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진 ‘이’들 사이 그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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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이재오, 이상득 | ||
먼저 두 남자의 스토리부터 보자. 이들의 인연은 첫 만남부터 산뜻하지는 않았다. 1988년 당시 코오롱 사장이었던 이 부의장은 13대 총선에 민정당 후보로 당선돼 정계에 진출한다. 이후 고향인 포항에서 내리 3선에 성공한 이 부의장은 96년부터 민자당 정책위 의장을 맡게 된다. 정책위 의장 시절 YS(김영삼)정부는 노동법 날치기 통과 등 악수에 악수를 거듭하며 극심한 민심 이반을 겪게 된다.
당시 이런 상황을 당내에서 매우 신랄하게 비판했던 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민중당 사무총장 출신 이재오 의원이었다. YS 추천으로 1996년 민자당 공천을 받아 출마, 국회에 입성한 이 의원은 결코 녹록하지 않은 ‘초선’이었다. 14대 총선 때 민중당의 창당 주역이자 후보로 금배지에 도전, 고배를 마셨다가 마침내 원내에 입성한 그는 초선 의원답지 않은 내공을 발휘했다.
보수적인 민정계 출신으로 정책위 의장을 맡고 있던 이 부의장이 국회에 들어온 ‘좌파세력’ 이재오 의원을 곱게 볼 리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상대 출신에 대기업 사장을 역임했던 이 부의장은 그뒤 나름의 굴곡을 겪는다. 1997년엔 대선캠프 직능본부장으로 이회창 총재를 도왔지만 대선에서 패배한 뒤 당내 비주류로 전락하기도 했다. 반면 그 사이 이 의원은 좌충우돌, 4수 끝에 2001년 한나라당 원내총무에 뽑혔다. 이후 이 의원은 2003년 한나라당 사무총장, 2006년 원내대표에 올랐으며 2007년 대표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할 정도로 위상을 업그레이드시켰다. 당의 ‘원로’로 물러난 이 부의장에 비해 대조적인 성장세였다.
이처럼 정치인으로서 성장 환경과 궤적이 상이했던 두 사람은 2002년 이명박 전 현대건설 회장을 서울시장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비로소 서로를 인정하고 의지하게 된다.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었던 이 부의장은 지방선거 선거대책본부장을 겸임했고 전임 당 총무였던 이 의원은 서울시 선대본부장을 맡아 호흡을 맞췄다. 이 의원은 이명박 후보가 시장에 당선된 뒤 서울시장직 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수직상승하던 이 의원은 결코 당내 주류가 되지 못했다. 1998년 자신보다 더 늦게 정치에 입문한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대표가 그 한 원인이었다. 이 의원과 박 전 대표의 악연은 이상득 의장과의 인연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1979년 이 의원은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을 맡아 경북 안동시 안동댐을 방문했다. 당시 안동댐에는 새마을봉사단 총재였던 박 전 대표가 붕어 따위를 방생해준 것을 기념하는 ‘영애 박근혜 방생기념탑’이 크게 세워져 있었고, 안동댐 건설공사 중 사고로 숨진 인부 20여 명의 위령탑은 한쪽에 초라하게 놓여져 있었다. 이 의원은 이를 보고 “이것이 유신 독재의 실체”라고 비난했고, 바로 다음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 끝에 긴급조치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수감 중에 이 의원은 맹장염에 걸렸으나 치료를 받지 못해 복막염으로 악화돼 10여 차례 개복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 같은 과거의 악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정치철학 때문이었을까. 이 의원은 1998년 경북 달성군 보궐선거로 정계에 입문한 박 전 대표와 줄곧 대립각을 세웠고 “독재자의 딸”이라고 공개석상에서 비판까지 했다. 이 의원은 2003년 박 전 대표를 공천심사위원장으로 삼으려는 최병렬 대표에게 사무총장직을 걸고 반발했다. 이에 박 전 대표는 2006년 7월 이 의원이 당대표 선거에 나왔을 때 상대방인 강재섭 대표를 지원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그러나 이 의원은 대신 2007년 대선 경선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이명박 후보를 지지해 박 전 대표를 경선에서 탈락시켰다. 이 의원은 경선 후 박 전 대표 측에게 “경선 중인 줄 착각하는 세력이 있는데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가 박 전 대표로부터 “오만의 극치”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려 30년의 악연으로 이 의원과 박 전 대표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양측 의원들까지 서로를 비판하고 다니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이 의원의 사연과는 별도로 이 부의장이 박 전 대표를 보는 눈은 달랐다. 그는 동생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선 박 전 대표의 협력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실제 후보 경선에서 당원과 대의원들은 이 대통령이 아니라 박 전 대표를 더 지지했다. 당시 당원과 대의원 표심을 잡는 책임의 한 축은 조직을 책임졌던 이 의원에게 있었다. 이 의원 측은 이 부의장 주변의 ‘박근혜 우호적’ 기류에 대해 못마땅한 입장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부터 유지돼온 양측의 밀월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런 기류는 대선 승리 후 이 부의장 등 원로들이 박 전 대표에게 총리직을 제안하는 움직임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의원 측근들은 청와대와 내각에서 부각되는 자리를 얻지 못했다.
대선 때 목숨을 걸었던 이 의원 측 사람들로서는 자신들은 찬밥 신세가 되고 이 대통령의 발목을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박 전 대표에게 총리를 제안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해 보인다. 결국 이와 같은 감정의 골과 신뢰의 상실은 친이(친 이명박 대통령) 측과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 측의 공천갈등이 벌어진 와중에 친이끼리의 이해하기 어려운 ‘내전’이 발발하는 보이지 않는 불씨로 작용하게 된다.
문제는 이렇게 번진 이 부의장과 이 의원 간의 갈등 즉 친이 간의 내전이 어떤 양상으로 봉합되느냐인데 여기에서도 박 전 대표가 상당한 풍향계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 부의장은 3월 27일 경북 포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탈당한 친박 의원 등의 복당 문제에 대해 “당헌 당규 어디에도 복당을 불허한다는 규정이 없다”며 ‘탈당 친박 의원들의 복당 불가’를 주장해온 당 지도부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이는 이 부의장이 또 다시 동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박 전 대표 측을 껴안으려는 몸짓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부의장과 박 전 대표 측이 물밑에서 손을 맞잡는 이와 같은 권력 구도는 총선 이후 7월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하려는 이 의원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다. 현실적으로도 이 부의장이 자신의 불출마를 주장한 이 의원을 도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정계에서는 이미 이 부의장과 박 전 대표가 대표최고위원선거에서 정몽준 최고위원을 밀 것이라는 관측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 10여 년간 복잡하게 이어져온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이처럼 향후에도 한나라당 권력지도의 큰 그림을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이정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