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공주’는 그만, 독기 품고 계보 관리
▲ 한나라당 박근혜전대표가 4월 2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대표경선 불출마 선언을 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러한 변화의 일단을 보이듯 박 전 대표는 최근 지역구에서 열린 봄 축제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외부활동을 시작했다. 앞으로 전국적인 규모의 각종 사조직 모임에도 활발히 참석할 것이라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박 전 대표의 ‘자세 변화’는 결국 ‘영남권 대권주자’라는 이미지를 탈색해 대권주자로서의 외연을 확실히 확장하겠다는 장기 포석으로도 해석된다. 4·9 총선을 통해 대구·경북지역에서의 견고한 지지세를 재차 확인했으나 수도권을 공략하지 않고서는 청와대행(行)이 쉽지 않다는 전략적 판단이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러나 일단 올해 7월 열리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는 박 전 대표가 당 대표에 도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많다. 이와 관련, 최근 박 전 대표의 일부 핵심 측근들이 평소 박 전 대표를 취재해온 일부 기자들을 상대로 당 대표 출마 및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계 탈당 인사들의 복당에 대한 의견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취재기자들만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셈이지만 그만큼 박 전 대표도 현안에 대한 여론추이에 관심이 크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지난 4월 25일 박 전 대표가 긴급 기자간담회를 통해 “당 대표에 불출마할 테니 탈당자를 복당시키라”며 ‘조건부 불출마 카드’를 꺼낸 것은 사실상 향후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그동안 박 전 대표는 출마와 불출마를 떠나 자신의 향후 거취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자제해왔다. 이 때문에 이날 박 전 대표의 발언은 앞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움직일 수도 있다’는 의미를 역설적으로 전달한 것이라고 보는 분석이 적지 않다.
당 소식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표의 향후 행보와 관련해 “6월 4일 9개 기초자치단체장에 대한 재·보궐 선거가 있다. 이 선거 결과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과거 재·보궐 선거를 치르기만 하면 전승을 했던 한나라당이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예상 밖의 참패를 한다면 당은 또 다시 책임 공방에 휩쓸릴 가능성이 크다”며 “그 경우 현 지도부에 대한 비판은 물론 당을 장악하고 있는 친이(친 이명박 대통령)계 내부에서조차 내홍이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4·9 총선에서야 어쨌든 ‘153석’이라는 과반 의석 달성에 성공해 당 지도부가 그나마 체면치레를 했으나, 재·보궐 선거에서 당에 대한 싸늘한 여론이 드러날 경우 전면적인 쇄신론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의미다.
이 같은 상황은 비주류인 박 전 대표 측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구심점 없는 당에서 박 전 대표만큼 확실한 ‘구원투수’를 찾기는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총선을 통해 처음 국회에 진입한 초선 의원들은 ‘박근혜 위력’을 선거 현장에서 몸소 체험한 인물들이다. 이런 상황이 실제 도래한다면 친박 측에서 당권 도전에 나설 가능성도 높다. 당 안팎에서는 박 전 대표가 ‘대리인’ 격으로 허태열 의원을 내세울 것이라는 관측도 나돌고 있다. 허 의원은 이번 총선 승리로 3선 고지에 오른 데다 사무총장을 역임해 실제 당내 사정에도 밝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 측이 계속 비주류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이른바 ‘의도된 비주류’다. 이는 이명박 정부의 국민 지지율과도 연관이 깊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38%라는 국민 지지율을 보인 이명박 정부가 앞으로도 고전이 예상되는 만큼 박 전 대표가 굳이 여당의 축이 되어 ‘국정의 파트너’로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어차피 17대 국회에서는 비준을 얻기가 힘들다. 결국 7월에 들어설 차기 당 지도부는 한·미 FTA 비준, 경제살리기, 언론관계법 처리 등을 정부와 함께 책임져나가야 할 형편이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사안들이다. 특히 이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건 ‘대한민국 747’(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위권 강국) 비전은 현재의 지구촌 경제상황을 살펴볼 때 실현가능성이 매우 낮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물론 이 대통령은 747 공약이 향후 10년간 달성해야 할 이정표라고 강조하고 있으나 여론은 경제전문가인 이 대통령에게 ‘가시적 성과’를 빠른 시일 내에 내놓도록 종용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즉 올 연말이 지나 경제성장률이 7%는 고사하고 5%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경우, 여권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 가능성이 높다.
정리해 보면 ‘6·4 재·보궐 선거-한·미 FTA 등 현안 처리-경제살리기’ 등 여권이 올 연말까지 마주칠 난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국 박 전 대표가 당 전면에 나서 청와대와 ‘무거운 짐’을 함께 들기보다는 당의 비주류로서 내실을 기하는 게 오히려 정치적으로 얻는 게 많을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박 전 대표뿐 아니라 차기 대권을 노리는 인사들 입장에서는 2년 뒤 열릴 지방선거 이후에 당권을 잡고 대선 가도에 임하는 게 지금부터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리부터 진을 뺄 게 아니라 대선에 임박해 당 대표를 맡아야 언론의 관심을 계속 받을 수 있고, 당 조직을 대선 때까지 장악해 나갈 수 있다는 의미다.
앞에서 거론한 것처럼 박 전 대표는 당분간 과거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조직을 챙기는 쪽으로 활동 반경을 맞출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대선에서 이 대통령이 ‘선진국민연대’를 통해 지지 세력을 확장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물론 당이 탈당파 친박 의원들에 대한 복당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박 전 대표의 행보가 변경될 여지는 남아 있다.
‘대의명분과 원칙’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박 전 대표 스스로 ‘복당 허용’을 강하게 당에 요구한 만큼 이 문제가 전당대회 이후에도 해결이 안 될 경우, 박 전 대표가 단순히 비주류로 남는 것을 떠나 강경대응에 나설 가능성도 높다는 의미다. 탈당까지는 아니더라도 또 다시 대구로 낙향해버리거나 대국민 기자회견 등을 통해 당 지도부를 강하게 질타하고 나서는 방식이 꼽힌다. 이 경우 한나라당은 또 다시 ‘친이 대 친박’이라는 오랜 대결 구도가 재연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대결 국면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