추모하고 있다. 사진제공=필리핀한인총연합회
교민들은 이런 필리핀에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인회 측은 지난달 24일 오후 2시에 주필리핀 한국대사관에서는 김재신 대사와 권원직 공사겸총영사 등을 만나 “책임져야 할 경찰청장의 사표가 반려돼 근무 중이다. 경찰이 어떻게 피해자에 대한 정확한 사전정보를 알았는지, 범행 장소가 왜 경찰청인지 의문이 든다. 고위직 경찰이 더 연루돼 있을 수 있다”며 “이 사건이 과거 셋업 범죄와 사망 사건처럼 흐지부지되면 더 많은 한국인 희생자가 생길 수밖에 없다. 어제 한국인 3명이 또 앙헬레스에서 필리핀 경찰에게 마약범으로 몰려 현금 30만 페소(한화 약 750만 원)와 목걸이, 휴대전화 등을 갈취당했다. 이대로 참을 수가 없다. 단합된 하나의 목소리와 행동을 보여 재발 방지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한인회는 이어 “필리핀에서는 외국인은 어떤 이유로든 절대로 시위를 할 수 없으니 고 씨의 분향소를 만들어 필리핀 경찰의 만행을 알릴 필요가 있다. 장례식 때 역시 온 교민이 같은 옷을 입고 운구차와 함께 필리핀 경찰청과 대통령궁 앞을 행진해 이 나라 정부와 세계에 한인의 억울한 죽음을 알려야 한다”고 요청했다.
한편, 한인회의 요청에 따라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필리핀 경찰 측은 분향소 설치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