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부호형’ 설움 없어도 ‘율도국’ 건설 꿈꾼다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 사진출처=MBC 방송화면 캡처
홍길동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사는 ‘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는 겁니까’라고 외치는 그 유명한 ‘호부호형’이다. 홍길동이 양반가의 서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라마 <역적>의 홍길동은 씨종인 아모개의 아들이다. 비록 서자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양반이었던 바로 그 홍길동이 아닌 씨종의 아들인 홍길동이다. 드라마 <역적>은 1회 초반 오프닝 시퀀스를 주인공이 우리가 알던 바로 그 홍길동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 대사는 다음과 같다. “난 고려 왕족의 후손도, 정승판서의 서자도, 몰락한 양반가의 자식도 아니요. 난 그저 내 아버지의 아들이요. 내 아버지 씨종 아모개.”
광해군 시절에 쓰인 <홍길동전>은 세종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드라마 <역적>은 연산군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허균이 소설 <홍길동전>을 쓸 당시 홍길동이라는 주인공을 창조해내는 과정에서 연산군 시절에 살았던 실존 인물 홍길동을 참조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실제 등장하는 실존인물 홍길동은 도적의 우두머리로 당상관(정3품)의 의상을 입고 관청을 드나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그가 워낙 거대한 도적 무리를 이끌었던 터라 그 여파가 중종 때까지 이어졌다는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에 기록돼 있을 정도다.
이처럼 실존 인물인 홍길동을 중심으로 허균은 소설 <홍길동전>을 썼다. 허균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홍길동을 서얼 출신으로 만든 뒤 빼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채 도적떼의 우두머리가 돼 부패한 관리들의 재물을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내용의 소설을 완성한다. 이처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급진적인 요소가 다분한 소설 탓인지 허균은 결국 역모죄로 처형을 당한다.
결국 요즘 시청자들이 만나고 있는 홍길동은 실존인물 홍길동에 소설 속 홍길동을 더한 뒤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새로운 홍길동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엄청나게 무거운 돌을 번쩍 들어 올리는 등 소설 속 홍길동의 모습은 ‘아기장수’였으며 ‘역사’인 드라마 속 홍길동의 모습으로 옮아 왔다. 또한 백성의 마음을 훔치는 역적의 삶을 살아간다는 설정 역시 실존인물보다는 소설에 가깝다.
반면 도적의 우두머리로 당상관(정3품)의 의상을 입고 관청을 드나들었다는 실존 인물 홍길동의 모습도 드라마 속 홍길동의 모습에 잘 녹아들었다. 주변 인물도 실존 인물과 비슷하다. 연산군일기에는 도적 홍길동과 연루돼 옥중에서 죽은 엄귀손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다. 엄귀손은 무관으로 당상관(정3품)까지 오른 인물로 드라마 속 엄자치(김병옥 분)를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충원군(김정태 분) 역시 실존 인물 창원군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30부작 드라마인 <역적>은 21일 방송분이 16회로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다. 짧게 등장한 1회 초반 오프닝 시퀀스를 보면 대략 드라마 후반부를 가늠할 수 있다. 홍길동은 그 세력을 더욱 확대해 연산군과 맞서게 되는 데 공성전을 벌일 수준이니 말 그대로 역모를 꾀해 역적이 된다. 성루를 지키고 있는 홍길동의 무리는 일청(허정도 분), 세걸(김도윤 분), 끝쇠(이호철 분), 업산(이명훈 분) 등이다. 왜 소부리(박준규 분)와 용개(이준혁 분)는 함께 있지 않는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리고 홍길동의 바로 옆에는 형 길현(심희섭 분)이 있다. 지금은 이들 3남매가 서로 떨어져서 지내고 있지만 그들이 만나는 과정은 드라마의 주된 볼거리가 될 전망이다. 특히 길현은 관직에 나가 연산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지만 결국 그와 홍길동이 맞서는 상황에선 동생과 함께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령(채수빈 분)은 관군에 잡혀 있으며 결국 홍길동은 가령을 향해 화살을 쏜다. 비극적인 사랑이 드라마의 후반부에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허태학(김준배 분)의 수하에 있었고 홍길동에 대한 적개심이 강렬했던 모리(김정현 분)가 관군을 이끌고 홍길동과 대치 중이라는 부분도 눈길을 끈다.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임을 감안하면 <역적>의 후반부와 결말 역시 역사적인 기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당상관(정3품)의 의상을 입고 관청을 드나들었다’는 <연산군일기>의 모습이 드라마에도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암시하는 설정은 이미 등장했다. 김자원(박수영 분)과의 인연으로 홍길동이 왕을 뒷배로 두고 돈을 벌기 시작한 것. 사치로 왕의 위엄을 보이려는 연산군 때문에 내수사의 재정이 힘겨워지자 김자원과 홍길동이 내밀한 거래를 시작한다. 이런 흐름이 훗날 홍길동이 당상관(정3품)의 의상을 입고 관청을 드나드는 설정으로 연결될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그 과정에서 홍길동이 서서히 건달에서 진정한 역사로 변모해 나가며 연산군에 맞서 백성을 훔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결말로 가면 우선 엄자치(김병옥 분)가 실존 인물 엄귀손처럼 홍길동 사건에 연루돼 의금부에 하옥돼 결국 옥사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홍길동은 어떻게 될까. <연산군일기>에는 그가 충청도 일대에서 도적질을 했으며 당상관인 엄귀손 등이 뒤를 봐줬을 만큼 세력이 어마어마했다고 돼 있다. 결국 추포돼 의금부에서 추국하였다고도 기록돼 있다. 그런데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기록돼 있지 않다. 아무래도 작가 입장에선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가 바로 여기였을 수 있다. 홍길동이 관군에 추포된 것까지만 역사에 기록돼 있는 만큼 그 이후의 상황은 오로지 작가의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허균은 소설 <홍길동전>의 결말을 그가 율도국으로 떠나 그곳의 왕이 된다는 것이다. <역적>의 결말 역시 실존인물과 소설이라는 큰 틀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있음을 감안할 때 율도국으로 떠나는 소설의 설정이 차용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항간에선 율도국이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조재진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