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기록원 황교안 지정권자로 밝혀 논란…국정농단 기록물 30년간 봉인 우려
일요신문 DB
박 전 대통령은 파면됐지만 재임 시기 생산된 전자결재 문서와 회의자료, 인사기록, 각종 연설문 등의 대통령 기록물은 청와대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 기록물관리법 제7조는 ‘대통령의 직무수행과 관련한 모든 과정과 결과는 대통령 기록물로 생산‧관리돼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보고서 초안은 물론 수정‧변경된 모든 자료가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 대통령 기록물의 생산 원칙이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면서 대통령 기록물 이관 준비 작업은 ‘시계제로’ 상태에 놓였다.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 기록물관리법 제11조 4항에 따라 퇴임 6개월 전인 2017년 8월 25일부터 대통령 기록물을 분류하고 퇴임 전인 2018년 2월 25일까지 이관 작업을 마쳤어야 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정상정인 퇴임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국가기록원은 탄핵 당일부터 대통령 기록물 이관 작업에 착수했다. 국가기록원은 대통령기록관장을 단장으로 하는 이관추진단을 대통령기록관 내에 설치하고 대통령 보좌기관·경호기관·자문기관 등 대통령기록물생산기관과 이관을 위한 실무협의에 들어갔다.
이관추진단은 생산 기관 단위로 대통령 기록물의 정리 분류 작업을 완료하고 대통령 기록관으로 이송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통상 기록물 분류작업은 6개월이 넘는 기간에 걸쳐 이뤄지지만 새로운 대통령 취임 전까지 주어진 기간은 약 두 달뿐이다. 일각에서 “이관작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비판이 들리고 있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준비는 다 끝났다. 생산기관은 총 21개 기관이다. 생산기관들이 우리가 요구하는 포맷에 따라 정리 작업들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통령 기록물은 일반, 비밀, 지정으로 분류된 뒤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된다. 대통령 지정 기록물의 보안 수준이 가장 높다. 대통령기록물 관리법상 대통령이 재임기간 동안 생산한 기록들을 보호해달라고 지정하면 최장 30년까지 열람이 제한된다.
그런데 최근 국가기록원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기록물의 지정권한이 있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국가기록원은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 2조를 근거로 들어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 기록물의 생산·접수 기관에 포함된다고 밝히고 있지만 안팎의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알권리연구센터 전진한 소장은 “대통령 기록물관리법 제2조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생산한 기록도 대통령 기록이라는 뜻이다. 고건 전 국무총리처럼 권한대행을 했던 사람들의 대통령 기록도 현재 기록관에 이관돼 있다. 하지만 권한대행에게 지정 권한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고 설명했다.
조영삼 서울시 정보공개정책과장(전 청와대 기록연구사) 역시 “제2조는 대통령 기록물 개념을 확실히 정의하기 위한 것이다. 기록물법 시행 이전에는 대통령 기록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결재한 문서만 분류해놓았는데 인수위 시절 생산한 문서가 문제가 됐다. 그래서 생산 접수기관에 대통령 당선인과 권한대행의 개념도 명문에 넣었다. 기록원이 엉뚱한 해석을 했다”고 비판했다.
일각에서는 “황 대행이 국정농단의 증거물을 대통령 기록물로 지정할 경우 속수무책”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주무대는 청와대였다. 최 씨의 출입기록과 박 전 대통령 뇌물죄, 보좌진의 업무수첩 등 주요 증거들이 여전히 청와대에 남아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검찰과 특검은 수차례 청와대 압수수색을 시도해 관련 증거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황 대행이 국정 농단의 증거물을 대통령 기록물로 지정한다면 ‘30년 자물쇠’가 채워질 수 있는 셈이다.
전진한 소장은 “대통령 기록물 분류는 건별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자가 들어가는 것들을 황 대행이 전부 대통령 기록물로 지정할 수 있다. 문체부 블랙리스트 관련 기록도 마찬가지다. 검찰의 조사 대상인 자료들을 지정하는 것은 수사를 피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물론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제17조 4항에 따르면 국회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다면 대통령 지정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관할 고등법원장이 기록이 중요 증거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영장을 발부하는 경우 관련 문서 열람 및 자료 제출을 허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진한 소장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일이다. 미국과 호주에서 시행중인 기록동결조치를 즉시 시행해야 한다”고 했다.
