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메스·TEK·ASML코리아 과반노조 달성 초읽기…“메모리처럼 가격 폭등하는 구조 아냐” 신중론도
[일요신문] 국내 반도체 장비업체에 설립된 노동조합이 빠르게 몸집을 불리며 과반노조 달성 초읽기에 들어갔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함께 반도체 생산 현장을 뒷받침하고도 기여도에 걸맞은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문제의식과 상대적 박탈감이 노조 결집으로 이어지는 분위기다. 반도체 제조사들의 투자 확대에 힘입어 장비업체들이 안정적인 이익을 내기 시작하면서 노조를 중심으로 한 성과 공유 요구가 업계 전반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보상체계 불만 고조
국내 반도체 장비업체에 설립된 노동조합이 빠르게 몸집을 불리며 과반노조 달성 초읽기에 들어갔다. 세메스 화성 사업장 전경(왼쪽)과 2025년 중국국제수입박람회(CIIE)에 참여한 ASML. 사진=세메스 홈페이지·연합뉴스지난 7월 15일 공식 출범한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 노조에 1200명이 넘는 조합원이 가입했다. 회사 구성원 절반으로 추산되는 1400명까지 200명도 채 남지 않았다. 글로벌 반도체 장비업체 도쿄일렉트론의 한국법인 도쿄일렉트론코리아(TEK) 노조(금속노련 TEK지부)도 7월 16일 출범한 이후 조합원 약 900명을 확보해 과반 달성까지 200명 남짓 남겨두고 있다.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업체 ASML 한국법인인 ASML코리아 노조(화섬식품노조 ASML코리아지회) 역시 조합원 1000명을 돌파하며 과반노조 달성까지 200명 정도를 남겨뒀다.
반도체 장비업체 노조가 빠르게 세를 불리는 배경엔 성과급 등 보상체계에 대한 불만이 자리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호황으로 반도체 생태계 전반의 실적은 개선됐지만, 장비업체 직원들의 보상은 제자리라는 인식이 확산한 것이다. 특히 지난 5월 삼성전자가 반도체를 담당하는 DS(디바이스솔루션) 부문 직원들에게 1인당 평균 6억 원 규모의 특별경영성과급을 지급하기로 하면서, 같은 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장비업체 직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졌다는 후문이다.
반도체 장비업계는 고객사 생산이 늘어나면 장비업체 직원들의 업무량과 노동 강도도 함께 높아지는 구조다. 반도체 장비를 다루는 숙련 인력은 단기간에 양성하기 어려워 현장 부담이 기존 인력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뜩이나 주요 생산시설이 지방에 위치해 근무를 기피하는 현상까지 겹치면서 반도체 장비업계는 만성적인 인력난을 겪고 있다.
반도체 장비업계 한 관계자는 “장비업체엔 고객사 라인에서 일하는 CS 엔지니어 비중이 상당히 높다. 라인 규모가 커서 방진복을 벗고 식사한 뒤 1시간 만에 다시 돌아오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서 점심도 거르는 경우가 많다. 설비에 문제가 생기면 야간·주말 긴급 대응에도 투입된다”라며 “노력한 만큼 정당한 보상이 따라왔으면 하는데 성과급이 어떻게 매겨지는지조차 투명하게 공개가 안 된 상황”이라고 밝혔다.
반도체 장비업계 다른 관계자는 “HBM(고대역폭메모리)이나 D램 수요가 급격히 늘면서 메모리 가격이 많이 올라 반도체 제조업체의 영업이익은 대폭 증가했다. 하지만 반도체 생태계가 수직 계열화돼 있다 보니 그 성과가 생태계 전반으로 두루두루 퍼지기보다 특정 기업에 집중되는 점에 반도체 장비업체 직원들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라고 말했다.
반도체 장비업계는 고객사 생산이 늘어나면 장비업체 직원들의 업무량과 노동 강도도 함께 높아지는 구조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생산 라인. 사진=삼성전자 제공반도체 장비업체 노조들은 과반노조 지위를 확보하는 대로 회사에 교섭을 요청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과반노조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대표 지위를 갖는다.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바꿀 때 동의권을 행사할 수 있어 임금·성과급·근로시간 등 주요 제도를 둘러싼 교섭에서 영향력이 한층 커진다. 일부 노조는 향후 협상 상황에 따라 단체행동에 나설 가능성도 거론된다.
교섭 핵심 의제는 성과급이 될 전망이다. ASML코리아의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91억 1834만 유로(14조 9319억 원), 2억 5530만 유로(4181억 원)로 2024년 대비 29.3%, 14.4% 늘었다. ASML코리아 직원들은 올해 예년과 비슷한 성과급을 받았다. ASML코리아는 내년부터 직원들에게 연간 기본급의 15% 수준을 특별 보너스로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전액 RSU(양도제한조건부주식)로 3년 동안만 지급하는 방식이다 보니 직원들 사이에선 회사 성과 보상 체계가 보수적이란 볼멘소리가 나온다.
