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잘 지켜줄 백기사 어디 없나요’
2015년 2월 기업은행은 KT&G 지분 6.93%를 전량 매각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3년 국내 은행의 건전성 규제가 바젤Ⅱ에서 바젤Ⅲ로 바뀌면서 은행이 보유한 기업 주식의 위험가중치가 100%에서 300%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2007년 이전에 취득한 주식은 2017년까지 위험가중치를 100%로 적용할 수 있는 유예 기간을 뒀다.
내년부터 적용되는 국제회계기준(IFRS 9)의 영향도 있다. 현재는 주식 처분 손익이 당기순손익으로 분류되지만 내년부터는 기타포괄손익으로 분류된다. 올해 매각해야만 영업력과 관련 있는 당기순손익에 반영돼 기업은행의 이미지와 실적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시장 상황을 두고 보면서 올해 안에 KT&G 지분을 매각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문제는 매각 시기다. 기업은행이 KT&G 매각을 공시한 2015년 초, 8만 원 수준이었던 KT&G의 주가는 지난해 7월 13만 7000원까지 올랐다. 이후 하락세를 보여 현재는 9만 원대다. 기업은행이 보유한 주식 수 951만 485주로 단순 계산하면 7개월 만에 주식 가치가 3800억 원 하락한 것이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주가가 상승할 때도 있고 하락할 때도 있는 것”이라며 말을 아꼈지만 올해 KT&G의 주가가 지난해 수준으로 오르지 않는다면 매각 시기를 놓쳤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김 행장은 KT&G의 주가 상승을 기대해야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지는 않다. 당장 KT&G의 올해 1분기 실적 전망이 좋지 않다. 심은주 하나투자증권 연구원은 “올해 1분기는 담배 경고그림 도입 및 김영란법 시행으로 실적 가시성이 낮다”며 “KT&G의 1분기 별도 영업이익은 지난해 대비 2.4% 감소할 것으로 추정한다”고 전했다.
김도진 IBK기업은행장은 올해 안에 1조 원에 육박하는 KT&G의 지분을 매각해야 한다. 사진제공=IBK기업은행
김 행장이 고려해야 할 것은 또 있다. KT&G의 경영권을 방어하는 것이다. 보유하고 있는 지분을 전량 매각할 것이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경영권을 방어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KT&G는 2002년 민영화 이후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가 경영을 맡고 있다. 현재 KT&G 이사회는 사내이사 2명, 사외이사 6명으로 구성돼 있다. KT&G가 사외이사 중심의 경영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주주의 협조가 필요하다. 현재 KT&G의 최대주주는 국민연금(8.59%)이다. 기업은행(6.93%)은 2대주주다. KT&G 관계자는 “국민연금과 기업은행은 경영 참여가 아닌 단순투자 목적으로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며 “대주주에서 독립된 사외이사가 KT&G를 경영하고 있으며 주주들은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구조”라고 설명했다.
미국계 자산운용사인 퍼스트이글인베스트먼트와 블랙록도 KT&G 지분을 각각 5.04%, 5.03% 보유하고 있다. 이들 역시 KT&G 경영에 개입하지 않고 있지만 자산운용사의 특성상 언제든지 지분을 매각할 수 있다. 두 자산운용사가 보유한 지분 10.07%를 매입하면 국민연금을 제치고 최대주주가 돼 KT&G의 경영권을 요구할 수 있다. 현재 지분 10.07%로는 국민연금과 기업은행의 총 지분 15.52%를 이길 수 없지만 기업은행 지분 인수자가 기존 KT&G 경영방식에 우호적이지 않다면 KT&G 경영권은 흔들린다.
퍼스트이글인베스트먼트와 블랙록이 지분을 매각하지 않더라도 기업은행 지분을 인수한 곳이 2대주주 자격으로 경영에 개입하면 KT&G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다. 국내 담배시장 점유율 60%를 차지하는 KT&G는 국내 세금 징수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책은행인 기업은행은 KT&G 경영권 향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KT&G 관계자는 “회사 경영권이 외국으로 넘어갈까봐 걱정되는 게 사실”이라며 “담배사업은 국내 중요한 산업 중 하나이니만큼 기업은행이 매각 상대를 잘 선택해줬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KT&G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경영구조지만 기업은행의 지분에 따라 경영방식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일요신문 DB
KT&G는 과거에도 외국계 펀드에 경영권을 위협받은 바 있다. 2006년 미국계 펀드 칼 아이칸은 다른 펀드와 연대해 KT&G 주식 5.69%를 매입하면서 경영에 관여했다. 칼 아이칸이 KT&G 경영진에 보유 부동산 매각을 통해 배당을 확대하라고 요구한 것. KT&G는 부동산 매각은 하지 않았지만 2조 8000억 원을 배당금으로 써야 했다. 칼 아이칸은 2006년 12월 약 1500억 원의 차익을 거두고 KT&G 지분을 매각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KT&G의 경영권을 고려해 (우리가 보유 중인) 지분을 매입할 의사를 보이는 곳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매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지만 1조 원 규모의 지분을 단순투자목적으로 매입할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매각가를 낮추자니 안 그래도 매각 타이밍을 놓쳤다는 비판을 받고 있어 헐값 매각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앞의 기업은행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인 내용은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다”며 “블록딜이라는 게 어렵긴 하지만 찾다보면 언젠가 매각 상대가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고 전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
건전성 규제 강화로 복잡해진 은행들의 머릿속 시중은행들은 올해 보유하고 있는 지분 매각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내년부터 바젤Ⅲ와 IFRS 9가 시행되기 때문에 올해가 지분 매각을 통해 회계상 당기순이익을 기록할 수 있는 마지막 해기 때문이다. 우리은행은 금호타이어(14.15%), 대한전선(4.18%) 등의 지분을 KB국민은행은 금호타이어(4.16%), 주택도시보증공사(8.48%), SK㈜(2.49%) 등을 갖고 있다. KEB하나은행도 현대시멘트(20.4%), 대한전선(5.8%)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아직까지 은행권의 지분 매각 계획이 공식 발표된 건 금호타이어와 KT&G뿐이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매각을 하려고 해도 인수 희망자와 가격 등의 조건이 맞아야 한다”며 “지분 매각을 검토는 하고 있지만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건 없다”고 밝혔다. 시중은행 또 다른 관계자는 “은행은 국내 기업들과 공생해야 하는 역할이 있어서 당장 재무적 효과를 위해 지분 정리를 해야 한다고 판단할 수 없다”며 “지분을 매각하지 않고 기업의 정상화를 기다린다면 중장기적으로 더 많은 기업고객이 찾아올 수 있다”고 전했다. [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