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자 직업이 ‘주부’라구? 신원은 왜 숨겨
▲ 국회의원들끼리 ‘상부상조’하며 서로 후원금을 내주거나 본인의 이름으로 돈을 내는 등 다양한 형태의 후원 사례와 기업의 기부금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야경. | ||
고액 기부자 명단을 살펴보면 의원과 이들의 후원자 사이에 얽힌 인연과 기부 배경 등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의원 간의 ‘품앗이’ 기부가 행해지는가 하면 의원과 기부자와의 오랜 친분이 지속적인 기부로 연결된 경우도 있었고 ‘대가성’이나 ‘인사치례’ 성격이 엿보이는 기부금도 눈에 띄었다. 또 고액 기부를 많이 받은 상위 20명 중 한나라당 의원이 15명이나 포함돼 지난해 ‘정권교체 가능성에 따른 후원금 쏠림 현상’이 두드러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중에는 ‘친이 의원’이 10명, ‘친박 의원’이 3명으로 나타나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들에게 ‘돈이 몰리는’ 현상도 엿볼 수 있었다. 대선을 앞두고 있던 지난해 과연 누가 어느 의원들에게 어떤 이유로 얼마나 기부를 했을까. 금배지들이 받은 기부금 내역서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기부자 명단을 살펴보면 가장 눈에 띄는 대목 중 하나가 전·현직 국회의원 및 장관 등 정계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정치인들 간의 ‘품앗이’ 기부가 적지 않았던 셈이다.
우선 현직 의원 중에는 한나라당 이군현 의원이 같은 당의 진수희 의원에게 세 차례에 걸쳐 150만 원을 기부한 게 눈에 띈다. 이 의원과 진 의원은 ‘친이’그룹 중에서도 이재오, 정두언 의원과 가까운 사이로 분류되는 의원들로 총선 직전 함께 ‘형님 공천’을 문제 삼으며 이상득 부의장 퇴진을 요구했던 ‘절친한’ 동료사이다. 최근엔 두 의원이 차기 당권에 대한 논의로 자주 만나고 있다고 전해진다.
한나라당 강재섭 의원도 같은 당 이명규 의원에게 300만 원을 기부했다. 이 의원은 지난 2004년 총선에서 대구 서구에 출마한 강 대표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본인 또한 대구 북구 갑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이밖에 한나라당 전재희 의원은 고경화, 홍준표 의원에게 각각 200만 원, 150만 원씩을 후원했고, 같은 당 김태환 의원은 박근혜 홍준표 의원에게 각각 300만 원, 200만 원을 후원해 눈에 띄었다. 류근찬 현 자유선진당 의원도 당시 국민중심당 심대평 의원에게 200만 원을 후원했다.
이외에도 통합민주당 이목희 의원도 같은 당 김영대 의원에게 500만 원을 후원했다. 김영대 의원은 이번 총선에서는 영등포 갑 공천에서 김영주 의원에게 밀려 고배를 마셨다. 또 통합민주당 김명자 의원은 임종석 의원에게 200만 원, 김종인 의원은 우윤근 의원에게 200만 원, 이계안 의원은 한명숙 의원에게 500만 원을 후원해 기부금을 통해서도 의원 간의 ‘친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품앗이’ 기부를 가장 많이 받은 인물은 단연 박근혜 의원. 박 의원은 곽정환 전 평화통일가정당 대표로부터 500만 원, 김학원·김태환 의원으로부터 각각 200만 원과 300만 원을 후원받아 총 1000만 원을 다른 ‘정치인’으로부터 지원받은 셈이 됐다.
의원이 ‘본인에게’ 기부를 한 사례도 있었다. 민주당 김교흥 의원과 유선호 의원은 각각 본인의 후원회에 300만 원과 500만 원을 기부했고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도 자신의 후원회에 500만 원을 기부했다. 그런가 하면 의원 보좌관이 자신이 모시는 의원에게 기부를 한 사례도 눈에 띄었다. 한나라당 김성조 의원은 자신의 보좌관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200만 원과 10만 원을 기부받았다. 또 대통합민주신당 김근태 의원도 보좌관이 두 번에 나눠 300만 원과 10만 원을, 최규성 의원의 경우에도 보좌관이 500만 원을 기부했다.
국회 관계자에 따르면 과거엔 이렇듯 자신의 이름이나 보좌관의 이름을 통해 기부금을 내는 경우엔 ‘깨끗하지’ 못한 돈이 전달되는 사례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엔 기부자의 신원을 공개하지 않기 위해 이러한 ‘편법’을 동원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기부자가 신원 공개를 꺼리는 경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리는 일도 있다”고 전했다.
‘촌지성’을 의심받는 후원금도 적지 않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지역구 구청장이 해당 지역 의원을 후원하는 경우가 흔했고 시·군·구의원들이 자신의 공천권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해당 지역구 의원들에게 기부금을 낸 사례도 많았다. 한나라당 박진 의원(서울 종로)은 김충용 종로구청장으로부터 200만 원을, 나재암·김귀환 서울시의회 의원으로부터 180만 원과 200만 원을 후원받았다. 진영 의원(서울 용산) 역시 박장규 용산구청장에게 200만 원을, 이종필 서울시의원, 김근태 용산구의원으로부터 각각 210만 원, 306만 원을 기부받았다.