삼성전자 자회사인 세메스는 올해 1분기 매출(5963억 원) 중 약 85%가 삼성전자와 삼성전자 해외 법인에서 나왔다. 상대적으로 영업 마진을 크게 남기지 않고 장비를 공급하는 구조라, 삼성전자 영업이익에 기여한 만큼 세메스 직원들의 보상에도 일부 반영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도쿄일렉트론코리아 직원들 사이에선 지난해 회사가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하고도 성과급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는 불만이 제기된다. 도쿄일렉트론코리아의 2026회계연도(지난해 4월부터 올해 3월) 매출은 2조 2284억 원, 영업이익은 3773억 원으로 2025회계연도 대비 각각 45.8%, 130.1% 올랐다.
하지만 장비업체 노조들이 고객사인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성과급과 직접 비교를 하는 데 있어서는 신중한 분위기도 감지된다. 장비 가격은 메모리처럼 폭등하는 구조는 아니어서 반도체 제조사들과 영업이익률에는 차이가 있어서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DS 부문의 1분기 영업이익률은 70%대인 반면, 세메스·도쿄일렉트론코리아·ASML코리아의 지난해 영업이익률(도쿄일렉트론코리아는 2026회계연도 기준)은 각각 8.7%, 16.9%, 2.8%였다. 삼성전자는 2026년부터 2028년까지 연간 영업이익 200조 원, 2029년부터 2035년까지는 영업이익 100조 원을 넘겨야 특별경영성과급을 지급한다는 조건을 달기도 했다.
지난 4월 23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에서 열린 삼성전자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의 투쟁 결의대회. 사진=연합뉴스#장비업계 전반 확산 전망
노조를 중심으로 한 보상체계 개편 움직임이 장비업계 전반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외국계 기업의 한국 법인 노조 조직력이 강화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는 평가다. 엄재철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 정책부회장은 “과거 외국계 기업은 한국 법인을 사무소 정도로 생각했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투자가 늘어나면서 한국 법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며 “안정적으로 이익을 내는 구조가 마련되면서 직원들의 보상 요구 움직임이 활발해질 수 있다”라고 내다봤다.
인공지능(AI) 반도체 투자가 늘면서 전공정(웨이퍼 제조와 회로를 새기는 공정)과 후공정(칩을 패키징하는 공정) 핵심 장비를 중심으로 주문이 증가하는 추세다.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2027년 생산 물량이 대부분 예약이 완료됐다. 글로벌 전자산업 공급망 협회인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에 따르면 전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 규모는 2024년 1169억 달러(약 166조 원)에서 2028년엔 역대 최대치인 2295억 달러(326조 원)로 연평균 18.4%씩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관련, 권영화 서울기독대 글로벌AI융합대학 교수는 “장비업체는 대체 인력을 구하는 게 쉽지 않다. 직원들이 단체행동에 돌입하면 현장에도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직원들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내다봤다. 다만 사업 내용에 따라 제약이 있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핵심 장비를 만드는 업체가 아니라면 제조사 입장에선 주문처를 바꾸면 된다”고 말했다.
성과급 합의 1년 만에…SK하이닉스 노사 긴장감 팽팽
‘영업이익 N% 성과급’ 논란의 진원지인 SK하이닉스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지난해 노사가 10년 동안 유지하기로 합의한 성과급 제도가 다시 협상 테이블에 오르면서다.
‘영업이익 N% 성과급’ 논란의 진원지인 SK하이닉스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SK하이닉스 이천 건물 전경. 사진=일요신문DB지난 8월 4일 SK하이닉스 노사는 청주캠퍼스에서 5차 임금·단체협상(임단협) 본교섭에 나섰다. 노사 모두 교섭 결과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다. 업계에선 한동안 진통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SK하이닉스 노사 대립의 핵심 원인은 올해 사측이 제시한 성과급 제도 개편안이다. 사측은 성과급인 초과이익분배금(PS)의 일부를 주식으로 제공하고 일정 기간 매도를 제한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사측은 영업적자가 발생할 경우 임금을 조정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지난해 교섭에서 SK하이닉스 노사는 영업이익의 10%를 재원으로 하는 PS 상한을 폐지하고 이를 10년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PS 지급액의 80%는 당해연도에 현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 20%는 2년에 걸쳐 나눠 지급하는 내용이다.
노조는 지난해 어렵게 마련한 합의의 취지가 훼손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지난 7월 30일 열린 4차 본교섭에서 노조는 회사가 5차 본교섭에서 전향적인 수정안을 내놓지 않으면 단체행동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올해 SK하이닉스 연간 영업이익 전망치는 250조 원이다. 이에 따라 PS 재원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토대로 계산하면 약 3만 5000명의 SK하이닉스 임직원은 올해 1인당 평균 7억 원의 성과급을 챙길 것으로 전망된다.
SK하이닉스 입장이 바뀐 배경엔 현금 유출을 최소화해 경영 불확실성에 대비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메모리 반도체는 변동성이 있는 사이클 산업이다. 2023년 SK하이닉스는 7조 7303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삼성전자도 세후 성과급 전액을 자사주로 지급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정부와 투자자들 사이에서 영업이익 N% 성과급이 노동법상 쟁의행위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 이어지는 점도 회사로서는 부담 요인이다.
이와 관련,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아직은 임단협 관련해 확정된 내용이 없다”라고 답했다.