‘55시간 55분’의 미스터리에 대해서도 의혹이 일고 있다. ‘55시간 55분’은 3월 12일 오전 11시 21분 박 전 대통령이 파면당한 직후 청와대에 머문 시간이다. 조영삼 과장은 “박 전 대통령과 비서진이 문서 파기, PC 포맷, 디가우징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메인서버는 손대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을 삭제하면 범죄 증거로 남는다. 하지만 개인 PC 중의 일부 파일에 대한 무단 파기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주장했다. 디가우징(Degaussing)은 자기장으로 하드디스크를 물리적으로 복구 불가능하게 지우는 과정이다.
대통령 기록물법 제14조는 “누구든지 무단으로 대통령기록물을 파기·손상·은닉·멸실 또는 유출하거나 국외로 반출하여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기록물법 벌칙에 따라 박 전 대통령과 청와대 보좌진들이 대통령 기록물을 무단으로 파기하거나 국외로 반출할 경우 최대 10년 이하의 처할 수 있다. 은닉·손상·멸실의 경우에는 최대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전진한 소장은 “전자기록은 한번 등록되면 나중에 지워도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수첩 같은 비전자기록을 누군가 파기해도 아무도 알 수 없다. 원래 비전자기록은 목록으로 만들어 관리해야 하는데 파쇄기를 돌리면 속수무책이다”고 설명했다.
국가기록원도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3월 15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청와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자료를 파기해도 대비책은 없다. 그동안 청와대 직원들을 상대로 교육을 했고 탄핵 당일에 방문도 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청와대의 대통령 기록물 관리가 부실하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기록 전문가는 “각 비서관실별로 기록을 생산하면 기록 관리를 담당하는 총무비서관실로 이관된다. 총무비서관실의 P-RMS에 기록이 없다는 내부 제보를 받았다. 4년 동안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아서 기록 관리가 엉망이라고 들었다”고 밝혔다. P-RMS (president record manage system)는 대통령 비서실의 기록 관리를 위해 구축된 시스템이다.
다른 기록물 전문가 역시 “P-RMS가 깡통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박근혜 정부가 4년간 한 번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록을 생산한 뒤 1년이 경과하면 그 다음해에 P-RMS에 기록을 전자적으로 이관하도록 돼있다. 이렇게 되면 국가기록원이 청와대 대통령 기록물을 외장하드에 담아서 뜯어서 들고 오는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대통령 기록물 이상 징후도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실제로 JTBC는 최근 전직 청와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논란의 소지가 있는 보고서는 서면으로만 보고하고 아예 시스템에 등록하지 않았다고 15일 보도했다. 이 관계자는 “문서 생산 건수를 (MB 정부 수준으로) 맞춰달라는 요구가 있어 허드렛 문서를 등록하는 일도 있었다. 보고서 최종본만 등록하고 초안이나 수정본은 등록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용량이 큰 동영상이나 PPT자료는 수시로 삭제한다”고 밝혔다.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측의 태도도 구설에 오르고 있다.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 측은 14일 “박 전 대통령의 집권 1~3년차에 생산된 기록물 현황은 공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대통령기록물법 10조에 따르면 대통령은 매년 대통령기록물의 생산 현황을 대통령기록관장에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대통령기록관 측이 박 전 대통령의 1~3년차 생산 기록물 현황을 ‘부정확하다’며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청와대에서 생산한 대통령 기록물이 엉망인지도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관을 받아야 국가기록원의 책임이다. 이관받기 전까지는 책임이 없다”고 해명했다.
급기야 청와대의 대통령 기록물 반출 논란도 도마에 올랐다. ‘박근혜 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은 박 전 대통령의 퇴거 당시 삼성동 집에 들어간 상자에 적힌 ‘한아세안 6030 8대(A급)’이라는 글귀를 두고 기밀 유출 의혹을 제기했다. 청와대 측은 “그 상자는 경호실의 통신장비일 뿐이다. 한아세안은 2014년 12월 부산에서 열린 한·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특별정상회의를 의미하고, 6030은 통신장비 이름으로 A급 장비라는 뜻이다”고 해명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