의원이 속한 상임위의 유관단체나 기업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은 사례도 많았다. 특히 건설교통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건설회사 임원들로부터 상당 금액을 후원받았다. 한나라당 김재경 의원은 ‘한반도 건설’ ‘화일건설’ ‘덕산종합건설’ 등 지역 건설사 등으로부터 도합 1350만 원을 후원받았고 통합민주당 강창일 의원은 손천수 라온건설 회장으로부터 500만 원, 레미콘 회사 대표 서 아무개 씨로부터 500만 원을 기부받았다. 최재성 의원 역시 건설업에 종사하는 박 아무개 씨로부터 440만 원을 후원받았다. 재경위 소속 의원 중에서는 한나라당 안택수 의원이 이화언 대구은행장으로부터 200만 원을 후원받았고, 대통합민주신당 강봉균 의원이 유석렬 삼성카드 사장과 임원들로부터 1450만 원을 기부받았다. 또 같은 당 문석호 의원은 구자윤 LS산전 사장으로부터 500만 원을 기부받았다.
이외에도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의 기부자 명단엔 병원장과 의사들이 자주 등장했다. 통합민주당 강기정 의원의 경우 병원장 백 아무개 씨와 의사 하 아무개 씨로부터 도합 700만 원을 후원받았고, 같은 당 노웅래 의원도 한의원 대표 조 아무개 씨와 신촌연세 병원장 김영진 씨로부터 각각 150만 원, 500만 원을 기부받았다.
‘대가성’ 기부금으로 의심되는 사례도 많았지만 기부자와 의원 간의 남다른 친분 관계가 후원으로 연결된 사례도 있었다. 통합민주당 김근태 의원에게 매달 40만 원씩 기부한 브랜드네이밍 전문업체 ‘크로스포인트’ 손혜원 대표는 김 의원과 수년 전부터 친분을 다져온 사이. 김 의원과 손 대표는 지난 2006년 신영복 교수의 정년퇴임 콘서트에 함께 참석해 축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손 대표가 만든 ‘처음처럼’이라는 소주 이름은 신 교수가 무상으로 제공해준 것이었다고 한다.
재계 인사로는 금호건설 정광식 상무가 통합민주당 김현미 의원에게 200만 원을 기부했고, 아시아나항공 윤영두 부사장이 같은 당 정성호 의원에게 500만 원을 후원했다. 또 계룡건설 이시구 대표와 이인구 회장이 당시 국민중심당 심대평 의원에게 각각 500만 원 씩 총 1000만 원을 냈다. 이인구 회장은 한나라당 이재창 의원에게도 300만 원을 기부했고 당시 무소속 정진석 의원과 한나라당 이진구 의원에게도 300만 원씩을 후원해 눈길을 끌었다.
S오일 김선동 대표는 대선 이후인 12월 16일 통합민주당 정세균 의원에게 200만 원을 후원했고 삼성생명 박상호 부사장은 김혁규, 전재희 의원에게 200만 원씩, 김양수 의원에게 500만 원을 후원했다. 박 부사장은 직업란에도 ‘회사원’이라고만 간단히 기재한 데다 김양수, 김혁규 의원에게는 부인과 딸 등의 이름을 통해 추가로 800만 원과 600만 원씩을 기부했다. 박 부사장은 해당 의원들과 부부동반 모임을 통해 가족들도 모두 잘 아는 사이라는 입장을 밝혔으나 ‘개인이 국회의원 1명당 연 500만 원 한도, 총 2000만 원까지만 후원할 수 있다’는 조항을 비껴가기 위한 편법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유명인사들 중에는 국회의원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하면서도 신원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명단에는 고액 기부자의 주소, 직업, 전화번호 등을 기재하도록 되어 있으나 ‘빈칸’이 적지 않은 것. 총 7782건 중 145건에서 직업란이 비어 있었다. 또 직업란에 제각각 다른 ‘신분’을 써넣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김재철 동원그룹 대표이사는 통합민주당 김효석 정동채 의원,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에게 각각 500만 원씩을 후원하면서 직업란에는 ‘동원그룹 대표이사’ ‘기업인’ ‘회사원’ 등으로 각각 다르게 적었다.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은 통합민주당 김종인 의원과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에게 각각 ‘사업(가)’ ‘회사원’이라는 신분으로 500만 원과 250만 원을 기부했다. SBS 윤세영 회장은 맹형규 의원에게 300만 원을 기부하면서 ‘기업인’이라고 기재했고 김각영 전 검찰총장은 한나라당 김영숙 의원에게 200만 원을 후원했는데 직업란에는 ‘회사원’이라고 적어 넣었다.
송재호 경동도시가스 대표 역시 한나라당 최병국 의원에게는 ‘대표’ 명의로 500만 원을 냈지만 같은 당 김기현 의원에게는 ‘회사원’으로 400만 원, 윤주환 의원에게도 ‘회사원’으로 300만 원을 기부했다.
또 강광언 전 롯데물산 대표의 경우 통합민주당 이근식 의원에게 400만 원, 안영근 의원에게 200만 원,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에게 200만 원을 기부했는데 직업란에는 각각 ‘경영인’ ‘기업인’ ‘회사원’으로 기재했다. 강 전 대표에게 기부한 의원들과의 친분에 대해 묻기 위해 연락을 했으나 “내가 그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며 다소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상득 의원의 경우엔 유명렬 전 코오롱정보통신 고문이 500만 원을 기부했으나 직업란에 ‘주부’로 기재돼 있었다. 기부자의 연락처란에 적힌 유 고문의 전화번호 역시 잘못된 번호였다. 이에 대해 이상득 의원실 관계자는 “지구당 후원회 사무실로부터 명단만 넘겨받아 일일이 확인하지 못해 생긴 착오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