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 풀린 ‘형님’ 아무도 못 말려
▲ 한나라당의 권력 구도가 이상득 부의장 앞으로 집중되면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이명박 대통령(오른쪽)과 이상득 부의장. | ||
이와 함께 이 부의장에게 대립각을 세웠던 이재오 의원이 미국으로 출국하게 되면서 한나라당은 완전히 이 부의장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는 분위기다. 이 부의장은 “나는 당권 구도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않았다”며 바짝 몸을 엎드리고 있지만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려는 웬만한 여당 의원들은 모두 이 부의장 사무실 문을 두드리고 있는 실정이다. 여권에 불고 있는 ‘형님 정치’의 막후를 들춰봤다.
“이명박이가 내 말을 들을 것 같으냐. 이명박이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여권에서 현직 대통령 이름 ‘이명박’을 ‘명박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상득 국회부의장이다. 이는 지난 3월 24일 이재오-정두언 연합군의 거센 총선 불출마 압박에 대해 이 부의장이 ‘나를 내쫓으려는 세력의 불순한 의도가 있다’라고 강하게 반발하는 과정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평소 기자들과 잦은 모임을 갖는 편도 아닌 그가, 기자들 앞에서 작심한 듯 거침없이 내뱉은 그 말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평소 조용한 성품에 자신의 의중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 부의장이었기에 그의 ‘명박이’ 발언에 주변 사람들도 모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시 대부분의 기자들은 이 부의장의 거침없는 발언에 대해 ‘과연 대통령의 형이 무섭긴 무섭구나’라는 생각이 스치듯이 지나갔다고 입을 모은다. 그리고 그 ‘명박이’ 발언은 이 부의장이 ‘처음으로’ 자신과 이 대통령 간의 ‘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라는 해석도 따랐다. 왜냐하면 이 대통령도 이 부의장의 정치적 거취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했던 말을 더 들어보자.
“(우리 둘 다) 나이 육십이 넘었는데 서로 의논할 게 뭐가 있겠느냐. 내가 국회의원 선거 나올 때나, 동생이 대통령 선거 나올 때나 서로 의논한 적 없다. 다 자기가 할 일은 서로 알아서 한다.”
“개인 문제를 (내가) 왜 대통령과 통화해 의논하느냐. 우리는 그렇게 유치한 형제가 아니다.”
“내가 대통령에게 매인 사람인가. 대통령이 내 형이냐.”
한 중견 기자는 당시 이 부의장 발언에 대해 “현직 대통령을 공개 석상에서 ‘명박이’라고 부르는 이 부의장은 한나라당에서 이미 ‘정말 무서운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 당 일각에서는 ‘집권 초부터 대통령의 친인척이 이렇게 막강했던 정권이 있었느냐’라는 말까지도 나온다. 물론 55인 모임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것에 대해 격분해서 했던 말들이지만, 그의 말 속에는 이 대통령도 자신의 거취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경고를 날리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당시 이 부의장의 말을 들으면서 ‘대통령도 그를 마음대로 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솔직히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부의장의 한 측근은 이에 대해 “이 부의장도 평소 말이 없고 순한 편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기질처럼 ‘일단 위기가 닥치면 정면돌파’를 외치는 불도저 성향이 있다. 이재오 의원을 비롯한 수도권 의원들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이 부의장을 제거하려는 것에 대해 상당히 격앙돼 있어 그런 ‘험한’ 말들까지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명박이’ 발언을 ‘역린’으로 확대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내 형이냐’라는 항변 뒤에는 ‘나는 (엄연하게) 대통령의 형’이라는 강한 주장이 담겨 있고, ‘이명박이가 내 말을 들을 것 같으냐’라는 말 뒤에도 ‘명박이는 나한테 그렇게 못한다’라는 자신감이 배 나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부의장이 이렇게 ‘동생’에 대해서도 강하게 나올 수 있는 배경에는 어린 시절 그가 동생에 대해 은연중 느꼈을 ‘우월감’도 내포돼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음은 고등학교 입시를 몇 달 앞두고 진학을 포기한 ‘소년’ 이명박에게 그의 어머니가 했다는 말이다.
“집안이 어려우니 너희 다섯을 다 공부시킬 순 없다(이명박 대통령은 본래 4남 3녀 가운데 다섯째였다. 하지만 바로 손 위 누이와 막내동생이 6·25 전쟁 때 사망하고 큰형 상은 씨와 둘째형 상득 씨, 누이 귀선 씨, 여동생 윤진 씨 등 5명의 형제가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도 학교에 안 보내면 집안에 희망이 없으니 한 명만 대학까지 공부시키겠다. 나머진 학비 버는 데 합심하도록 하자.”
