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키 아이즈’가 안되면 ‘블랙 페이스’도 안돼!
지난 3일 콘서트에서 미국 팝 가수 브루노 마스의 뮤직비디오를 패러디한 마마무. 브루노 마스의 피부색과 비슷하게 얼굴을 칠해 논란을 빚었다. 사진출처=SNS 캡처
지난 3일 여성 4인조 그룹 ‘마마무’가 이 같은 인종 희화화 논란에 휩싸였다. 마마무는 같은 날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공연 도중 미국 팝스타인 브루노 마스의 히트곡 ‘업타운 펑크(Uptown Funk)’의 뮤직비디오를 패러디한 영상을 선보였는데, 여기서 마마무는 얼굴에 검은 칠을 한 채로 카메라 앞에 섰다. 스페인계 혼혈로 다소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브루노 마스를 분장으로 흉내 낸 것이다.
마마무의 이 같은 패러디 영상은 해외 팬들의 SNS 계정을 타고 순식간에 전파됐다. 그날 하루 동안에 공유되고 재생된 횟수만 4만 회가 넘을 정도다. 해외 팬들은 “마마무가 ‘블랙 페이스’를 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실망스럽다” “한국인들은 이게 잘못된 일인 줄 모른다” 등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일이 일파만파 퍼지자 마마무의 소속사 RBW엔터테인먼트는 하루 뒤 한국어와 영어로 된 사과문을 올렸다.
한국어로 된 사과문은 “오해의 소지가 생겨 문제된 부분을 편집하겠다”는 다소 짧은 내용이었지만 영어 사과문은 “흑인 커뮤니티의 팬을 상처 입힌 것에 대해 매우 죄송하다. 저희는 블랙 페이스에 대해 극도로 무지했고 저희의 행동이 내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라며 사과를 넘어서 사죄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크고 민감한 이슈라는 점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여론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동영상 촬영에 대한 마마무와 소속사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의식이 부족했다는 주장과 인종적 특징을 부각시킨 패러디일지라도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면 문제없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나 해외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마마무가 세계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 인정하는 분위기다. 해외에서는 마마무의 검은 칠 분장을 ‘블랙 페이스(Black Face)’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흑인이 아닌 출연자가 흑인을 연기하기 위해 받는 무대 메이크업을 뜻하는 블랙 페이스는 1981년까지 흑인을 희화화하기 위한 쇼에 자주 사용됐으나 흑인과 일부 백인들의 오랜 투쟁 끝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애초에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적인 희화화에서 시작된 블랙 페이스인 만큼 해외에서는 이런 행위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대처하고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핼러윈이나 코스튬 플레이 등 분장이 필요한 행사에서 인디언이나 닌자, 치파오 복장을 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의 인종 차별이나 희화화로 받아들여진다. 한 인종의 문화적·생물학적 특징을 단순한 즐길 거리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 때문이다.
2007년 추석 특집 개그프로그램에서 후배 개그맨 ‘키컸으면’과 합동 무대에 선 80년대 개그 듀오 ‘시커먼스’. 사진제공=KBS
국내 연예계는 200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한류를 통해 수많은 해외 국가들을 매료시켜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종 희화화 문제에 있어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한류 초창기였던 2000년대 초반에 ‘버블 시스터즈’라는 여성 4인조 그룹이 ‘정통 흑인 음악’을 하겠다며 얼굴을 검게 칠하거나 레게 머리를 한 채 무대에 서기도 했고, 1986~87년 흑인 분장을 하고 랩 음악을 선보였다가 88올림픽을 앞두고 “인종 비하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해체했던 개그 듀오 ‘시커먼스’는 2007년 후배 개그맨과의 추석 특집 합동 무대에서 다시 부활하기도 했다. 당시 누구도 이들의 흑인 분장을 문제 삼지 않았다. 2012년에는 MBC 예능프로그램이었던 <세바퀴>에서 개그우먼 이경실과 김지선이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의 등장 캐릭터인 마이콜의 분장을 하고 공연을 했다가 “흑인을 비하했다”라는 비난에 직면했던 바 있다. tvN의 개그프로그램 <SNL>은 흑인 분장한 배우들을 무대에 올렸다가 SNL의 원 저작권자인 미국 방송사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흑인들에 대한 희화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SBS 예능프로그램 <스타킹>에서 아랍인 분장을 한 출연자가 모형 기관총을 들고 진행자들을 위협한 것은 “아랍인이 곧 테러리스트로 여겨지는 그릇된 인식을 갖게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KBS 개그프로그램 <개그콘서트>는 아랍인 분장을 하고 연기하는 ‘억수르’나 출연진을 “동남아 현지인을 닮았다”라며 비하했던 ‘정 여사’ 코너가 논란을 일으켰다. 특히 ‘억수르’는 아랍인과 아랍인이 존경하는 선지자 무함마드를 비하한다는 비판을 받고 코너와 출연진 이름을 교체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이 같은 방송·연예계에서의 인종 희화화와 차별이 연일 도마 위에 오르자 문화체육관광부는 2012년 ‘문화다양성 존중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 그러나 가이드라인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것에는 동양인 외에 인종과 관련한 민감한 이슈들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따른다.
국내 연예계에서 활동했던 한 30대 중반의 여성 미국인 방송인은 “인종적 특징을 부각시킨 것만으로도 그 대상에게는 충분히 불쾌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 연예인이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흉내 내기 위해 눈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여 째진 눈을 만들고 피부 톤을 노랗게 분장했다고 상상해봐라.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다만 인종적 특징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그니처 같은 부분을 패러디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염색한 금발, 반쯤 감긴 눈, 입술 옆의 점이 특징적인 마릴린 먼로를 패러디하거나 찰리 채플린의 콧수염과 부릅뜬 눈을 흉내 내는 식이다”라면서도 “그 외에 인종적 특징만을 부각시키는 분장이나 행동은 인종 차별과 희화화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백인 연예인을 패러디한다고 해서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는 한국 연예인은 본 적이 없는데 흑인, 동남아인, 아랍인에 대해서만 인종적 특징 부각을 고집할 필요가 있는지 묻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