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업 전면개편안 놓고 “우릴 건들지 말라” 물러나기 전 마지막 칼 뽑았으나…
지난 6일 서울 여의도에서는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주최한 신년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설 연휴 직후이자 4일이 그가 취임 2주년을 맞은 날이기도 했지만, ‘신년’이라 하기에는 다소 늦은 시점에 황 회장이 간담회를 개최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금융당국이 올해 안에 마무리하겠다고 밝힌 신탁업제도 전면 개편안이 그가 몸담고 있는 증권업계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27일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2016 신재생에너지 비즈니스 투자포럼’에서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가 맡고 있는 신탁업법 제정 작업은 은행권에 유리한 쪽으로 결론날 가능성이 높다. 신탁업이란 투자자의 재산을 은행이나 증권사 등 금융회사가 위탁받아 투자자의 운용 지시를 바탕으로 관리하고 운용해주는 사업을 말한다. 주식, 예금, 부동산 등 투자자의 다양한 재산을 수탁자가 운용하고 관리하기 때문에 해외에서는 노후재산관리 등에 주로 활용되고 있다.
운용 주체는 투자자의 의향에 따라 은행이건 증권사건 선택할 수 있지만 사실상 은행들은 예·적금 등에 주력하고 신탁업무는 증권사의 고유영역처럼 인식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지난 1월 금융위는 고령화·저성장 시대에 ‘신탁’을 종합자산관리서비스의 한 축으로 키우기 위해 신탁업제도를 전면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금융위는 진입 규제 완화, 운용 탄력성 확대 등의 내용을 담은 신탁업법 제정안을 오는 10월까지 국회에 제출한다는 계획을 잡아놓고 있다. 이를 위해 현행 자본시장법에 포함된 신탁업 내용을 분리해 별도의 신탁업법 제정을 추진하겠다는 로드맵도 내놨다.
문제는 금융위 내부에서 별도의 법안 제정을 맡은 부서가 ‘은행과’라는 점이다. 현재 금융위에서 신탁업과 관련된 업무는 자본시장국 자산운용과에서 담당하고 있다. 자본시장국은 증권 관련 업무를 하는 부서다. 반면 새로 추진할 신탁업법 제정을 맡은 은행과는 금융서비스국 소속이다. 금융서비스국은 특정 업종에 치우친 부서는 아니다. 하지만 은행과의 주력 업무는 말 그대로 은행과 관련된 것이다.
황영기 회장이 다시 칼을 뽑으며 결전 의지를 밝힌 배경에는 이런 움직임이 작용했다. 간담회에서 황 회장은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등 금융투자업계는 현재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불리한 경기를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은행이나 보험사에 비해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는 만큼 올해 부당한 규제를 바로잡아 제대로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며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황 회장은 은행은 물론 금융당국을 향해서도 저항에 나설 것임을 공언했다. 황 회장은 “신탁업법을 따로 빼내고자 하는 취지는 ‘다른 업권’이 신탁업을 통해서 자산운용업에 진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별도 법으로 떼어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신탁업법이 자본시장법 안으로 들어온 이유는 ‘동일 행위·동일 규제’ 원칙을 따랐기 때문”이라며 “자산운용업은 정교하고 치밀하게 투자자 보호 장치가 돼 있는데 신탁이라는 기구를 다른 업권에서 자산운용업을 직접 하고자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증권이나 자산운용업권에서는 격렬하게 반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업권’인 은행이 신탁업에 진출하고, 이를 법으로 보장하려는 금융위의 행보를 앉아서 지켜보지만은 않겠다는 것이다.
특히 이날 황 회장은 은행을 직접 거론하며 ‘우리를 건들지 마라’는 원색적인 표현까지 썼다. 그는 “은행이 할 일은 자체적인 비용 효율화를 하는 게 1순위인데 그게 안 되니까 남의 업권을 건드리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 뒤 “증권업계가 예금을 받겠다고 나서지 않는 것처럼 은행도 자산운용업은 건들지 마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증권업계는 금융위와 은행업계의 행보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증권업계는 금융위의 신탁업법 제정이 펀드 시장의 축소를 불러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투자자 입장에서 펀드와 신탁이 유사한 측면이 있는 만큼 규제가 까다로운 펀드보다 신탁으로 자금이 몰릴 수 있다는 우려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현행 자본시장법이 신탁업을 포함하고, 자본시장법은 자본시장국에서 담당하도록 돼 있다”며 “따라서 신탁업법 제정도 당연히 자본시장국이 맡아야 하며 금융서비스국 소속인 은행과가 맡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현행 법체계를 거스르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반면 은행들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여·수신 사업이 한계에 부닥친 상황에서 신탁업무에 진출하면 향후 전체 자산운용업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은행업권을 대표하는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은 한발 앞서 신탁업법 제정에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 황 회장을 자극했다. 하 회장은 지난 1월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탁은 모든 금융업권이 공유하고 있는 비즈니스”라면서 “(신탁업법 제정은) 금융권 전체에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애드벌룬을 띄웠다. 은행권 이익을 대표하는 단체의 수장이 먼저 나선 만큼 증권업계를 대변하는 황 회장도 가만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된 셈이다.
두 사람은 사실 각자 업권의 이익을 놓고 이미 두 차례에 걸쳐 결투를 벌인 바 있다. 지난해 초에는 은행에 일임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허용하는 문제로 기싸움을 했고, 여름에는 증권사의 월급통장 취급 여부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ISA는 하 회장이 “은행에도 투자일임업을 허용해야 한다”며 포문을 열면서 싸움이 시작됐고, 월급통장 문제는 황 회장이 “증권업계에서 해결돼야 할 선결과제는 법인지급결제 허용”이라며 포문을 열었다.
발단은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ISA 문제는 황 회장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국민 재산 늘리기라는 ISA제도의 취지를 고려해 대승적 차원에서 투자일임업을 ISA에 한해 은행에 허용하기로 했다”고 갑자기 후퇴하며 허무하게 끝났다. 월급통장 싸움도 금융당국이 지난 8월 발표한 ‘초대형 IB(투자은행) 육성방안’에 증권사의 법인지급결제 기능이 빠지면서 은행권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금융권에서는 이번에도 황 회장이 승기를 잡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금융당국이 이미 주무부서를 정해 업무를 시작한 일을 뒤집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한 금융지주사 고위 관계자는 “황 회장이 금융투자협회 회장이니만큼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다만 금융위가 관련 일정을 이미 발표하고 업무에 착수한 상태여서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평가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