▲ 이상득 부의장의 영향력 아래 당선된 홍준표 원내대표(왼쪽)와 임태희 정책위의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어머니는 머리가 좋기로 온 동네에 소문난 둘째아들을 ‘서울 유학’ 보내기로 결심했다. 남은 식구들은 모두 장사에 전념해 형의 학비를 벌며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어머니의 ‘희망=둘째형=서울 유학’이라는 공식을 뒤집기란 불가능했다. (내가 어렵게 들어간)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어머니는 중대 발표를 하셨다. ‘아무래도 서울로 이사해야 할 것 같다. 둘째형 뒷바라지를 하려면’….”
이 대통령을 오랫동안 보좌해온 한 측근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 대통령이 이 부의장을 상당히 어려워한다. 아마 어릴 적부터 집안의 희망이었던 이 부의장에 대해 느끼는 일종의 ‘경외심’ 아니었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가족사를 통해 두 사람 간의 ‘정치적’ 관계를 유추해 보면 이 대통령이 비록 권력의 정점에 있지만 자신의 정치적 잣대로 ‘형님’을 마음대로 재단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이 부의장의 이런 ‘자신감’은 지난 3월 23일 제기된 소장파 55명의 ‘2선 후퇴’ 요구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데 이어 ‘홍준표-임태희’ 체제를 등장시킨 막후 실력자로까지 그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 부의장이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 ‘홍-임’ 체제의 ‘무혈입성’은 그동안 이재오 의원 그룹이 외쳐온 ‘수도권 출신 대표론’을 무력화시킨 것으로, 지난 3월 55인 회동 진압에 이은 ‘제2의 진압’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지난 5월 18일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는 친이그룹 핵심 의원 30여 명이 참석해 ‘안상수 대표론’을 상의하기로 돼 있었다고 한다. 이 회동은 이 부의장의 ‘박희태 대표론’에 대항하기 위한 ‘사전 모의’ 성격이 짙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의장이 ‘갑자기’ 나타나면서 정치적인 논의의 장에서 이재오 의원 환송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당시 사정을 아는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재오 의원이 지리산에서 칩거하다 상경한 뒤 청와대에서 이 대통령과 독대한 것으로 안다. 당시 이 의원은 ‘수도권 출신 대표론’을 제기했는데 이 대통령이 강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의원이 청와대의 기류가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그 뒤 수유리 모임에서 꼬리를 내렸다는 얘기가 퍼졌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이 수유리 모임을 계기로 이 부의장이 여권의 실질적인 권력 중심추로 등극했다고 본다. 이재오 의원과의 라이벌 관계도 수유리 모임에서 ‘폭탄주’로 앙금을 터는 모양새를 연출하며 ‘항복 선언’을 받아낸 것이 아니냐는 말들도 나온다. 이 부의장은 이날 모임의 ‘성격’에 대해 “이 전 최고위원과 내가 자꾸 (안 좋게) 비쳐 그 부분에 대해 (서로) 그렇지 않다는 얘기를 나눴다. 이 의원과 초심으로 돌아가 정말 고생해 만든 이명박 정부를 위해 협력해서 잘하기로 했다”라며 한껏 몸을 낮추고 있다. 이재오 의원은 지리산에서 하산한 뒤 한때 “한나라당을 국민중심 정당으로 만들려면 수도권에서 당 대표가 나와야 한다. 지금까지는 주로 영남에서만 당 대표가 나왔지 않는가”라며 ‘수도권 당 대표론’을 강하게 설파하고 다녔지만 두 번이나 이 부의장의 벽을 넘지 못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5월 26일 미국으로 쫓기듯 떠났다).
정치권에선 이 부의장의 ‘급부상’에 이견이 엇갈리고 있다. 현재는 이재오 의원 등 친이그룹의 구심점 하나가 빠진 권력 공백 상황을 일시적으로 이 부의장이 메울 뿐 앞으로 수많은 견제가 들어와 결국 쇠퇴할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상득 부의장 그룹이 이명박 정권 내내 권력의 핵심으로 활동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라는 예상을 내놓기도 한다. 이는 그를 견제할 소장파 세력들마저 여권에서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몸보신 모드’로 들어가면서 더 이상 이 부의장의 질주를 제어할 당 내 브레이커가 없어졌음을 뜻한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박희태 대표 체제가 들어서면 당의 전반적 성향이 보수로 치우치게 된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의 개혁 드라이브를 당에서 강하게 추동해 주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명박 정권이 노쇠한 관리형 대표로 국면 반전을 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상득 부의장의 당 장악은 여당이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형성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퇴행적이고 현상유지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서는 걱정스럽다”라고 말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