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신한 사태’…한 명이라도 더 끌어모아 방어 나선다
국내에서 금융지주 회장이 퇴임 후 고문에 위촉된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무엇보다 퇴임 후에도 경영에 간섭한다는 논란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 대표 금융지주사인 KB·신한·하나금융지주의 역대 회장 중 유일하게 퇴임 후 자사 고문으로 위촉된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은 한동안 막후 경영 논란에 휩싸였다. 김 전 회장은 2013년 12월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자 고문직을 사퇴했다. 당시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은 김 전 회장 후임이 될 차기 고문을 선임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 고문은 ‘라응찬 라인’으로 분류된다. 라응찬 라인이란 2010년 신한금융의 경영권을 놓고 라응찬 전 신한금융 회장과 신상훈 전 금융지주 사장이 고소·고발전을 벌인 ‘신한 사태’ 때 라 전 회장을 지지한 세력을 일컫는다. 이때 세력이 지금까지 신한금융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 라 전 회장은 현재 노인성 치매를 앓아 요양 중임에도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까닭은 그만큼 당시 세력이 신한금융 내에서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라응찬 라인에 대한 재일교포 주주들의 지지는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라응찬 라인의 대표적 인물인 위성호 전 신한카드 사장이 지난 2월 신한은행장으로 선임될 때도 재일교포 주주들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말이 돌고 있다. 위 행장은 신한 사태 때 라 전 회장과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교포 주주들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신한금융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라응찬 전 신한금융 회장은 퇴임했지만 그의 라인이 여전히 신한금융을 장악하고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사진은 라응찬 전 회장. 일요신문 DB
위성호 신한은행장, 김형진 신한금융투자 사장, 임영진 신한카드 사장 등이 라응찬 라인으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신한금융의 대표 계열사를 이끄는 핵심 인물들이다. 여기에 한 고문까지 포함된다. 한 고문은 재일교포 신한금융 주주들과 친분이 두터워 신한금융에서 영향력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한금융 관계자는 “위 행장은 신한 사태 때 홍보 담당 임원을 맡아 사측을 대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며 한 고문 역시 일반 회사의 고문과 마찬가지로 CEO가 조언을 요청하면 그에 대한 자문을 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라며 ”그런 식으로 따지면 라응찬 라인 아닌 사람이 어딨느냐“고 항변했다.
금융권에서는 한 고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재일교포 사외이사들을 비롯한 라응찬 라인으로 분류된 인사들이 한 고문을 지지해 회장이 될 수 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 고문은 2011년 회장으로 내정된 후 기자간담회에서 “누구보다 재일교포 주주들의 창업 이념을 계승하겠다”고 말해 재일교포 주주들의 마음을 사며 화답했다. 그는 회장 취임 후 매년 초 일본을 방문해 재일교포 주주들과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한 고문의 회장 퇴임식 때는 눈물을 훔친 재일교포 주주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권 관계자는 “한 고문이 처음에는 라응찬 라인으로 분류되지 않아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며 “서울대 출신인 한 고문이 고졸로 입사한 신상훈 전 사장에 비해 능력이 뒤처진다는 평가를 뒤집어보기 위해 라 전 회장과 연합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끝난 줄 알았던 신한 사태는 최근 다시 불이 붙고 있다. 이전의 싸움이 신한금융 내 파벌 간 싸움이었다면 이번 싸움은 신상훈 전 사장 개인과 신한금융의 싸움이 되고 있다. 지난 3월 9일 대법원 1부는 신 전 사장 상고심에서 벌금 2000만 원을 선고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앞서 2013년 12월 2심 재판에서는 신 전 사장의 배임, 금융지주회사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횡령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려 2000만 원의 벌금을 선고했다. 대부분 혐의에서 무죄를 받은 신 전 사장은 재임 시절 받은 스톡옵션 행사권을 요구하고 있다. 신 전 사장은 “라 전 회장은 금융감독원(금감원)으로부터 문책 경고를 받았음에도 스톡옵션 행사권이 유지됐는데 나한테 권한을 주지 않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신한금융 이사회를 빨리 열라고 독촉할 수는 없어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토로했다.
더욱이 신 전 사장이 지난해 12월 우리은행 사외이사로 선임되면서 금융계에 복귀해 라응찬 라인 입장에서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형국이다. 금융권 다른 관계자는 “신 전 사장은 금융계뿐 아니라 정치권 인맥도 막강하다”며 “그가 신한 사태를 겪고도 금융계에 남아 있는 건 화려한 인맥 덕분이며 향후 그가 금융당국에 가기라도 하면 신한금융은 상당히 곤란해진다”고 전했다. 신 전 사장은 향후 행보에 대해 “지금 이야기할 단계가 아니다”라면서도 “어디든지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금융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했다.
한 고문이나 조용병 회장은 원론적인 답변만 하고 있다. 조 회장은 지난 3월 27일 기자간담회에서 “신한 사태와 관련해서 말을 아끼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며 “시간을 두고 절차에 따라 스톡옵션 지급 여부 등을 결정할 것”이라고 전했다. 앞서 지난 3월 14일 한 고문은 기자간담회에서 “지금 시점에서 누가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보다는 큰 그림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신한금융 관계자는 “신한금융은 오너 구조가 아니다 보니 회장이 독단적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며 “이사회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간 신한금융 이사회는 라응찬 라인의 세력 아래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라응찬 라인은 재일교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데 사외이사 9명 중 4명이 재일교포였던 것. 조 회장이 취임하면서 이사진에도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라응찬 라인의 세력은 막강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라응찬 라인으로 여겨졌던 고부인 신한금융 사외이사는 임기가 만료돼 물러났지만 대신 박안순 일본 대성그룹 회장과 주재성 전 금감원 부원장이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됐다. 박안순 사외이사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부단장으로 재일교포 주주들을 대표한다. 또 주재성 사외이사는 신한금융과 법률자문계약을 맺고 있는 김앤장법률사무소의 상임고문이다.
민간연구기관인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지난 3월 20일 분석자료를 통해 “박안순 이사는 신한금융 일본계 주주를 대표해 사외이사로서 독립성이 결여돼 있다고 판단한다”며 “최근 3년 내 해당회사와 자문계약 및 법률대리 등을 수행하는 경우에도 독립성을 이유로 반대를 권고하고 있어 주재성 이사의 선임도 반대를 권고한다”고 전했다.
신한금융 본사 전경.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시민단체에서는 신한금융 내 라응찬 라인의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계속 나온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신 전 사장은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백순 전 행장은 금융지주사법 위반으로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는데 신한금융은 이 전 행장 개인의 비리로만 치부하고 있다”며 “신 전 사장에 대한 사과가 아닌 신한금융의 고객과 주주들에게 사과를 해야 하고 그 라인에 있었던 라응찬 라인은 일선에서 물러나는 게 맞다”고 전했다. 한 전 회장을 고문에 위촉한 것에 대해 뒷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